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운전을 하는 방법은 최대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것이다. 연료탱크에 기름은 채워졌고 자동차에 시동은 걸렸고 목적지까지 가면서 연비를 절약하기 위해 운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것은 플러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마이너스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 동動이다. 움직이면 이렇게 된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이륙하면 무언가를 마이너스 할 뿐 플러스할 수 없다. 예외적으로 공중급유가 있지만 이는 전시에나 쓰는 예외적인 것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 그걸로 그만이다. 무언가를 버리는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더하고 채우는 방법으로 대응할 수단은 없다. 문제는 이것이 일반의 경험칙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추우면 옷을 입는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문제의 해결은 무언가를 플러스하는 방법으로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착각이다. 당신이 따뜻하게 패딩을 챙겨입을 때 아버지의 지갑은 마이너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확실히 플러스 세계에 산다. 어른이 되면 마이너스의 세계로 진입한다. 직원은 플러스의 세계에 살지만 사장은 마이너스의 세계에 산다. 어느 분야든 정상에 선 사람은 오직 마이너스만 가능할 뿐이다. 스티브 잡스의 미니멀리즘츠럼 무언가 뺄 궁리만 하게 된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아도 그러하다. 일반 네티즌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플러스를 주문한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한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논객이 되면 마이너스 쪽을 신경써야 한다. 주최측이 되면 마이너스 부분만 챙겨야 한다. 플러스? 그런 것은 없다. 왜? 계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사건 안에서 움직이고 어느 분야든 책임자는 에너지의 입력부를 관리하며 에너지 입력측에는 마이너스만 있다. 상대적이다. 자식이 플러스면 부모는 마이너스다. 부하가 플러스면 상사는 마이너스다. 약자가 플러스면 강자는 마이너스다. 게임의 선수가 플러스면 게임의 주최측은 마이너스다. 도전자가 플러스면 챔피언은 마이너스다. 타이틀을 잃지 않을 뿐이다. 철학이라도 그러하다. 플러스의 세계라면 철학 따위 애초에 필요없다. 그냥 요구조건 내걸고 뒹굴면 된다. 떼를 쓰면 된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 된다. 그러나 책임자는 그럴 수 없다. 플러스를 하다가는 윗돌 빼서 아랫돌 고이기가 되는데 그 과정에 비용은 지출된다.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는 것이 있다. 제로섬이다. 에너지는 닫힌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너지가 움직이면 항구와 끊어진다. 왜?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의 입력부와 단절된다. 움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은 전철밖에 없다. 움직이면 끊어지고 에너지는 단절된다. 그리고 마이너스가 작동한다. 완강한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구조론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깊이 들어가면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오직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플러스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이는 인간이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축된 집단의 에너지를 빼먹을 수 있다. 일시적으로만 가능하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언제까지 부모 등골을 빼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 전체로는 역시 마이너스다. 사건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면 단절된다. 외부와 격리된다. 에너지는 순간적으로 고갈된다. 그리고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응석을 부리던 꼬마도 운동회날 출발선을 뛰쳐나가면 결승테이프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실력순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엄마가 뒤에서 등을 밀어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세상은 법칙에 지배된다. 법칙의 적용에는 예외가 있다. 그러나 법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요금독촉이 미루어졌다고 해서 공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 유예되었을 뿐이다. 결국 고지서는 날아온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세계에 산다. 특히 세상은 소년에게 관대하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것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사회에 뛰어들면 모든 것이 빠듯해진다. 매 순간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약자는 냉혹한 진실에 불평을 터뜨리지만 강자는 오히려 거기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다.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역으로 인간도 법칙을 이용하여 어떤 주어진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가두어 놓고 움직이면 다스려진다. 병사가 말을 안 듣는다? 이륙시켜 버려. 자식들이 말을 안 듣는다? 출항시켜 버려. 직원들이 일을 안 한다? 시동을 걸어버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출발해 버려. 닫힌계를 지정한 다음 집단을 한 방향으로 움직여가면 내부에서 대칭이 작동하여 저절로 문제가 해결된다. 법칙에 두들겨 맞듯이 법칙으로 두들기면 된다.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손발이 맞고 저절로 팀웍이살아난다. 단, 계에 잡아가둬야 한다. 병사는 제식훈련으로 가두고 팔랑크스는 밀집대형으로 가두고 기병은 일제히 달려가는 흐름에 가둔다. 기세에 가둔다. 자원의 질을 균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가둬야 한다.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면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가둬진다. 단, 방향이 헷갈리면 계가 해체되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다 깨진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가고 우향우를 시키면 좌향좌를 한다. 내부에 축과 대칭의 구조가 생겨나서 에너지 작용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자기편에 총질을 하게 된다. 같은 것을 두고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희망을 본다. |
"가두어 놓고 움직이면 다스려진다."
보통은 가두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가둬지지 않지요. 그걸 극복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가둬놓고 움직이려면 양치기 개처럼 선두에서 후미까지 왔다리 갔다리 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귀족처럼 앞에 있으면 무리가 따라오지 않고 평민처럼 뒤에 있으면 흩어지며 안철수처럼 가운데 극중에 있으면 정보에서 소외되어 바보가 됩니다. 선두에서는 귀족처럼 고상해야 하고 후미에서는 평민처럼 스킨십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가운데서 묵직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리를 한 방향으로 이끌면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공격야구를 하든 수비야구를 하든 하나를 포기해야 하고 잘하는것을 부추길지 아니면 약점을 보완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략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거지요. 못난이 정치인들은 포기해야 할때 포기를 못해서 못하는 거지요. 노무현은 종로를 포기했는데.
"약자는 냉혹한 진실에 불평을 터뜨리지만 강자는 오히려 거기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다. 같은 것을 두고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