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일베행동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 기생충이라는 발랄한 소재로 이명박근혜 시절에 반짝 주목을 받았다가 바람의 방향이 한 번 바뀌자 금방 본질을 털렸다. 대학교수가 보통 이렇다. 남들 앞에서 폼을 잡은게 저렇고 개인적으로 만나면 더 추태를 부리는게 대다수다. 강단 중심의 학계는 희망이 없다. 진리의 세계에 일등이 아니면 꼴등이다. 노벨상 가져오는 하버드 인재들은 아마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아마 중권이처럼 짖어대고 서민이처럼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교수 나부랭이라는 것들은 그 무대에서 일등이 아니기 때문에 꼴등인 것이다. 구조론은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의리가 필요한 시대다. 일등의 길을 가야 한다. 진리에 이등은 없다.
상호작용을 하다보면 돌파구가 나온다.
계속 집적대다 보면 우여곡절 끝에 길이 열리는 거.
대규모 조직 동원 부정선거. 윤석열이 부정했다는게 핵심
윤석열은 위장후보. 홍석현이 실제 국힘당 후보
단일화 하면.. 총리 밀약설.. 국민분노.. 절대멸망
단일화 안 하면.. 철수 완주, 중도표 이탈, 야당분열, 필연멸망
호남의 이러한 특징은 백범일지에도 나오고 판소리에도 나와.
말을 듣는게 의리. 동원가능한 상태.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가 중요.
부족민은 일단 말을 들어먹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것을 가지고 진을 배게 돼.
염소 한 마리 가지고 사흘동안 논쟁해야 해.
말 좀 들으라고 인간들아.
오국시대 주장. 갈사부여 남부여 동부여 북부여 홀본부여 많아
징기스칸의 징기스는 투르크어로 바다Deňiz라는 뜻이다.
그런데 몽골에는 바다가 없다.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면 이름을 되도록 먼 곳에서 주워와야 한다고 여긴다.
바다가 있는 데까지 다 내 땅이다. 캬캬캬
왕과 관련한 이름은 꽤 멀리 간다.
무굴은 몽골도 아니면서 몽골이라고 우긴다.
티무르도 마찬가지다.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서 연고를 만들어낸다.
러시아의 짜르는 카이사르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 멋대로 카이사르를 칭한다.
벨로루시는 백러시아인데 서쪽의 러시아라는 뜻이다.
백은 몽골의 오방색으로 서쪽인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대의 관습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몽골에서 벨로루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냐고.
물경 5200킬로다.
있어보이려고 눈꼽만한 근거라도 있으면 가져다 붙인다.
청나라가 신라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렇다.
누르하치도 임진왜란 때
조상의 나라 조선에 군대를 보내 일본과 싸우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족보세탁인데 금나라의 금이라는 국명 자체가 신라김씨와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거나
실낱같은 연결이 실제로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완안함보의 보는 신라에 많은 이사부 거칠부의 부와 같은데
뚱보 곰보 먹보 깐부 흥부 놀부의 부 혹은 보와 같다.
흉노선우 묵돌의 이름에서 바야토르라는 말이 나왔고
그게 울란바토르의 바토르다.
용사라고 하지만 묵돌에서 나온 이름이다.
용사의 나라? 이상하잖아.
울란바토르는 바토르의 나라다.
용사라는 말은 후대에 부여된 의미고 바토르는 고유명사다.
묵돌의 아버지는 투멘 혹은 두만인데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자가 이름이 같아서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동명왕, 추모왕, 도모왕, 주몽 등으로 표기되지만
모두 투멘에서 나온 이름으로 봐야 한다.
투멘을 만인장으로 해설하는 것은 역시 후대에 부여된 의미다.
당시에 부하가 만 명 쯤 되면 고구려든 부여든 건국할 수 있다.
투멘은 당시 유목민 세계의 유행어였다.
잘 나가는 사람들은 투멘을 자처했다.
결론 .. 징기스는 바다, 바토르는 용사, 투멘은 만호라는 해석은 후대의 것
고유명사로 봐야. 유행어일 뿐. 몽골에는 투멘 바토르가 널려있어.
사냥할 때 신호용 활을 제일 먼저 쏘는 사람이 투멘
몽골에는 만호장이 곧 국가. 게르가 만개.
합리와 실용
인생에서 무수히 갈림길에 선다. 합리와 실용, 전략과 전술, 공자와 노자, 원칙과 변칙, 공과 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과 사물처럼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공유지와 사유지는 다르다. 공적공간에서 허용되는 행동과 사적공간에서 해도 되는 행동은 다르다. 광장과 안방은 다르다. 핸들은 머리에 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 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공적공간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서울대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가르치고 노자는 가르치지 않는다. 전략은 가르치고 전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광장에서의 매너는 가르치고 침실에서의 테크닉은 가르치지 않는다. 합리는 함께 패스를 연습해야 하지만 실용은 각자 눈치껏 하는 것이다. 원칙은 가르치고 변칙은 알아서 하는 것이다. 오자병법은 가르치고 손자병법은 눈치껏 하는 것이다. 정석은 가르치고 꼼수는 몰라도 된다. 공사구분을 해야 한다. 핸들은 언제나 머리에 있다. 공자가 머리, 노자는 꼬리다. 합리가 머리, 실용은 꼬리다. 원칙은 머리, 변칙은 꼬리다. 공은 머리, 사는 꼬리다. 머리를 교과서에서 배운 다음 꼬리는 현장에서 각자 알아서 융통성을 발휘하면 된다.
의리
인간은 집단에 동원된 존재이며 동원의 근거는 의리다. 의리는 집단이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때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다. 집단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에 맞서려면 집단적 의사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의사결정은 밸런스를 따르므로 밸런스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약자를 차별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면 밸런스가 깨져서 의사결정이 불가능해진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똑똑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완력이 필요할 때는 건장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매력이 필요할 때는 센스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의사결정을 잘 하는 의리있는 집단이 이긴다.
의리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동물의 군집과 인간의 사회는 다른 것이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엮어진 부모와 자식의 친함은 선천적 의리다. 같은 목표를 두고 한 팀을 이루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후천적 의리다. 의리가 로크, 홉즈, 룻소의 사회계약설과 다른 것은 결과측에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측에서 빠뜨려진다는 점이다. 공동운명체에 빠뜨려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타인도 나를 위해 희생한다. 내가 희생해서 그 보상을 다른 사람이 받아도 상관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의 희생한 결과가 확률에 의해 우연히 내게 할당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정의, 행복, 평화 같은 관념들은 하나의 의리를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의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유, 평등, 정의, 행복, 평화, 선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리 역시 관념화 되면 안 된다. 양아치들이 막연히 의리를 떠드는 것은 가짜다. 부모와 자식은 신체접촉을 통해 호르몬을 공유해야 의리가 있다. 동료와는 패스를 연습해서 손발을 맞춰놔야 의리가 있다. 한솥밥을 먹고 한침대에서 자야 의리가 작동한다. 의리의 반대는 차별이다. 일체의 차별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리는 계몽으로는 부족하고 같은 공간에 집어넣어놓고 훈련해야 한다.
이재명도 쉽고 간결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구호가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구호이런 것 말이다.
트럼프의 'Make Americal great again'를 응용하는 쓰는 사람들 많다.
트럼프처럼 보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구호가 필요하다.
오바마의 'Yes, I can'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