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시는 제목이 없다. 교과서에 나오는 고시조도 제목이 없다. 청구영언에 없고 가곡원류에 없고 해동가요에도 없다. 제목은 시험문제 출제하는 교사들의 편의를 위해 발명된 것이다. 그림도 원래는 제목이 없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제목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없이 무제로 발표되는 현대미술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제목이 있으면 안 된다. 제목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메시지가 있으면 그게 미술이 아니다. 반대로 지하철 시는 제목이 없으면 안 된다. 제목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가짜. 예술은 어떤 일치를 통해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긴장감을 끌어내야 한다. 호르몬으로 반응해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고개를 끄떡거리며 내용을 이해한다면 그게 반응하는게 아니다. 일본 사람이 분량을 크게 늘려놓은 삼국지 20여 권 전집이 있었다. 내가 방학 동안 저걸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읽어진다. 놀랍게도 말이다. 톨스토이 전집을 내가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어라? 읽어지네. 신기하지 않은가? 나같이 인내심이라곤 없는 사람이 이걸 다 읽다니. 그렇다면 뭔가 있다. 일치가 있다. 일치는 힘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3일치의 법칙은 당연히 개소리지만 그는 무언가를 본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뻘소리고 사건의 일치는 중요하다. 일치는 1이어야 한다. 3일치면 그게 3치지 일치냐? 3위일체도 그렇고 뭔가 일치하는 것에 인간들이 반응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관객을 1시간 30분 동안 극장에 붙잡아 앉혀놓는 재주가 있다. 데이트 비용 5만 원으로 두 사람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고 5시간 때우려면 1시간 30분을 극장에서 개겨야 한다. 너무 일찍 극장문을 나서면? 용돈이 바닥이다. 커플 깨진다. 일치는 힘이 있다. 커플을 결속시킨다. 도원결의 장면이다. 세 사람이 의를 맺는다. 왜? 마음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뭉클하다. 춘향과 몽룡의 시선이 일치한다. 한 시간 30분을 극장에서 버티는 동력이 된다. 반대로 불일치를 추구하는 자들도 있다. 멕시코인의 뾰족한 구두다. 일본인의 검게 염색한 치아, 몽골인의 흉측한 변발, 유태인의 악랄한 할례, 비건의 채소공격, 좌파의 진정성 공격, 조폭의 문신공격, 파키스탄의 괴상한 장식트럭이 그렇다.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것도 재주는 재주다. 무르시족의 입술접시, 카렌족 여성의 목늘이기. 폴리네시아의 식인, 수만 마리의 소와 염소를 쳐형하는 힌두교의 희생제, 조에족의 뽀뚜루는 정말이지 역겨운 것이다. 시골 식당의 어디서 주워먹은 괴목과 담금주와 귀신 나오는 잡동사니처럼 말이다. 장식이 복잡한 이태리가구나 중국풍의 가구도 역겨운 것이다. 예술과 반예술이 있다. 일치와 불일치가 있다. 사람을 위협하고 겁주려는 자들은 불일치를 지향한다. 현대미술을 이해 못 하겠다고? 그런데 명품은 왜 그렇게 잘 알아보지? 그게 그건데? 뭔가 있다. 그것은 일치의 힘이다. 일치할 때 인간의 뇌가 반응한다. 뭉클한 거다. 관객이 90분간 깨어있게 한다. 삼국지 그 긴 대하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고도 부족하여 재미대가리가 없는 후삼국지를 빼들게 한다.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것이 일치다. 축과 대칭의 균형으로 가능하다. 공간의 거리가 시간의 속도로 좁혀진다. 일치는 좁혀지고 불일치는 넓어진다. 왜 전쟁인가? 러시아 땅이 너무 넓어서다. 왜 선거에 졌는가? 민주당 내 좌파와 우파의 간극이 넓어졌다. 이재명은 그 간극을 좁혀서 선전했다. 넓어지면 지고 좁혀지면 이긴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좁히기만 하면 좋지 않다. 이미 좁아진 것은 더 이상 좁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좁힐거리를 찾아야 한다. 공간이 좁아져서 의사결정이 빨라졌을 때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단순함의 힘, 미니멀리즘의 힘, 현대예술의 힘, 명품의 힘이다. 명품은 뭔가를 좁히고 있다. 포르쉐 디자인과 현대차 디자인의 차이. 현대는 쓸데없는 것을 주렁주렁 달아서 뭔가 넓힌다. 포르쉐는 꼭 필요한 것만 남겨서 무언가를 좁힌다. 딱 보면 알잖아. 필이 오잖아. 명품 좋은건 귀신같이 알아보면서 현대미술 좋은건 왜 못 알아보지? 무언가를 좁히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