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에서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 대상화, 타자화, 대칭행동, 흑백논리, 이분법, 이원론, 귀납적 사고는 모두 같은 것이다. 관측자가 관측대상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밖에서 자동차를 관찰하지 말고 안에서 운전해봐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의 결이 보인다.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어야 통제가능성의 관점이 보인다. 닫힌계를 지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차별주의 행태를 극복해야 한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고 방어하려고 하며 대상을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언어는 주어와 동사로 조직된다. 관심이 동사를 따라가면 잘못이고 주어를 따라가야 한다. 다름이 아닌 같음에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당연히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약자의 포지션에 머무르므로 리더가 되지 못한다. 배우는 목적은 엘리트가 되려는 것이며 엘리트는 달라야 한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강자의 관점, 대표자의 관점,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점을 얻어야 한다.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면 좋지 않다. 낮은 자는 오르려 하고 높은 자는 연결한다. 약자의 생존술은 일단 상대를 자극해서 반응을 끌어내려는 거다. 자기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에게 공식이 없고, 목수에게 연장이 없고, 의사에게 청진기가 없고, 모험가에게 나침반이 없다면? 상대방을 집적대서 정보를 얻어내고자 한다. 화가 나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상대가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내가 화가 났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상대의 반응을 끌어낼 목적으로 내가 흥분한 거다. 자기감정을 믿지 마라. 거기에 속임수가 있다. 내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상대가 내 감정을 끌어낸 것이다. 환경에 끌려다니지 마라. 자신이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내가 백만 대군의 지휘자라면? 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보가 보수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면 곤란하다. 지금은 우리가 여당이다. 보수도 달고 가야 하는 우리 식구다. 태극기 할배들도 우리가 먹여살려야 하는 집안의 말썽쟁이다. 어느 집안이든 그런 꼴통식구 하나씩 꼭 있다. 내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리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르게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면 된다. 닫힌계를 지정하면 된다. 술어가 아닌 주어를 따라가면 된다. 하늘이 왜 푸르냐고 술어를 보지 말고 푸른 그것이 과연 하늘이 맞느냐로 주어를 의심해야 한다. 진술이 아닌 전제를 의심해야 한다.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지 말고 이다 아니다를 판단해야 한다.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의 순서대로 간다. 보통은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친다. 맞게 쳐야 한다. 맞다/틀리다의 관점이다. 그전에 그게 생선이 맞는지를 따져야 한다. 도마를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닌지를 따져야 한다.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틀을 바꿔봐야 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고참 설운도와 태진아를 위시해서 몇몇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해 있었다. 이박사가 무대 위에 등장했는데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이박사잖아. 하고 삿대질을 한게 문제가 되었다. 설운도 선생님, 태진아 선생님이라고 깍뜻이 하면서 이박사에게는 숫제 반말투다. 정통 트로트 입장에서 이박사를 같은 동아리에 끼워주고 싶지 않은 거다. 맞다/틀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은 맞지 않다. 문제는 맞다/틀리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다. 서울대 합격하려면 문제를 맞춰야 한다. 그때부터 시야는 고착되었다. 세상을 고딩 때 입시문제 풀던 수준으로 고정시켜 본다. 이다/아니다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전개되는 테크노 음악의 진보성이 포착되는 거다. 낡은 뽕짝 표절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이박사는 예술가지만 설운도와 태진아는 그냥 똥이다. 이 부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면 애초에 서로 간에 대화는 무리다. 사건의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을 보고, 종결이 아닌 시작을 보고, 꼬리가 아닌 머리를 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후미가 아닌 선두를 봐야 한다. 그곳을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주어가 없으면 가주어를 쓰듯이 언어가 없으면 동그라미를 그려야 한다. 머릿속에 지도그리기다. 모든 대칭되는 것에 양자를 통일하는 동그라미가 있다. 입구와 출구, 진보와 보수, 밝음과 어둠, 선과 악으로 대칭되는 것에 모두 동그라미가 있다. 진보와 보수를 통일할 제 3의 길은 반드시 있다. 선과 악이 공유하는 토대는 사회화다. 인간은 개인으로 태어나 사회화과정을 거쳐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나아간다. 변방에서 데뷔하여 중앙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반드시 장場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통일하는 것은 문명이다. 문명이라는 나무의 성장에서 높이를 추구하면 진보이고 저변의 넓이를 추구하면 보수다. 나무는 키만 크는 게 아니라 밑둥도 굵어진다. 봄에 새 가지를 내밀어 먼저 키를 키우고 다음에 밑둥을 넓힌다. 창의적인 사고는 연역적 사고, 수학적 사고다. 공식을 적용하여 풀어낸다. 생각의 첫 시작점을 잘 찍어야 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전개가 망한다. 첫 단추는 닫힌계다. 장場이다. 거기서 질은 균일해야 한다. 에너지가 투입되면 대칭이 발생하고 축을 이동시켜 에너지의 모순을 처리하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한다.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동사와 명사의 수순대로 전개해야 한다. 두서없이 산만하게 생각하면서 다양성이라고 변명하면 안 된다. 스무고개나 끝말잇기처럼 이것저것 주워섬기는 나열식 사고는 도움이 안 된다. 방향이 틀리면 설운도의 궤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이박사는 리듬박스라는 도구를 썼다. 다른 거다. 이박사의 성공은 괴짜나 다양성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으로 가서 소니뮤직 관계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외부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이 일구어놓은 에너지원에 빌붙어 빼먹지 말고 자신이 에너지를 개척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터넷과 스마트와 인공지능으로 전개하는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계를 지정하면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가 보이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이때 대상과 자신은 에너지에 의해 하나로 통일된다. 진보와 보수,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분리되지 않고 머리와 꼬리로, 원인과 결과로, 전체와 부분으로 연결된다. 그럴 때 에너지를 장악하고 축을 움직여 대상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
남이 일구어놓은 에너지원에 빌붙어 빼먹지 말고 자신이 에너지를 개척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터넷과 스마트와 인공지능으로 전개하는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