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원자의 집합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누가 원자를 집합시켰지? 원자 스스로 집합했다면 그 스스로 뭉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왔느냐다. 매커니즘을 해명해야 한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는 의미다. 왜 쪼갤 수 없지? 단단해서? 그럴 리가 없다. 단단한 것은 더 예리한 칼을 쓰면 된다. 더 세게 타격하면 쪼개진다. 단단하고 무르고는 상대적인 표현이므로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쪼갤 수 없다는 말이 인간의 기술적 한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데모크리토스도 모른다. 막연히 감으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진실을 이야기하자. 원자는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쪼개면 안 되는 것이다. 왜 쪼개려고 하지? 다루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쪽수가 많으므로 힘에 밀린다. 부족으로 쪼개자. 그래도 버겁다면? 가족으로 쪼개보자. 여전히 부족하다. 개인이 만만하다. 그런데 개인은 쪼갤 수 없다. 사람을 쪼개면 죽기 때문이다. 씨앗은 쪼갤 수 없다. 쪼개진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쪼갠다는 것은 통제한다는 것이며 작아야 통제하기 쉽다. 그런데 더 이상 쪼개면 안 되는 한계점이 있다. 사건의 최초 출발점은 쪼갤 수 없다. 사건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챔피언이 되려면 일단 시합을 해야 한다. 시합을 쪼개서 몰수게임을 만들면 이길 수 없다. 바둑판을 쪼개놓고 바둑을 이길 수는 없다. 무게를 줄이면 자동차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다고 엔진을 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 쪼개면 존재가 부정되는 지점이 있다. 가족을 쪼개면 가족이 부정된다. 대가족을 쪼개서 핵가족을 만들 수는 있으나 부부를 쪼개면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무엇인가? 어떤 둘이 만나야 존재가 성립한다. 쪼개면 만남이 부정된다. 그럴 때 쪼갤 수 없다. 북과 북채가 만나야 소리가 난다. 북채를 던질 수 없다. 폭탄에 뇌관을 제거할 수 없다. 활에 시위를 제거할 수 없다. 소총에서 방아쇠를 제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쪼갤 수 없다는 원자 개념은 어떤 둘이 만나서 존재를 이룬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존재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무한히 잘게 쪼갤 수 있다. 사건은 더 이상 잘게 쪼갤 수 없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만유의 근본은 무엇인가? 에너지다. 에너지는 움직인다. 그러므로 통제할 수 없다. 다루려고 하면 도망간다. 에너지를 멈춰 세워야 한다. 에너지의 고유한 운동을 멈추는 방법은 둘을 충돌시키는 것이다. 만나서 존재를 이루는 순간에 통제된다. 남녀가 만나지 않고 커플이 되는 수는 없다.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법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다. 선수단이 만나지 않고 축구시합을 하는 수는 없다. 아군과 적군이 만나지 않고 전쟁을 하는 수는 없다. 거기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거다. 자연에서 에너지는 인자들이 자유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서 계를 이룬다. 서로 충돌하여 교착될 때 에너지는 진행을 멈추고 그럴 때 운동은 안으로 숨는다. 충돌하면 계가 만들어지고 운동이 계 내부에 갇히면서 상대적인 정지상태가 된다. 그럴 때 통제할 수 있다. 둘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리면 상대적인 정지상태가 된다. 그럴 때 통제된다. 자유운동을 하는 두 에너지 인자의 교착에 의한 상대적 정지상태가 원자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분자, 원자, 소립자의 원자개념은 아니다. 그건 어쩌다 이름이 그렇게 붙은 것일 뿐 데모크리토스의 아이디어와 무관하다. 사실이지 우리는 현실에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곧, 쪼개면 안 되는 상황을 무수히 만난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러한 경험칙을 원용하여 직관적으로 말해본 것이다. 승객이 타지 않으면 배는 출발할 수 없다. 기수가 타지 않으면 말은 달리지 못한다. 해와 지구가 만나지 않으면 밤낮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쪼개면 사건의 진행이 중단된다. 탄생의 특이점이 우주의 열쇠가 된다. 최초에 탄생하는 것은 어떤 둘이 만나서 하나의 점을 형성한다. 모든 사건은 그 점을 통과한다. 그 점은 순간적인 정지상태가 되고 그 지점에서 통제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접점이다. 흔들리는 시계추가 방향을 틀때 중력과 관성력이 만난다. 그 지점에서 짧은 시간 동안 시계추는 멈춘다. 그러므로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그 움직임의 탄생지점에 순간적으로 멈추게 되며 그 멈춤에 의해 통제된다. 모든 일어나는 것은 짧게 멈춘다. 출발선의 선수들은 잠시 멈춘다. 총성이 울리면 일제히 달려나간다. 무조건 멈추어야 한다. 어떤 둘이 만나서 대칭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방향전환의 지점에서 잠시 멈춘다. 절대적으로 움직여도 상대적인 정지상태가 된다. 계주의 바톤을 주고받을 때 둘은 잠시 멈춘다. 달리면서 바톤을 주고받아도 둘의 상대적 일치는 멈춤과 같다. 그럴 때 계가 만들어지고 운동은 계 안으로 숨는다. 질의 운동은 입자에 숨고 입자의 운동은 힘에 숨고 힘의 운동은 속도에 숨고 속도의 운동은 량에 숨는다. 멈출 때는 통제할 수 있다. 존재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곳에 있다. 수학은 대칭성 곧 동시성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약점을 추궁한다. 둘이 만날 때 둘은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 1+1이 있으면 2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 피해자가 있으면 피의자도 현장에 있어야만 한다. 인질범이 돈을 받으려면 피해자와 접촉해야 한다. 거기서 통제되는 것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곧 수학의 근간을 이룬다. 이 하나의 약점을 추궁하여 인류의 문명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존재는 적나라한 현장을 들켜버린 것이다. 딱 걸려버렸다. 또 하나의 약점이 있다. 수학이 공간적 동시성 하나에 의존한다면 구조론은 시간적 통제가능성이라는 또 다른 존재의 약점을 추궁한다. 범인은 반드시 같은 시간에 범죄현장에 도착해 있었다는 것이 알리바이다. 그런데 범인은 피해자보다 더 세다. 이것이 두 번째 규칙이다. 곧 열역학 2법칙이 된다. 엔트로피다. 1법칙이 다루는 대칭성은 방향성이 없다. 상대적이다. 이쪽에서 작용할 때 저쪽에서도 작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가해자가 찔렀는지 피해자가 찔렸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가해자는 말한다. 내가 사과를 깎으려고 칼을 꺼냈는데 피해자가 칼 위로 쓰러졌다. 이런 식으로 둘러댈 수 있다. 그 대칭성을 깨는 비대칭성이 엔트로피다.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에너지의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 점을 증명하여 범인을 체포한다. 구조론은 규칙에 대한 규칙이다. 두 번째 규칙은 첫 번째 규칙과 무모순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세다면 모순된다는 말이다. 계는 통제되는 방향 곧 무모순방향으로 진행한다. 말이 기수보다 세다면 모순이다. 화살이 활보다 세다면 모순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세다면 모순이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방향이 플러스면 모순이다. 결과가 원인보다 세다면 모순이다. 전기모터를 돌렸는데 출력이 입력보다 세다면 모순이다. 그 경우는 무한동력이 된다. 무엇인가? 사건은 원인이 결과를 통제한다. 결과가 원인보다 강하면 통제되지 않고 따라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래 없다. 에너지 총량은 입력과 출력이 같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수학이 의지하는 열역학 1법칙이다. 외부개입이 차단된 계에서 내부요인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사건의 전개는 무조건 출력이 입력보다 조금이라도 더 작아야 한다. 사건의 진행이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소비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열린 상태를 논하고 구조론은 닫힌 상태를 논한다. 닫혀있다는 것은 외부요인의 개입이 없이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사건은 반드시 둘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내부적으로 사건이 진행되려면 내부에서 무언가 둘이 만나야만 한다. 그러려면 내부를 둘로 쪼개놔야 한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손실된 만큼 결과는 작아져야 하는 것이다. 밥을 먹은 만큼 칼로리가 나온다. 이는 열역학 1법칙이다. 그런데 음식을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대략 10퍼센트 연비손실이 일어난다. 1천 칼로리를 먹어도 900칼로리 살찐다. 1천 칼로리를 먹고 1천 칼로리만큼 살이 찌는 일은 절대로 없다. 의사결정비용이 지불된다. 은행이 가져가는 몫이다. 보통 우리가 다루는 장치들은 그 비용이 외부에서 투입된다. 맷돌을 갈거나 물레를 돌리거나 간에 팔힘으로 외부에서 작용한다. 활을 쏜다해도 궁수의 힘을 빌린다. 이 부분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닫힌계가 되면 이게 심각해진다. 저절로 돌아가는 일이 그러하다. 외부를 차단하고 논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최소 2로 출발하며 사건 안에서 2를 조달해야 한다. 우주공간에서 외부의 도움이 없이 방향을 바꾸려면 자기 몸을 둘로 쪼개야 한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자연의 최소단위는 2다. 우주 안에 어떤 1이 존재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에서 유가 탄생하지 않으므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질은 궁극적으로 양자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1은 무엇이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는 자기 자신을 둘로 쪼갤 수 있으므로 의사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자연의 최소단위는 2고 그것은 우리가 아는 양자다. 우주가 원자가 아닌 양자로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체의 요인으로 움직이려면 자기를 쪼개야 하므로 2가 될 수밖에 없다. 외부 도움이 없으면 이혼할 수 있을 뿐 결혼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이 결혼하는 것은 외부환경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값은 같아야 한다. 이것이 수학이다. 자연발생적인 사건 안에서 원인은 결과보다 조금이라도 커야 한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원인이 결과보다 커야 하므로 결과가 1이면 원인은 2고 이것이 양자다.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다. 양자를 쪼개서 더 작아지면 독립적인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외부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그 경우 다른 것에 빌붙어 있는 신세가 된다. 독립적으로는 존재를 이루지 못한다. 1은 독립적인 입자가 못되고 연속적인 파동이 된다. 량은 침투한다. 1은 다른 것에 빌붙어 있다는 말이다. 사건은 내부적으로만 의사결정하며 그것은 쪼개는 것이다. 사건은 스스로 자신을 쪼갠다. 원자개념은 쪼개지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구조개념은 반대로 쪼갠다는 의미다. 자신을 둘로 쪼개서 자신과 결혼한다. 존재는 곧 사건이며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원인은 언제나 2며 결과는 언제나 1이고 원인은 외부에서 쪼갤 수 없는 것이고 외부에서 쪼갤 수 없는 것은 내부에서 스스로 쪼개지며 이때 쪼갤 수 있는 방향은 마이너스뿐이며 바로 그것이 구조다. 인간은 외부에서 사물을 관측하니 그것이 수학이다. 자연은 사건 내부에서 스스로를 관측하니 그것이 구조다. 관측한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며 의사결정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멈추어야 관측할 수 있고 사건 내부에 그런 멈춤점이 있다. |
세상도 에너지고 인간도 에너지다. 인간이 관측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과 대칭을 조직할 때 에너지는 수렴되는 즉 통제된다. 인간이 환경과 대칭을 조직할 때 비용이 청구되나 그래도 그 길로 가야한다.
자연이 자연끼리 상호작용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소모할 수는 있으나 그보다 더 효율적인 에너지 처리 루트로서 생물이 등장했다.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자연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보다 단기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을 합쳐 통짜가 엮이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우주의 상호작용을 긴밀하게 하는 효율적인 방향으로만 지속적으로 진보할 수 있으므로 유의미하다. 인간은 자신을 환경에 대칭시키는 지점에서 그 수준이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