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오해 https://news.v.daum.net/v/20190219100150500?rcmd=rn&f=m 우리는 막연히 다양성은 좋은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외국인 노동자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화를 낸다. 말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현실의 다양성을 배척하는 놀라운 이중행동이다. 미국은 인종적으로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는 백인에 흑인에 메스티조에 네이티브까지 다양하다. 남아공 역시 흑인에 백인에 보어인에 인도인까지 다양하다. 다양성은 과연 좋은 것인가? 다양성이 높은 멕시코와 브라질과 남아공과 인도는 과연 잘 되고 있는가? 히틀러는 18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조국 오스트리아를 포기하고 독일로 이주했다. 오스트리아는 민족구성이 너무 다양해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도 다양성이 높은 나라다. 역사적으로 지배집단이 15번이나 바뀌었다고. 민족구성이 다양한 만큼 지역색이 강해서 모든 사업이 차질을 빚자 하나로 묶어보자는 파시즘이 대두한 것이다. 영국도 다양성이 높다. 켈트족에 로마에 앵글로에 색슨에 바이킹까지 들어와서 잡탕민족이 되었다. 국왕은 독일인 핏줄이다. 여전히 스코틀랜드가 독립한다며 갈등 중이다. 브렉시트에 북에이레도 들썩대는 중이다. 다양성은 양날의 칼이다. 이겨야 한다. 요리사는 칼을 이긴다. 다양성에 의해 좋은 요리가 탄생한다. 어린이는 칼을 이기지 못한다. 손을 베인다. 다양성을 추구하다가 망한 나라 인도가 많듯이 획일성을 추구하다가 망한 중국도 많더라. 구조론은 프로세스의 과학이다. 결과만 따지지 말고 과정을 봐야 한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매몰되니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격이다. 가리켜지는 달도, 가리키는 손가락도 보지 말고, 달과 손가락과 당신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정렬했는지를 보라. 표적과 가늠쇠와 가늠자와 총알과 눈동자가 정렬해야 한다. 다양성에 대해 논하자면 헷갈리기 마련이다. 다양성은 독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될 수도 있다. 막연히 다양성은 좋은 것이야, 아니야 다양성은 나쁜 것이야 하면 초딩이다. 칼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칼잡이에게 칼은 좋은 것이고 어린이에게 칼은 위험한 흉기다. 좋은 것이라도 그냥 다 좋은 게 아니다. 과정을 거쳐서 점차 좋아지는 것이다. 그 과정을 견뎌야 한다. 다이아몬드는 그냥 좋은 게 아니고 1천 관중이 지켜보는 오페라 무대 위의 프리마돈나에게 포커스가 집중될 때 그 강렬한 조명에 의해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것이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해봤자 유리구슬과 다를 바 없다. 제자리가 있다. 다양성 쫓다가 망한 나라가 다양성 덕분에 흥한 나라보다 많다. 인도만 해도 백인에서 흑인까지 다양한 피부색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기독교 유태교 등 다양한 종교에 불가촉천민까지 다양한 카스트에 800개의 다양한 언어가 있다. 그래서 흥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획일화로 흥했는가? 아니다. 중국은 춘추시대 기준으로 4천 개의 국가집합이었지만 지금 모두 한족화 되었다. 그래서 흥했는가? 아니다. 다양하면 인도처럼 망하고 획일하면 중국처럼 망한다.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흥한 나라는 영국과 미국뿐이다. 외인부대의 프랑스와 마피아종주국 이탈리아도 나름 다양성을 앞세우고 있지만 그다지 흥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자. 계는 불균일에서 균일로 바뀌는 과정에만 진보한다. 모두가 자유를 가진 다음 일정 부분 그 자유를 반납할 때 흥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진 자유에너지가 진보의 동력이 된다. 흥하려면 먼저 자유를 얻고 다음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 그런데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부하들은 자유를 얻자 곧 배반을 저질렀다. ‘우리는 로마의 노예로 사슬에 묶여있다가 이제 해방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마치 로마인처럼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다. 로마가 싫어 탈주했는데 다시 로마로 돌아가란 말인가?’ 말은 넙죽넙죽 잘한다. 지도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유를 구가하다 죽었다. 스파르타쿠스가 공짜로 찾아준 자유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명박근혜의 노예로 살다가 문재인이 자유를 찾아주자 다양성을 외치며 1도 내놓지 않으려는 무리가 있다. 진정 자유를 원한다면 말을 들어야 한다. 물을 얻으려면 마중물을 내놓아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물을 얻고자 먼 길을 왔는데 마중물을 내라고 하니 모순이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자연법칙은 냉정하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을 얻지 못한다. 내놓는 것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투자금이 없으면 배당도 없다. 100의 자유를 얻으려면 적어도 50의 자유를 양보해야 한다. 우리가 산수를 잘해야 한다. 잃는 자유보다 얻는 자유가 크면 그 길로 가야 한다. 황금이 공짜로 굴러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런데 보통은 반대로 간다. 공짜 바란다.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다. 해방된 검투사들은 한 번 명령듣기를 거부하다가 노예처럼 죽었다. 아네테 시민들도 그냥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 대가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물론 스파르타 군사들은 더욱 자유가 없었다. 밥도 15명의 소대원이 같이 먹어야 하는 정도다. 구조론은 간단하다. 대칭을 조직하여 2를 1로 통제하는 과정에 남는 1을 취한다. 2는 다양성이며 1은 획일성이다. 다양한 것이 획일화되는 과정에 남는 자유에너지로 진보를 끌어낸다. 다양성에 머무르면 남는 것이 없어 망하고 획일성에 머무르면 역시 남는 것이 없어 망한다. 다양성을 얻은 다음에 일부를 양보해야 한다. 먼저 자유로운 아테네 시민이 된 다음에 각자 무장하고 와서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 훈련 중에는 자유가 없다. 평소에는 자유롭게 2로 있다가 소집통지를 받으면 1로 동원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흩어지기와 견고한 팔랑크스 대형으로 바뀌기를 자유자재로 해야 한다. 흩어지면 각개격파 되고 뭉치면 몰살당한다. 흩어졌다가 신호가 떨어질 때 일시에 뭉쳐야 한다. 간단하다. 먼저 자유롭고 나중 훈련한다. 먼저 흩어지고 나중 집결한다. 먼저 다양하고 나중 획일한다. 먼저 진보하고 나중 보수한다. 먼저 골을 넣고 나중 빗장수비다. 선제득점후 침대축구다. 이 순서를 바로 알면 된다. 청년은 다양해야 하고 어른이라면 엄격해야 한다. 항상 지켜야 할 과정이 있고 절차가 있고 프로세스가 있다. 에너지는 균일화되는 과정에만 존재한다. 균일화되면 에너지 낙차가 사라져서 통제할 수 없다. 입학 때는 다양하지만 졸업 때는 석차가 나온다. 모범생과 열등생이 가려진다. 거기서 이탈하는 것이 에너지다. 에너지는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공짜로 얻는 것은 절대 없다. 타이밍은 조절되어야 한다.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국가는 발전한다. 조선은 너무 일찍 중앙집권을 해서 전국이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로 획일화되었고 일본은 다이묘가 지배하는 다양한 봉건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어 뒤늦게 중앙집권을 시도한 것이 대정봉환인데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발전했다. 더 이상 중앙집권화할 영역이 없으니 남의 땅을 침략한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종속시켜 중앙집권화하는 과정이 로켓의 2단 추진 연료가 된다. 패전 후 일본은 전체적으로 균일해져서 새로운 에너지 낙차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갈라파고스 경제로 쇄국하고 있다. 혹시나 하고 동남아를 기웃거리지만 얻는 것 없다. 배후지가 없다. 이동해야 할 서부가 없다. 신대륙이 없다. 반면 한국은 북한이라는 강력한 균일화 대상이 남아있다. 배후지가 있다. 낙차를 유지할 수 있다. 북한 다음은 대륙이다. 대륙으로 진출해서 문화적 균일화를 시도해야 한다. 선진 한국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부터 개고기 끊고 개고기 먹는 중국을 갈궈야 한다. 질의 균일화에서 입자의 균일화, 힘의 균일화, 운동의 균일화에 량의 균일화까지 진도를 나가면 더 이상 균일화할 건수가 없어 인류는 멸망한다. 물론 후손이 태어나므로 약간은 남아 있다. 여기에 우선순위가 있으니 역주행하면 다양해도 망하고 획일해도 망한다. 통제가능성이라는 큰 그림을 따라간다면 위태롭지 않다. 틀린 생각 - 의견은 다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난 일단 반댈세. 바른 생각 - 다양한 사람이 공존할 수 있도록 보다 세련된 문화를 만들자. 흑백논리 곤란하다. 다양성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 다양한 사람을 하나로 묶어내는 발달한 진보주의 기술이 목적이다. 링크한 기사에 등장하는 문제의 대리교사는 세련되지 못했다. 맹세의 문제가 아니라 강제의 문제다. 일본은 외부를 침략하여 다양성을 약탈했지만 미국은 다양성이 외부에서 공짜로 흘러들어온다. 한국은 북한을 꼬셔서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다. 다문화는 커다란 자산이 된다. 그러나 통제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한국의 룰을 교육시켜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다양성에 우리가 휩쓸리면 안 되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게임을 이겨가야 한다. 다양성을 거부하면 일본처럼 고립되고 다양성에 휩쓸리면 멕시코처럼 무정부상태가 된다. 다양성을 획득하되 이겨서 문화적인 통합을 끌어내야 한다. 히잡을 쓰든 차도르를 쓰든 통제가능성 안이라야 한다. 이는 에너지의 법칙이다. 함부로 에너지를 끌어들이다가 망한 나라도 많고 에너지를 거부하다가 망한 나라도 많다. 이디오피아는 300년 전에 개혁개방을 했지만 망했다. 외세를 받아들여 개방하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세계에 딱 한 나라가 있는데 일본이다. 무작정 개방하면 무작정 망한다. 무작정 쇄국해도 무작정 망한다. 한국과 일본만 역사법칙의 예외다. 이차대전 시기 식민지였던 국가 중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개방을 하고도 망하지 않은 일본과 식민지를 겪고도 선진국 된 한국은 역사법칙의 예외다. 그러므로 남미의 종속이론 같은 것을 한국에 가져다 대면 안 된다. 중국도 역사법칙의 예외지대다. 농민반란이 성공한 나라는 세계사에 중국밖에 없다. 모택동이 최후의 농민반란을 성공시켰다. 고조 유방이나 명의 주원장도 같다. 반면 한국은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지배집단이 바뀌지 않았다. 과거제도 형태로 개천의 용들에 의해 일부 물타기가 되었을 뿐 큰 줄기는 바뀐 게 없다. 어느 나라든 지배집단은 안 바뀐다. 영국만 해도 오백 년 전 귀족이 아직도 귀족이고 일본도 비슷하다. 한중일 유교권은 보편적 역사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예외지대이다. 구한말 조선의 세계 GDP 순위가 25위라고 한다. 당시는 세계를 뒤져봐도 국가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다. 200개나 되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안 된다. 후진국 한국이 박정희 덕에 열심히 해서 겨우 따라잡은 게 아니고 원래부터 우리는 선두권이었다. 산업화 시대에 잠시 헷갈린 것이다. 구조론사람이면 흑백논리,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악법도 법이라거나 악법은 법이 아니라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니고 악법도 법일 때가 있고 법이 아닐 때가 있으며 그사이에 방향이 있고 순서가 있으니 결을 타야 한다. 보통은 흑이든 백이든, 법이든 불법이든, 다양성과 획일성 중에 하나를 찍어주기를 바란다. 인도는 다양해서 망하고 중국은 획일해서 망한다. 정답은 '이기는 것'이다. 이기려면 선다양 후획일이다. 지속적으로 환경을 이겨가면서 배후지를 확보하여 에너지 낙차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은 외국인이 들어와서 낙차를 만들어준다. 일본은 외국을 침략해서 낙차를 만들려다가 망했다. 한국은 북한으로 진출해야 산다. 중국 찍고 동남아로 진출하면 낙차를 유지할 수 있다. 긴장을 유지하고 운전을 잘해야 한다. 떠먹여 주는 정답은 절대로 없다. 이거냐 저거냐 하나만 찍어달라는 식은 곤란하다. 긴밀해야 산다. 부단한 상호작용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이겨가야 한다. 아슬아슬한 동적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다. 구조론은 이중의 역설이다. 그것이 답이지만 당장은 그것이 답이 아니고 반대쪽을 찍고 와야 비로소 그것이 답이 된다. 자유와 다양성이 답이지만 그냥 자유와 다양성은 당연히 답이 아니고 훈련된 정예병과 베테랑의 자유와 다양성이 답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부하들은 자유를 주장하며 명령 듣기를 거부하다가 죽었다. 행복이 답이지만 그냥 행복은 답이 아니고 고생 끝에 얻은 행복이 답이다. 자유가 답이지만 그냥 자유는 답이 아니고 훈련된 자유가 답이다. 민주주의가 답이지만 그냥 민주주의는 답이 아니고 동료를 보호하는 의리가 있는 민주주의가 답이다. 팀을 위한 희생이 의리다. 의리 없는 자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도 없다. 문재인 지지했으니 대가 내놔라는 식의 보상이나 바라는 드루킹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노무현 등에 칼 꽂은 배신의 드라마처럼 문재인 버전으로 역사는 반복된다. 가장 열심히 문재인을 지지한 자가 가장 큰 공적을 세우고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면서 보란 듯이 배신하는 게 조경태 공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