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읽을 사람이 읽어야 한다. 개념 있는 소수와 무개념 다수의 대결이 벌어진다. 다수에 속하고 싶은 독자는 읽고 화내지 말고 그만 나가달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행동은 기계적이다. 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남들 가는 곳으로 간다. 자연히 한쪽으로 몰려가게 된다. 그래야 충돌을 피해서 트래픽이 쫙쫙 빠져주기 때문이다. 위태롭다. 대도무문의 끝에서 대도절벽을 만나지 않았던가? 드물지만 다른 것도 있다. 가지 않은 길을 제 발로 가는 사람도 있고 굳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읽어야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이 공포다. 인류 중에 하나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원래는 나도 묻어가려고 했는데 묻어갈 곳을 찾지 못했다. 쟁쟁한 인간들이 다들 개소리를 하는 현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왜 남들 다 가는 곳으로 가는 것일까? 권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에는 권력이 없다. 좁은 문에는 권력이 없다. 대신 친구가 있지만. 권력을 줘도 못 먹는 사람이 있다. 명성도, 인기도, 평판도 내게는 소용없다. 길 끝에서 결국 권력에 도달하며 권력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게 싫었다. 나는 지구에서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지구에 인간이 많으니 하나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말할밖에. 왜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공감 때문이다. 공감은 하나의 어휘에 불과하다. 공감이 문제가 아니라 행위가 문제다. 그 행위가 낳는 권력이 문제다. 그 권력에 따르는 생명성이 문제다. 그 생명성에 따르는 일방향성이 문제다. 거짓말이 또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 길로 폭주한다. 바이럴에는 원래 브레이크가 없다. 위태롭다. 처음 작은 거짓말로 시작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온 세상이 거짓말로 가득 찬다. 거짓말은 자체의 생명성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이며 좀비처럼 번성한다. 먹히는 유언비어가 있다. 먹히는 음모론이 있다. 먹히는 바이럴 마케팅이 있다. 먹히는 선동이 있다. 먹히는 거짓말이 있다. 먹히는 괴력난신이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정해진 공식이 있다. 그 공식을 아는 사람이 대박을 내더라. 히어로가 지구를 구하러 출동하려고 하면 꼭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발목을 잡는다.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왜 항상 여자아이가 발암캐릭터가 되는가? 왜 여자아이가 지구를 구하지 못하게 훼방놓는가? 왜 히어로는 다 딸바보인가? 일곱 살 먹은 딸이 없는 사람은 히어로가 될 수 없는가? 그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아닌가?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클리셰다. 먹히는 바이럴 형식이 그러므로 제작사도 어쩔 수 없다.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면 파산하기 때문이다. 그쪽으로 빠꼼이들이 있다. 그들은 짜깁기 처세술 서적으로 쉽게 백만 부를 판매하고 유명인과 결혼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질문에 답을 알아도 손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목할까 봐. 쳐다보는건 상관없는데 내 시간을 뺏기는 것은 손해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리는게 싫었다. 타인의 영향을 받는 것은 큰 스트레스다. 바이럴에 약한 인간의 약점을 잘 공략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책을 쓰면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를 찍으면 천만 관객을 찍고, 노래를 만들면 음반이 수백만 장씩 팔린다. 그들은 관객이 손수건을 준비하고 극장을 찾는다는 사실을 안다. 배운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면 중국 된다. 인류 중에 65억은 내부적인 좌충우돌 끝에 왼쪽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했는데 중국은 인류를 이겨먹으려고 신나게 폭주하여 혼자 오른쪽으로 간다. 그런 도박이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하면 죽음이다. 15억의 폭주에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었어야 했다. 중국에는 그런 용자가 없었다. 합리적인 보험이 아니라 이겨먹으려는 도박이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가? 모든 정치적 도박에는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권력의지가 개입해 있다. 어떤 미국인이 말했다. 한국인들은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레밍과 같다고. 왜 미국인에게 전두환 시절의 한국인은 들쥐로 보였을까? 지금 한국인은 달라졌을까? 일본인은 가와이 놀이에 중독되어 있다. 서양인은 강한 여성상을 떠받든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고 예쁘다는 말도 있는데 소녀의 귀여움만 논하는 일본인이다. 집단으로 소아성애자가 되었다. 일본은 인류망신의 절벽을 향해 질주한다. 위안부 문제를 사과할 리 없다. 쥐떼의 질주를 멈출 수 있는 한 명의 지성은 열도에 없다. 한강의대생사건이든 타블로사건이든 공무원월북사건이든 그런 짓에 공감하는 무리가 있으므로 자기편 무리의 패거리 힘을 믿고 그렇게 기세등등한 것이다. 공감 자체는 가치중립이다. 권력은 원래 중립이다. 나쁜 놈 손에 들어가니 권력이 욕을 먹는다. 공자의 권력은 좋은 권력이고 굥자의 권력은 나쁜 권력이다. 공감을 비판하면 대중은 화를 낸다. 공감은 대중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평균을 지향한다. 인간의 유전자는 평균에 맞추어져 있다. 때로 공감은 평균보다 못한 권력에 맞서지만 그것으로 평균을 넘어 남들보다 앞서갈 수는 없다. 세계 5강을 목표로 달려가는 한국이 세계 200개국 중에서 100등으로 추락할 수는 없잖아. 유전자가 가리키는 동물적 본능은 인류 평균에 도달하게 할 뿐이다. 생각해야 산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풍덩 빠져야 한다. 그곳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 남의 생각에 쉽게 공감하고, 사이비에 쉽게 빠져들고, 음모론에 쉽게 넘어가고, 보이스 피싱에도 넘어가고 그러다가 흉악한 무리에게 이용당한다. 대중에게 먹히는 거짓말은 바이럴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도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지구평면설처럼 어처구니없는 개소리가 나름 그럴듯한 개소리보다 인기가 있는 이유다. 인간 본능을 자극하는 정해진 공식을 따라 기계적으로 간다. 보험은 끝까지 가야 성공하고 도박은 한 번만 잭팟이 터져도 성공한다. 도박이 끝까지 가면 당연히 파멸이다. 세상에 도박인만 있고 보험인이 없으면 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