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는 권력행동을 하는 정도에 있다. 소인배가 괴력난신을 추구하는 이유는 집단의 권력구조 속으로 들어가려는 본능적 끌림 때문이다. 종교집단이든 정치집단이든 집단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권력의 작동과정을 몸으로 체감하고 싶어 한다. 지식은 권력이다. 지식인은 이미 권력구조 속에 있으므로 괴력난신을 추구하지 않는다. 지식 안에 역할이 있다. 지식인이 지나치게 권력을 추구한다면 가짜 지식인이다. 괴력난신을 추구한다면 역시 가짜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지식인이 아니고 지성인이어야 한다. 지식인은 지식 기술자일 뿐이다. 스펙에 불과하다. 지성인은 지식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최측이다. 주최측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분위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호들갑 떨지 말아야 한다. 냉정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아직 A단계에 불과한데 B단계라고 부풀려서 미리 C단계에 대비하자는 식으로 오버하면 곤란하다. 그런 식의 오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정치시즌이 그렇다. 선거철이 되면 반드시 폭주하는 자가 있다. 미리 경고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철수도 오버하고 반기문도 오버하고 김한길도 오버하고 손학규도 오버하고 다들 오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원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이미 선거가 끝났는데도 이재명이 의심스럽다고 떠드는 자들이 바로 안철수 부류인 것이다. IT산업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풀려서 말해줘야 한다. 스마트폰이 새로 나왔을 때도 적절히 오버해줘야 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등장할 때는 오버해줄 타임이다. 그러나 비판적 태도의 견지는 지식인의 기본 책무다.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 태산처럼 의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역사는 소인배들이 호들갑을 떨고 지식인이 소동을 진압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인은 없다. 인간들은 모두 배반한다. 배반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김구다. 다들 배반했는데 김구는 왜 배반하지 않았을까? 노무현과 같다. 가방끈이 짧아서였다. 남들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서당을 나왔다고는 쪽팔려서 말할 수 없다. 친일 매국노파와 친소 사회주의파가 가방끈 짧은 김구를 패거리에 끼워줄 리 없다. 김구는 단지 급이 안 되어서 배반을 못한 것이다. 히틀러가 뜨니 일제히 친일파로 몰려가고 레닌이 뜨니 일제히 사회주의로 몰려간다. 그들도 시류를 따라 배반한 것이다. 유행하는 패거리에 가담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의도를 빼고 건조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요즘 인공지능이 대세라니까 나도 한 번 끼어보자 하는 의도를 빼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뭐든 초반에는 새로운 가치에 가산점을 주고 분위기를 띄워주는 것이 정답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냉정해져야 한다. 점쟁이들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답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쟁이가 개떡같이 말해줘도 고객은 무조건 족집게네 용하네 하고 감탄하기 마련이다. 얼굴에 나는 이것을 원해. 이 말을 해줘 하고 씌어 있다. 올 봄에 시집갈 수 있다고 말해줘. 올해 안에 취직할 수 있다고 말해줘. 이러고 있으니 점쟁이가 떼돈을 버는 것이다. 구조론은 고객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곳이 아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해줘 하는 표정은 곤란하다. 구조론으로 이런저런 해석을 할 수 있지만 해석결과에 집착하면 안 된다. 데이터를 잘못 대입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것이며 미국선거의 정확한 데이터는 미국인들에게 있다. 과정이 중요하며 데이터는 본인이 대입하면 된다. 구조론 자체는 오류가 없다. 필자는 해석하는 방법을 보여줄 뿐 실제로 데이터를 대입하고 해석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구조론은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는 거다. 이게 이렇게 되는 전제가 틀리면 저게 어떻게 될지 진술을 알 수 없다. 이게 이렇게 된다까지는 본인이 직접 검색해서 알아내야지 물어보면 안 된다. 이게 이렇다를 본인이 알아내서 본인의 입으로 말하고 그 사실과 연동되어 저게 어떻게 될지를 질문해야 한다. 구조론은 서로 엮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엮인다. 이것은 본인이 제시하고 저것을 질문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물으면 안 된다. 내가 점쟁이라면 상대의 의도가 뻔하니 대략 넘겨짚어서 말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엄밀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인공지능이 뜨는 분위기니까 대략 인공지능 좋은거야 하면 질문의도와 맞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지성인이라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냉정한 한마디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다. 지식은 그 자체로 권력이며 지식의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게 이렇다를 제시하지 않고 저게 저런지를 질문하면 함정을 파놓고 저를 유인하여 자빠뜨리는 공격행동이 된다. 질문에 의도가 있다는 느낌이 들면 불쾌해진다. 거기에 박자를 맞춰줄 이유가 없다. 사대강 좋아 하고 북치고 장구친 사이비 지식인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무조건 원전을 반대하는 것도 지식의 답이 아니다. 무조건 환경보호 만세 생태주의 만세도 곤란하다. 비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는 건축가의 관점으로 보는가 아니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있다. 건축가는 기초부터 하나식 쌓아간다. 잘못되어도 수리해서 계속 간다. 피사의 사탑은 기초가 붕괴되었지만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다. 보강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소인배는 이쪽 아니면 저쪽 둘 중에서 선택하려고 한다. 친일만이 살길이라니깐. 무슨 소리 1년에 경제성장 25퍼센트 찍은 소련에 붙어야 한다니깐. 이러고 있다면 비지식인이다. 어느 쪽을 가도 소인배의 태도로 가면 망한다. 휩쓸리면 망한다. 주도권을 놓치면 망한다. 선장이 키를 놓치면 망한다. 선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미국에 붙었다가 망한 나라도 많고 소련에 붙은 나라는 죄다 망했다. 줏대가 없으면 어느 쪽에 붙어도 망한다. 어느 길로 가던 사건의 다음 단계가 있고 잘 대응해야 한다. 부단하게 맞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를 선택하고 패거리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소인배의 조급한 마음이다. 정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인다. 거기서 건축가의 시선이 얻어진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입맛대로 말할 수 있다. 긍정해주면 좋아하고 부정해주면 싫어하고 하는 식이라면 이미 정치적 기동이다. 정치적으로 내편과 네편을 정해놓고 누구편인지 보자는 식이라면 고약하다. 사람을 시험하는 짓이다. 구조론은 뭐든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리 한 개만 건너면 다 된다고 여겨진다면 사실은 다섯 개를 건너야 한다는게 구조론이다.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 다섯 개의 다리를 모두 돌파하고 최종보스를 차지한 자가 독점하는 것이다. 난관이 생각보다 많으므로 그에 따른 보상도 크고 대신 당신이 먹을 확률은 낮아진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냥 쉽게 요것만 하면 된다는 믿음은 순진하다. 요즘은 코딩만 배우면 된다거나 드론강사 자격증만 따면 된다거나 하는 유행이 있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인공지능 강사를 양성하는 학원을 열면 대박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 필요없고 지금은 인공지능 협회를 조직하고 학원강사 자격증을 팔아야 한다니깐. 이런 말을 해주면 다들 좋아할 것이다. 그런 유행에 솔깃하면 소인배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뜰지는 알 수 없지만 초반에는 긍정해주는게 맞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비판하는게 맞다. 무작정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로 가는 진중권 놀이는 비겁한 것이다. 역시 소인배의 행동이 된다. 띄울 때 띄우고 빠질 때 빠져야 한다. 구조론은 이중의 역설이다. 구조론은 그 자체로 긍정이다. 무작정 의심하고 냉소하는 회의주의자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긍정하되 두 번은 자빠졌다가 다시 일어난다는게 구조론이다. 두 번 자빠지지 않았다면 지금이 자빠질 타이밍이다. 두 번 자빠지고 세 번 일어나야 정답을 찾는다. 그것이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다.
기술 배우고 끝나는게 아니라 주도권을 잡아야 하므로 자빠지게 되고 에너지를 얻으면 끝나는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지배해야 하므로 또 한 번 자빠진다. 에너지의 통제권을 가지려면 3대의 계통을 만들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
건축가의 태도를 한마디로 말하면 의연함이라고 해도 될까요?
반성이 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