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공자는 군자를 말했지만 봉건사회 지배계급의 가치에 불과하다. 노자의 이기심은 유치하다. 진지한 태도로 볼 수 없다. 압도적인 허무를 극복하기는커녕 포기하고 굴복한 거다. 석가의 열반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니 엘리트의 허위의식이다. 브라만 계급이 인간의 영혼에 급수를 매길 때 크샤트리아 계급의 고타마 싯다르타가 대체재를 찾아낸 것이다. 예수는 천국을 말했지만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다. 그냥 지어낸 거짓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류에게 에너지를 주려고 했다. 에너지는 집단에서 온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와 호흡을 맞추고 사회 안에서 역할을 가지고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설 때 흥분하는 것이며 그럴 때 호르몬이 나와주는 것이며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부적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적을 사는게 인간이다.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로또를 사는게 인간이다. 다가오는 내일이 두렵다. 로또라도 사두면 한 가닥 탈출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편안히 잠에 들 수 있다. 호르몬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종교가 그런 역할을 했다. 압도적 허무를 막아준다. 5포세대라는 용어가 다 무엇인가? 허무의 공습이다. 20세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는 혁명의 세기였고 독립의 세기였고 모험의 세기였고 탐험의 세기였다. 도전의 세기였고 열사의 세기였다. 장벽을 넘고 차별을 극복하는데 지성인의 역할이 있다. 21세기에 사라졌다. 혁명은 끝났다. 폼 잡고 양반입네 해봐도 웃음거리가 되는 시대다. 일본식 허무주의는 인기있는 일본소설에 의해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섬으로 고립되므로 허무를 극복하지 못한다. 주군과 가신과 사무라이와 농노로 나누어져 지나친 역할분담으로 허무의 장벽에 갇힌다. 만만한 배후지가 없는 일본이다. 아베의 발작은 단순한 선거전술이 아니다. 일본인 전체의 심사를 아베가 대변한다. 한반도의 통일가능성이 그들을 두렵게 했다. 그동안 일본인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한 수 깔아보는 태도가 있었다. 한국은 뭔가 서두르고 덤벙대고 허술하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 한국을 만만하게 보고 얕잡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통일되면 위치가 달라진다. 한국은 만만한 배후지를 얻었다. 일본은 동남아에 투자했지만 학교나 병원과 같은 것으로 생색을 낼 뿐 공장을 지어주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두렵다. 일본이 강한 것은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중간계급이 있기 때문이다. 봉건영주 밑에 가신이 있고 무사가 있고 촌주가 있다. 중국이라면 몇십만 명을 다스리는 관리 밑에 아무도 없다. 이장이 없다. 조선도 같다. 중간신분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가로막았다. 사또와 평민은 거리가 멀고 신분을 세습하는 아전은 자기 배나 채울 뿐이며 평민을 위할 이유가 없다. 양반은 평민과 서로 대립해 있다. 중간계급에게 하층민은 만만한 배후지가 된다. 언제라도 중산층과 중간신분이 에너지를 가진다. 만만한 대상이 없으면 허무주의로 간다. 진출할 배후지가 없으면 인간은 허무주의로 간다. 일본이 조선과 만주로 침략할 때는 허무하지가 않았다. 만만한 배후지가 있었던 거다. 식민지를 잃고 섬으로 고립되자 그들은 허무해졌다. 한국도 지금은 섬이 되었다. 90년대만 해도 중산층으로 올라간다는 목표가 있었다. 지금은 그게 없다. 7급 공무원이 꿈일 정도로 목표가 사라졌다. 만만하게 보이고 얕잡아 보이는 대상이 없다. 젊은이들은 중간 간부가 아니라 말단 농노가 되고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해 경험이 없어 북한도 그들에게는 대시해볼 만한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 혐오대상이 되어 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를 외치던 80년대, 90년대에 한국의 젊은이는 북한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 여긴다. 친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가 버려놓은 탓도 있다. 그래서 희망을 잃었다.
일본인에게 한 우물을 파는 장인정신이 있지만 그래봤자 오타쿠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에게 서구와 같은 종교적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철학도 없다. 철학은 근본 세계정신이다. 인류의 대표자가 되려는 마음이다. 섬으로 고립된 일본에 그런게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바다 같고 태산 같은 압도적 허무를 극복하려면 21세기 초연결사회에서 역할을 찾아야 한다. 초인은 성과 속을 넘어 의사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은 집단에의 아부다. 가재미눈으로 감시하는 집단에 아부하여 점수를 따려면 손석희도 손혜원도 도덕군자인 척해야 한다. 속은 노자와 같은 이기심이다. 돈과 명성과 섹스와 식욕과 건강과 장수를 추구한다면 속이다. 또한 집단 무의식에서 나온다. 성이 집단의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속은 콤플렉스로 집단에 맞서는 태도다. 역시 집단을 의식한다. 혼자가 되면 도덕도 없고 이기도 없다. 산 중에 사는 자연인은 도덕심도 없고 이기심도 없는 사람이다. 니체의 위버맨쉬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초인과 다르다. 니체의 초인은 역시 20세기형 초인이다. 21세기는 나폴레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인은 초극하는 사람이다. 초극이란 무엇인가? 정상을 넘어선다. 보통은 정상에 오르려고 한다. 20세기에 그랬다. 다들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21세기에는 포기했다. 더 이상 오르고 싶지 않다. 7급 공무원으로 만족한다. 21세기형 초인은 정상을 초극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정상에 서면 무엇이 보이나? 다른 산의 정상이 보인다. 지리산 꼭대기에서는 덕유산 꼭대기가 보인다. 한 분야의 정상에 서서 또 다른 분야의 정상과 연결하는 사람이 21세기 초인이다. 초인은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도덕심이 없다. 도덕심은 정상을 추구하는 중간그룹에게 필요하다. 기슭에서 남의 도움을 얻어 정상에 오르려 한다. 선배가 당겨주고 후배가 밀어준다. 그래서 도덕을 주문한다. 이기심은 정상을 포기한 자세다. 공자가 성이라면 노자는 속이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넌 정상을 오를 수 없어. 포기해. 이 말이 먹힌다. 일본은 나라가 잘게 쪼개져 있다. 지방분권이 발달해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왕이 300명이나 되는 일본이라면 누구든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를 수 있고 못 해도 촌주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바닥이 좁은 데다 중앙집권이 발달해서 아예 촌주가 없다. 중간계급이 없다. 정상에 오를 수 없다. 한 분야를 후벼 파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중앙을 쳐다보고 있는 거다. 조선 시대부터 그랬다. 일본의 촌 사람이라면 중앙의 정권교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지방 다이묘 정부에 꽂혀 있다. 한국은 당쟁을 해도 전 국민이 달라붙었다. 노예도 당이 다른 양반을 만나면 저런 개 같은 양반놈의 새끼를 봤나 하고 욕을 푸지게 해줄 수 있었다고. 그런 시대였다. 지금은? 애매하게 되었다. 점점 일본의 허무주의를 닮아간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얻지 못하므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한국은 바닥이 좁다. 더구나 북으로 막혀 섬이나 매한가지가 되었다. 정상의 자리가 많지 않다. 사회의 어디를 가도 경쟁률이 빡세다. 그렇다면 한국의 엘리트가 아닌 인류의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 밖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한국 안에 역할을 얻지 못하면 세계 안에서 역할을 차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북으로 길을 뚫어야 한다. 일본의 오타쿠는 널리 외부와 연결하지 못한다. 골방에 갇혀 있는 것이다. 300년 전 일본의 어느 철학자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을 설파한 철학서를 남겼지만 그의 사상은 골방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300년 후에 책자가 발견되어 뒤늦게 재평가되었다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허무하다. 그래서 허무주의다. 쇼군 앞에서 자유를 주장하리? 일본과 달리 한국인은 동호회나 SNS로 더 잘 소통한다. 중국의 패거리 행동과 달라야 한다. 허무주의 극복이 초인의 의미다. 허무를 극복하는 것은 상승이며 상승의 목적은 연결이다. 하나가 연결되어도 만 명이 그리로 지나간다. 방탄소년단 하나가 연결되었을 뿐이었다. 무수한 젊은이들이 뒤로 연결된다. 묻어가는 것이다. 다리 하나를 건설해도 만 명이 그 다리로 통행한다. 거기에 의미가 있고 에너지가 있다. 연결할 때 인간은 흥분한다. 허무를 극복한다. 다행히 한반도는 북한만 뚫으면 중국, 러시아를 거쳐 파리, 런던까지 바로 연결된다. 21세기의 초인은 연결하는 사람이다. 정상에 올라 또 다른 정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거기에 다리를 가설하여 만 명이 떼로 건너가게 하는 사람이다. 21세기 초연결 사회에 희망이 있다. 의미가 있다.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이기심을 피하고 도덕심을 극복하여 지평을 연다. 이기는 좌절이고 도덕은 굴복이다. 개인과 사회의 대결이다. 이겨야 한다. 집단에 굴복하여 아부하지 말고 집단을 회피하여 도망치지 말라. 도덕심과 이기심의 압박이 없는 사회, 집단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는 사회,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 우리 그런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그 사회는 마땅히 열린 사회여야 하며 연결사회여야 한다. 우리는 닫힌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섬을 탈출하여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한 분야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 분야에 파묻혀 있는 일본식 오타쿠 필요 없다. 정상에 올라봤자 막다른 길을 만난다. 그 정상의 기쁨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자기만족의 추구도 남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닌 자신의 복제에 있다. 내가 새로 길을 열었는데 만인이 그 길을 건너는 데 기쁨이 있고 열정이 있고 희망이 있고 비전이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코스프레든 페이스북이든 유튜브든 게임이든 어느 분야 정상에 도달하여 멈추지 말고 다른 세계로 연결해 갈 때 진정한 기쁨이 있다. 21세기형 초인은 그곳에 있다. 도덕을 흉기로 휘두르는 의리 없는 자를 나는 혐오한다. 이기주의자도 혐오한다. |
"21세기의 초인은 연결하는 사람이다. 정상에 올라 또다른 정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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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군자를 말했지만 봉건사회 지배계급의 가치에 불과하다.
다음줄에 석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복해서 나오니 공자가 맞는듯 합니다
감솨~
돈이나 쫓는 허무한 세대에 대한 일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