도박꾼에게 도박을 하는 이유를 물으면 돈을 따기 ‘위하여’라고 대답하지 도박중독에 ‘의하여’라고 대답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도박에 중독된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 던져진 질문이다. 도박중독에 의하여라는 대답을 구하려면 도박한테 물어야지. 내가 왜 도박을 하지? 생각하면 돈을 땄을 때의 황홀경이 눈에 아른거린다. '위하여'라는 대답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사실은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많은 경우 내게는 의사결정권이 없다. 질문에 숨은 전제가 있다. 능동적인 결정권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인간은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전제가 틀렸다. 도박중독자는 좀비와 같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물체한테 질문을 한게 잘못이다. 뭔가 근본적으로 틀어져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무시한다. 이제는 들춰야 한다. 허영만 만화 ‘식객’의 한 장면이다. 틀딱 세 사람이 미국에 여행을 가더니 회색곰이 출몰하는 국립공원에서 청국장을 끓여 곰을 유인하는가 하면 백인 캠핑족들에게 청국장을 먹어보라고 강권하며 추태를 부린다. 이 장면에서 일부 독자들은 허영만 화백을 비난한다. 틀딱 삼총사의 행동을 허영만 본인의 입장으로 착각한 것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그렇게 그릴 수 밖에 없다. 등장인물의 발암행동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장치에 불과하다. 독자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 극적 긴장감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끌고 갈 추진력을 잃기 때문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공감은 폭력이다' 하고 제목에 딱 써붙여야지 '공감은 때로 폭력일 수도 있다'는 하나마나한 표현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밀당이 대접하는 것이다. 독자는 설까치를 응원하지만 이현세는 마동탁 캐릭터를 키운다. 밸런스의 논리는 기계적이다. 이 문제를 보기좋게 해결한 작가는 없다. 주인공이 초능력을 가지면 빌런이 맞상대로 떠주어야 한다. 결국 허무해진다. 영화 염력의 실패다. 야무진 빌런이 없어서 망했다. 어차피 허풍인데 허풍을 치려면 세게 쳐야지 소심한 감독이다. 초능력 생겼으면 김정은 때려잡고 아베 혼내주고 푸틴부터 손봐야지 뭣하고 있어. 전쟁으로 20만 죽은게 안 보여? 대단한 초능력 가지고 겨우 한다는 짓이 철거깡패와 아웅다웅 소꿉놀이냐? 세상은 기계다. 우리는 기계에 치인다. 불가항력. 망하거나 비참해진다. 벌거숭이 임금님.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남들이 나를 주목하는 상황이 싫었다. 동물원의 우리에 갖힌 짐승들도 사람이 쳐다보면 짜증을 낸다는데.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그냥 비겁해서 그런 것이었다. 경주는 촌동네라서 그렇고 서울은 다르겠지. 별 차이 없더라. 인간의 약점을 봐버린 것.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임금만 벌거숭이가 아니라 그걸 쳐다보고 있는 벌거숭이 백성은? 임금이야 대본대로 가는거고 벌거벗은 백성은 뭐냐?
벌거숭이가 벌거숭이를 찍은게 윤석열 당선이다. 한국인들이 수준대로 노는 것이었다. 죄다 벌거숭이다. 나는 사람들이 언어에 갇혀있다고 본다. 왜 위하여인가? 의하여라고 말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렵다. 레토릭이 딸린다. 설명충이 나서봤자 문장만 길어진다. 남들이 공감해주지 않으므로 그때 그시절 박정희는 개새끼다 하고 소리지르지 못했지만 아는 사람들끼리는 쑥덕거릴 수 있다. 이곳은 아는 사람들이 인류 중에 가장 앞서가는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지구에 80억이 살고 있다는데 80억이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윤회는 말도 안 되는 초딩 어거지다. 석가는 천재가 분명하다. 연기법은 인류 최고의 논리다. 어떻게 최고와 최악이 한 사람의 뇌에 공존할 수 있지? 어렸을 때의 고민이었다. 문제는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최악에 걸려버린 거다. 숨은 변수는 멋진 아이디어다. 숨은 변수에 의하여 정적우주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역도 가능하다. 숨은 변수에 의한 팽창우주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연세대 이영욱 교수는 가속팽창을 부정하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는지 팽창을 멈췄는지는 상관없다. 과거로 무한은 없다는 말이다. 영원은 없다. 영원은 현재를 부정한다. 영원하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이다. 이건 1초만에 나와야 하는 즉각적인 반응이다. 시간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임은 반드시 시작이 있어야 하며 시작이 없다면 현재 움직임이 없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없는 것이다. 초딩이 봐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내가 초딩 때 이 문제로 두통을 앓았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석가를 좋아했는데 윤회설 같은 개소리를 하다니. 사실 윤회는 석가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당시의 유행이었을 뿐. 윤회를 부정하면 인간들을 복종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 다음 생에 개미로 태어나서 코끼리 뒷발에 밟혀죽는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하고 겁을 줘야 사람들이 시주를 바치고 그걸로 또 한끼를 때우고 그렇게 하루를 해결하며 조금씩 주어진 생을 메꿔가는 것이다. 생이 어찌 구차하지 않은가? “히틀러는 2달 가까이를 베를린 부근 벨리츠에 있던 적십자병원에서 보냈다. 이 때 히틀러는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과, 히틀러가 보기에 각종 꾀병을 부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 환자들, 후방에서 반전운동을 벌이는 사회주의자들과 파업을 일삼는 노동조합 등을 보고 크게 경악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훗날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를 모두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나무위키] 과연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의 음모로 보았을까? 천만에. 유태인의 음모로 모는 전술이 먹힌다고 보았다가 맞다. 도박을 하는 이유는 베팅할 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음모로 모는 이유는 그게 먹혔기 때문이다. 한 번 수렁에 빠지면 기계적으로 가는 거다. 나머지 다른 방법은 모두 실패했다. ‘이게 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예정과 역사하심 때문이니라.’ ‘이게 다 빌어먹을 카톨릭 교회의 삽질 때문이니라.’ ‘이게 다 독일인의 저열한 국민성 때문이니라.’ 이런 기술은 먹히지 않았다. 왜? 다른 걸로 갈아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국민성 때문이라고 하면 그럼 러시아인은 국민성은 좋냐 하는 반격이 바로 날아온다. 유태인의 음모 때문이라고 하면? 그게 독일인의 음모가 아니라는 법이 있느냐는 반격은 날아오지 않는다. 왜?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그 사이에 돈을 벌었잖아. 풍선을 누르면 어디로 튀어나오겠는가? 맬서스 트랩으로 인간을 쥐어짜면 누가 먼저 죽겠는가? 사슬을 잡아당기면 어디서 끊어지겠는가? 사슬이 약한 고리에서 끊어지는 것은 물리학이다. 유태인은 약해서 독박을 쓴다. 백만 군대로 맞서면 유태인 사냥을 할 수 없다. 이못 저못의 대가리를 때려본다. 잘 박히는 못을 때린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적당히 둘러댄다. 이것이 ~라고한다의 법칙이다. 유태인의 음모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게 먹히더라니까. 이게 다 하느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하니까 바로 짱돌이 날아오더라니까. 거기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한 넘이 유태인을 때리면 개나 소나 유태인을 때린다. 어느 새 600만이 죽어 있다. 1백년 전 서구문명의 수준이 그러했다. 각자 수준대로 노는 것이다. 실험실의 생쥐처럼 인간의 행동은 기계적으로 간다. 예측모형을 벗어나는 일은 없다. 나는 인간의 약점을 봐버렸다. 모두가 벌거숭이다. 난쟁이가 공을 쏘아올리는 굴뚝 안에서는 누구나 얼굴이 검다. 인간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 조리있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고 먹힌다 싶으면 마구잡이로 지른다. 왜?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 할거라고 믿으면 자신도 그렇게 한다. 뇌는 사용하지 않는다. 왜 다들 박정희의 개가 되었나? 전쟁 통에 300만 죽는 것을 봤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봤다. 군인들이 기세등등한 것을 봤다. 지금은 검찰이 기세등등하다. 다들 쫄아 있고 우리는 약팀이다. 그렇지만 인터넷이 있다. 우리의 등 뒤에는 세계가 있다. 희망은 거기에 있다. 적들은 좁은 바닥에 가둬서 조지는 기술을 쓴다. 우리는 넓은 배후지로 열어서 사는 기술로 맞서야 한다. 장기전이 필요한 것이며 멀리 있는 등대를 봐야 한다. 진리가 멀리 있는 등대다. 나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를 믿지 않는다. 성찰? 알바가 성찰 백 번 하느니 점장이 임금 한 번 올려주느니만 못하다. 성찰해. 성찰하라구. 왜 주인의식을 갖지 않아? 그래서 성찰했다. 성찰의 약효는 3분. 어느새 복원되어 있다. 용수철은 제 자리로 돌아간다. 알바는 알바다. 그러나 총을 쥐면 달라진다. 애국심이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백날 떠들어봐라 되는가? 총만 보여주면 게임 끝. 독립군은 자본주의고 사회주의고 나발이고 총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게릴라전 하는 모택동이 정규전 하는 장개석보다 많은 총을 줬다. 진정성이고 성찰이고 생태주의고 다 좋은 말이지만 언젠가는 총이 생길지 모른다며 사람을 붙잡아 앉혀놓고 기다리게 하는데 써먹는 레토릭에 불과하다. 우리는 총을 찾아서 움켜쥐어야 한다. 다음은 그 총을 쏴야 한다. 가장 좋은 총은 진리다. 결국 모두 알게 된다. 사람을 광장에 모으는 데는 종교가 먹히고, 음모론이 먹히고, 환빠가 먹히고, 개소리가 먹히지만 광장에 모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동학이 10만 농민을 전주성 앞에 모았지만 그 다음은? 누가 일본에 가서 신무기를 들여오지? 전봉준도 김개남도 손화중도 못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자. 인간은 조또 아니다. 길이 뚫려 있으면 가고 막혀 있으면 안 간다. 상황은 기계적이고 인간의 행동은 예측모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단기전에 집착한다. 리스크 줄이는 보험을 들 것인가 아니면 리스크를 감수하는 도박을 할 것인가? 도박인은 많고 보험인은 없다. 왜? 정치 도박은 실패해도 그 과정에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아볼 수 있잖아. 저승에 간 히틀러는 후회하고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상병 출신에 그 정도면 출세지. 니들이 써준 대본대로 연기했을 뿐이야. 공감이든 권력이든 정치든 그 자체로는 중립이다.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가면 나빠진다. 아는 사람들은 대중들과 다른 지점을 봐야 한다. 선원들이 다 졸고 있어도 선장은 홀로 등대를 보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그냥 말하기 편한대로 말한다. 위태롭다. 언어에 끌려다닌다. 거짓말이 하기 쉽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사람이 말하는게 아니라 말이 사람한다. 언어가 사람을 삼킨다. 한 번의 작은 거짓말이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로 증폭된다. 푸틴처럼 난감해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