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은 21세기의 천동설이다. 천동설은 자기중심적 사고다. 천동설은 내가 사건의 중심이라는 유아독존적 환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하지만 라임이 맞다. 무신론 역시 자기중심적 사고다. 겸손을 가장한 오만이다. 무신론은 의미를 부정한다. 의미는 연결인데 연결을 부정한다. 연결이 끊어지면 고립된다. 자기만 남는다. 부름과 응답을 부정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소인배는 걱정하지 않는다. 집단의 숫자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무신론적 경향이 있었다. 소련도 버리지 못하는 종교를 중국은 버렸다. 중국인들의 무신론은 집단의 숫자에 숨는 비겁한 생각이다. 막연히 숫자가 많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것이다. 대마불사 믿고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계가 연결되자 인간이 오만해졌다. 천하에 나 하나뿐이라면 어떨까? 그런데 둘인가?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다. 우주 안에 인간은 하나다. 80억 개의 세포를 가진 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쪽수에 숨을 수는 없다. 부름에는 응답해야 한다. 믿는다는 말은 수동적인 표현이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집배원은 전달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편지를 전달할 뿐이다. 서신書信이든 통신이든 믿을 신짜를 쓴다. 믿음은 전달이다.
인간은 약속을 전달하고 믿음을 전달한다. 약속의 전달에는 힘이 있다. 신은 부름이고 응답이며 약속이고 전달이다. 우주가 있고, 내가 있고,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의미가 있고, 약속과 전달의 메커니즘이 있다.
### 욕망은 부정할 수 없다. 식용과 성욕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전분을 먹으면 탈이 나는 사람은 육식을 해야 한다. 권력욕이 있고 종교욕도 있다. 지배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 복종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아이들은 심부름 하기 좋아한다. 형들이 가는 곳에는 기를 쓰고 따라간다. 의미욕도 있다. 부름에 응답하고 싶다. 놀이욕도 있다. 놀이는 것은 부르고 응답하는 것이다. 자극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집단의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폰카로 사진을 찍지만 올릴 데가 없다. 꽃이 나를 불렀으므로 응답해야 한다. 자연이 나를 부른다. 올릴 데가 없어도 사진을 찍는 이유는 응답하고 싶기 때문이다. 에너지 욕구가 있다. 집단의 흐름에 동조화 되고 싶다. 큰 무리에 가담하여 도도한 흐름을 이루고 보조를 맞추어 함께 나아가고 싶다. 전율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의미는 의미욕에 응답한다. 왜 의미를 추구하느냐면 의미욕이 있기 때문이다. 불러내고 싶고 응답하고 싶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부름에 응답하면 의미가 있다. 응답하지 못한다면 부름을 듣지 못했거나 응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지 못하므로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