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잡으러 가는 상서로운 뱀을 잡으면 어쩌냐. 다시 풀어줘라, 쥐 많은 곳에..
이번 사건이 쥐를 잡게 되는 길조라는 주장도 있고, 잡혔으니 흉조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맞을까요?
일단 길조요.
주택가에 뱀이 나타난 건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고
일단 뱀이 나타났으니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당연한 일은 징조라고 볼수 없으니.
ㅋㅋ
(ㅎㅎ 사실은 아무것도 뭣도 아니요. 근처에 뱀장사가 살수도 있지 뭐. 뱀 밀수꾼이 살던가....)
그 고통 내가 좀 알고 있소. 검도를 해도 이런 경우가 많은데...
방망이와의 마찰로 처음엔 물집이 생겼다가, 터졌다가를 반복. 그러다보면 굳은살이 배겨서 아프지가 않다가 어느날 그 굳은살도 갈라지고 찢겨짐. 굳을 살이 찢어질 땐, 주변의 다른 살도 함께 찢어짐. 요걸 또 반복하다보면, 어느 특정 부분만 굳은 살이 더 굵어 지게되오.
이 얘긴 나중에 칼럼에 쓰려고 했는데, 미리 말하자면...
힘이 어디에서 어디로 진행되느냐 이것이오. 최초의 에너지는 땅에서, 발로, 그리고 허리에서 회전하여 어깨, 팔꿈치,손목, 손으로 이어지는데, 에너지의 흐름을 구조론으로 볼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손의 부분도 구조적으로 발달된다는 것이오.
말하자면 우리가 야구방망이나 칼을 쥐었을 때, 에너지는 새끼손가락에서 시작하고, 엄지와 검지에서 물체를 제어하게 되오. 방망이는 길어서 새끼손가락부터 말아쥐니까. 그래서 야쿠자는 배신자가 나오면 새끼손가락을 자르게 하는 전통이 사무라이로부터 이어졌소. 사무라이가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힘을 못쓰기 때문이오. 다시 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장종훈의 굳은 살이 몰려있는 부분을 보면 방방이와의 마찰과 손가락의 악력을 알 수 있소.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힘을 못쓴다는거.. 꽤 쓸모있는 정보구료. 하여간 구조론적으로 다섯 손가락은 반드시 다 있어야 하오.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미세한 힘조절을 못한다는게 내 생각인데 이건 짐작으로 하는 이야기고.
아오... 댓글에는 그림을 넣을 수 없어서 안타깝소.
하여간 이건 슬램덩크의 작가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또다른 대작 <배가본드>에서도 나오는 장면인데, (32권)
이토 이토사이가 사사키 코지로한테 오른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잘리고나서, 후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대결에서는 손가락이 잘린 오른손을 안보여주다가 순식간에 칼을 뽑아 베어버리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상 새끼손가락이 없는 이토사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전이었소. (해본사람은 다 아는 얘기. 쇠로된 진검이 못해도 1kg 이상 하는데, 새끼손가락 없이 나머지 손가락으로 잡고 휘두르면 훨씬 다루기 힘들어짐)
또 요시오카 도장의 당주 세이주로와 무사시의 대결에서도 둘이 경합할 때, 세이주로가 칼을 놓쳤던 것도, 바로 전 장면에 칼을 잡은 손에서 새끼손가락이 느슨하게 떠있었기 때문. 새끼손가락이 야무지게 칼을 말아쥘 수 없으면 칼 끝까지 힘이 전달되지 않소. 그래서 칼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검도초보자한테 죽도 잡으라고 하고 칼을 내리치면 죽도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원리요.
최강은 역쉬 쉽지 않소. 단순하면 할 수록 어렵지 시프오.
저는 이번사태의 핵심을 포털의 권력집중에서 찾고 있습니다.
포털이라는 미디어가 탄생했고, 그 포털에는 블로거라는 기자들이 있는데,
미디어는 돈을 버는데 기자는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포털미디어(카페나 블로그 포함한)와 네티즌(카페지기나 눈팅이나 블로거포함해서)이 상생하지 않으면
미디어의 질적인 가치가 하락하고, 블로거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리하게 보상받으려할것이기 때문이죠.
강력한 네이밍밸류와 브랜드밸류를 가진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단합해서 포털로부터 권익을 획득해야합니다.
그전에는 이 문제 해결안된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사건으로 블로거들의 수익사업이 위축될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블로그나 카페의 공동구매도 한 수익모델이 될수있다고봅니다.
블로그활동을 통해 발생한 신용을 이용해서 공동구매사업을 하거나,
기사포스트를 언론사에 재판매하는 방법 등 다양한 수익모델을 연구해야합니다.
엄청난 돈과 명성과 영향력을 가진 슈퍼 블로거도 출현해야하고요.
보통 블로거의 사회적인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블로거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할 때 필요한 것들에서...
블로거 개인의 양심이나 개인의 능력에 맡겨두는 것도 한계는 있는 것이고...
블로거의 영향력은 일단은 정보를 자신의 시선으로 잘 엮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조회수나 방문객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올라가는 인지도와의 결합이 되어 생성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로인해서 기본적인 삼박자가 갖추어지면... 그 다음은 광고나 기업들, 포털이 개입을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돈은 나중에 따라오는 경향이 많으므로...거기서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익구조가 어느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포털과 블로거의 연합도 문제는 있지요. 서로 비위 맞춰가며 공생한다는 것도 있는 것이니...
하지만 블로거 개인이 광고나 기업과 연계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인지도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개인의 능력에 비해 부풀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제외하고 그 블로그 자체에서 어떤 신뢰를 가질만한 혹은 그 무엇인가가 있는지를 일단은 보아야 하겠지만...
대체로 그런 면은 조금 부족한 듯하고, 단지 기업들은 부풀려진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일반 소비자들 역시 그런 부분에 어느정도 신뢰를 그냥 가져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파워블로거들 스스로 자신이 뭔가를 할 때 그만한 자신의 역량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과에 자신이 대처를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네요.
어쨌든 자신이 쌓아온 시간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그 사람이 축척한 정보들은 넷상에 그대로 남아 있지요. 이미 공유되어진 것들은... 거기서 자신이 쌓아온 것들이 허물어져가는 허무함을 경험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되네요.
일단은 파워블로거로 성장을 하게되면 눈독을 들이는 부분들이 많아진다고 보여지기에 거기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또한 이미 개인의 단계를 넘어서 버리면 공익적인 차원으로 치환이 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윤리성이 대두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블로거가 윤리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그런 제반시설이 일단은 공고해져야 되겠지만, 일단은 상업적인 것과 결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업적인 속성이 깃들게 됨으로 ...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반의 순수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순수성만 지켜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지만, 자신의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어떤 기획도 필요해진다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스스로 갈 방향을 정해야 하고 자신만의 어떤 원칙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안에서 충분한 검토와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의 쌓임이 다시 블로거들에게 공유되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또한 자신이 일군 신용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것일수도 있음으로 자신의 신용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에 대한 책임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블로거는 절대로 혼자서 신용을 쌓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블로거의 신용은 조회수와 방문객 수와 댓글과 댓글들의 수준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거의 수치상으로 표현되는 신용이기에 그 개인의 신용과는 어쩌면 상관없이 또 다른 신용이 형성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거는 개인의 신용과 보여지는 신용을 어느정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그런 노력은 스스로의 원칙과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에서 어느정도 일치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네요.
사실 어찌보면 외부적인 간섭과 구조 자체가 폭력적인 구조 혹은 수탈의 구조일 수는 있으나, 그 보다는 먼저 블로그 개인의 결정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투자한 시간대비 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니 무리수를 둘 수도 있고, 기회 올 때 잡아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으나, 블로그는 절대로 먹튀가 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블로그를 폐쇄한다고 하여도 다른 블로그를 개설한다 하여도 이미 안되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양지에서 음지로 가서 그늘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많은 것들을 블로그에 실었고, 내보였고, 관계를 맺었기에 충분히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연 처음에도 블로그로 돈 벌겠다고 시작을 했었는지, 그리고 수익이 발생한다는 그것에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의 인생을 망치지 않을 범위인지..스스로 가는 와중에라도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업과 특히 연계된 문제들은 개인인 블로그가 아무리 돈이 많다하더라도, 인지도가 높다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그러한 부분들도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파워블로거 자신들이 그러한 것에 현혹됨을 벗어나지 못하면 계속 피해자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양상하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결국 책임을 가져야 하는 그 자세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블로거가 양심과 이익 앞에서 스스로를 조정하는 일은 있을수없습니다.
무조건 이익이 이기게되어있죠. 그게 더 남는 장사니까요.
그러나 시스템이 구축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가령, 잡스가 아이팟과 음원시장을 만들기전에 공짜음악이 판을 치는것을
네티즌의 양심이나 법적인 대응만으로 막을 수 없었던것과 같은 이치죠.
블로거가 공식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면 처음에는 여러 부작용이 있겠지만,
결국 블로거들이 양심과 이윤추구 사이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게됩니다.
블로거가 힘이 미약했을때는 돈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액수가 모자라는거죠.
지금 블로거의 돈문제가 나왔다는것은 그들이 충분히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는뜻이죠.
세력이 생겼다면 그것을 가둘 울타리가 필요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블로거가 양심을 추구해야하냐, 이윤추구를 해야하냐 하는 순진한 논란의 의미가 없는거죠.
거대 언론사가 눈치를 볼 정도로 성장했는데 양심 운운하면 안됩니다.
블로거라는 에너지를 저장할 그릇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사고를치게 되어있습니다.
포털, 블로거, 기업, 네티즌 사이에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낼 제2의 잡스같은 사람이
나오면 한꺼번에 해결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이 구축되면 얘기가 달라진다.라는 말에 동의 합니다.
블로그는 혼자서 운영하는 체제가 많기 때문에 파워블로거들이 상업적인 것을 취급할 때는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겠지요. 그래서 자신의 갈 방향을 먼저 기획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럿이 모인 공간은 혼자서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점차로 시스템은 구축되어가게 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중구난방이 되어 곧 길을 잃고 헤메게 되어 흩어지게 되니까요.
카페의 경우는 어차피 그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잘만하면 금방 질서가 잡힙니다. 절대로 혼자서 마음대로 못하지요. 또 그럴 수 밖에 없고...그러다보면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금방 분명해지기 때문에..상업적인 것 역시 거절해야 할 것이 태반이기에 판단이나 결정도 그렇게 간다고 보며, 시스템도 점차로 방향성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블로그는 혼자이고, 찾아오는 다수의 방문객들과 유대관계도 그리 깊은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여론 형성에는 좋겠지요.
또한 찾아오는 방문객들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므로...
하지만... 블로거들이 잘 뭉치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은 자기거 하는 것도 바쁘고, 또한 서열이 정해지는 것도 싫겠지요. 방문객 수에 따라서 어떤 느낌들이 있을테니까요. 또한 카페만큼 어떤 결집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구요. 블로그는 어찌되었든 공동의 사용공간이 아니라 개인운영체제이니까요. 소속감이 없어서 몇몇 친근한 관계들을 제외하고는 그 관계란 정말 구름 같은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서 구름관중을 계속 방문하게 하려면 질이 유지되어야 하고,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블로거들 자체에 어떤 공유되어지는 것들이 점차로 생겨난다면, 어떤 질서가 잡힐수도 있고, 그런 질서가 블로거들을 보호해주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일도 어쩌면 혼자서 결정하고 해결하고 해야 하는 것을 혼자서 저질렀기에 혼자서 떠 맡아야 하는 것과 같아서,
현재의 블로거는 포털에 블로그 자체가 소속되어 있지만, 블러거가 하는 수익성 사업에 있어서 포털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극히 미미합니다. 이미 포털은 빠져나갈 구멍이 다 마련되어 있거든요. 포털의 약관들은 대체로 문제가 생겼을 때 포털은 책임이 없다.라는 것을 광고하고 있는 것과 같고...대부분의 카페들이 약관을 만들어 놓은 경우 역시 그러합니다. 자신이 주인으로서 스스로 상업적행위를 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윤리적인 책임은 있어도 물리적으로나 법적 책임을 진다고 되어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블러거는 개인운영체제라서 결국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특히 상업적인 것과 관련이 있을 때는 주체자가 분명하기 때문에 꼼짝없이 책임을 져야 하지요.
깨끄미에 문제가 있다.는 회사 책임이지만....문제있는 깨끄미를 팔았다.라는 것은 블러거의 책임이죠.
소비자는 양쪽에 다 책임을 묻고 싶지만, 좀 더 쉬운 상대를 선택하기 마련이라고 보이며...
소비자는 블러거를 블로거는 회사를 ... 여기에 포털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블로그에 대한 전반적인것, 블로그 약관이나 블로그를 수익성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체를 법으로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 사건에 포털에 책임이 있다.라고 한다는 것은 블로그를 너네것을 쓴 자신이 잘못이다.라는 것과 똑 같은 얘기라고 생각되네요.
블로거를 일인미디어라고 하는만큼 이미 블러거는 포털내에서 어떤 수익성 사업을 개인 혼자서 진행했다면 포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미 포털은 블로그들의 개인 수익사업을 도와주고 있는 형국이고, 눈감아주고 있다고 보아야하며, 블로그 자체도 그렇게 제작되어 있고, 광고도 달아줍니다. 자신들이 블로그에 있는 글들로 포털로 네티즌을 유인하는 것이므로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하나, 블로그를 무상으로 사용하게 해준다는 것과 자신들이 구축한 네트워크를 사용하게 해준다거나의 명분이 있겠지만, 어쨌든 블러들인 사람들로 인하여 포털역시 수익을 창출하므로, 블로거들에게 지불해야 될 것을 광고나 혹은 개인 수익사업의 대한 것을 묵인해줌으로 그것을 무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렇게 따지면 카페등에 축척된 자료들 역시 개인들이 무상으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뭔가를 제공해야 하겠지요.(어찌보면 그래서 블로그로 독립하는 것이지만...)그러나 모여든 이들이 카페로도 얼마든지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거나, 혹은 그런것과 상관없이 취미인 경우들이 많기에 그런것에 별로 신경을 안쓰지요. 집단이 모인 곳은 누가 수익을 가져가느냐가 골치 아프기에 그런것을 외면하지만, 개인에게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요. 혼자 가지면 되니까? 그리고 문제가 생겨도 혼자(1 : 다 구조) 해결해야 하는 방식이고...
그런데 유독 파워블로거들은 수익과 이익이 창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인미디어의 기능을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파워블로거들 경우 대체로 책을 내서 그것을 대체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일부는 광고나 기업과의 유착등를 통해서 해결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무상으로 블로거들의 글을 보는 네티즌이나 대중들은 그들이 내어놓은 책이나 혹은 공구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해주기도 하지요.
다만 저는 이 부분에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파워블로거들 글만 무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블로거들 글이나 카페의 글, 혹은 다른 기사들 글, 역시 마찬가지로 무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반 블로거들이 지속성이나 혹은 글의 완성도가 떨어진다(?)할지라도 그들 역시 시간을 낸 것이고, 무상으로 공급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고, 그런 일반 블로거들이 있기에 파워블로거들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글 자체로 수익성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에는 조금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파워블로거들은 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실질적인 보상을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어쨌든 그들은 구름관중으로 인지도를 얻고 그것으로 새로운 발판을 삼고 있기 때문에 글을 무상으로 보는 것이나 방문객에 대하여 지나치게 어떤 도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은 조금은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특권의식이나, 일반인들과 차이가 있다라 생각하는, 혹은 차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에도 조금은 이해가 안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파워블로거, 수익블러거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이 관계는 블러그를 통해서 블러거가 방문객들을 통해서 인지도를 얻고, 방문객은 정보를 얻고 서로가 이렇게 공존한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서로가 누가 더 이득을 챙겨간다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동기부여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고 보이며, 또한 어떤 영감부분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미 서로 교환해야 할 것들은 이미 교환되어버린 것이라고 보여지기도 하구요.
사회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이나 블로그를 통해서 성공과 성취를 얻고자 함이나 결론은 같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서 성공을 하는 것은 먼저 명성을 얻는 것과 같으므로... 결국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고 보입니다. 결국 대중이 한편으로는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므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대중 그 자체를 도구로 볼 수도 있고, 혹은 같은 동반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블로그 자체가 어떤 수익성의 구조로만 흐른다면 대중이 조금은 소외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시들해져 버리는 거지요. 따지고보면 대중 자체의 이익도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고, 그것은 개인 블로거들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도 되네요.
그리고 파워블로거들이 현재 포털과의 관계에서 아직은 밀리는 이유가...사회의 오프라인에까지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회는 아직 체계성을 갖춘 사람을 원하고 있다고 보이지만, 블로거들은 그런 경우들이 조금은 드물지요. 그래서 그런 체계성 까지 갖추려고 노력하는 블로거들도 많겠지만...딴은 그렇지 않고 비전문가가 취미로 시작하여 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넘보는 그것이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것이기도 하지요. 거기에서 어떤 영감들도 있는 것 같고, 신선하고, 획일화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새로운 시선을 얻기에는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다양성도 있구요. 갇혀있지 않아서 좋은 것들...그것이 사회에 새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하니까요.
^^..쓰다보니 또 길어졌지만..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좀 더 생각해 보아야 겠지요. 그래서 생각이 다소 거칠수도 있겠네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아니므로...하지만 이런 대화들을 통해서 더 생각이 다듬어 질수도 있겠지요.
손핵교는 한나라당 시절 버릇 못 버렸군. 그가 한나라당에 있었으면
"민주당의 원칙없는 포용정책이 종북진보의 실체다" 요랬을 텐데.
정똥영은 통일부장관했던 것만 어렴풋 기억나고
정풍운동후 박스떼기 주동자 인것만 기억남.
인기없는 민주당에 인기없는 인물들끼리 도토리 키재기하고 있네.
명박땜에 쪽빡찬 2류, 아니 3류 정치인들은 이제그만 잠자고 있어주길...
요새 새로 안 사실인데 4.19 후에 군에서도 정풍 운동이 벌어져 김종필등 젊은 장교들이 백선엽등 늙은 구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5.16 세력이 4.19 덕을 본 셈이죠.
예. 기사에도 나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국을 설립했으나 독재 시작과 나폴레옹 황제 등극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입헌군주제의 실패로 7월 혁명, 7월혁명 결과로 7월왕정이 들어섰으나 역시 억압적이어서 2월 혁명으로 이어지고, 2월혁명은 2공화국을 설립하나 나폴레옹 손자가 다시 제정시대로 되돌리고, 제2제정을 지나서 3공화국 들어서고 파리코뮌 진압되고...그리고 프랑스 사회당은 여러 시행착오를 격다가 1871년에 집권에 성공....
프랑스 혁명 이후 크게보면 정치적 실험을 다양하게 한 것이지만...어쨌든 잘해보려고 해도 정치적으로 실패의 연속이었고, 그 실패를 하게 되는 시행착오들을 차곡차곡 해결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네요.
4.19가 5.16쿠테타 세력을 결과적으로 도와준 것이 되어 버렸지만, 프랑스 역사를 참고하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는지 조금은 이해 될 듯... 사회적인 역량이나 구성원들의 역량이 아직 그것을 벗어날만한 어떤 구심점을 강하게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고...
프랑스 혁명이 독재정치나 황제를 등극시키기 위함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었고( 거기에 담겨진 역학관계를 생각해본다면...)
7월혁명 이후에도 억압정치 형태가 나왔고, 2월 혁명 이후에도 다시 제정시대로 회귀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모두 혁명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실패를 딛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어떤 쌓임을 이루었다.
현재의 프랑스를 이룬 결정타가 68사회운동이었고, 그때 사회당이 68운동이 요구한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를 잘한 결과 1981년 집권하게 되었다.
프랑스 자체의 역사에서 보자면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1891년에 하나의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서 완성된 것과 같다. 거의 1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1960년 4.19 혁명....그리고 현재 51년이 지났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
어쩌면 대한민국의 4.19 혁명 역시 하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꿈으로서 혁명을 완성시킬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더 흘러야 하고 더 쌓임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나라의 역사적 경험 사례를 알고 있는 우리나라는 좀 더 빠르게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의 혁명이 바로 그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완성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뜸들이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 이후 왜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았냐고, 왜 그렇게 하지 못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조금 더 빨리 그 길에 도달하여 시작되어 온 그 하나의 완성을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좌표를 찍기까지....
현재에서 보자면 4.19 혁명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았다. 계속 진행중이다.
산업구조가 완전히 바뀌겠소.
현재의 20년 공부해서 20년 직장생활하는 구조로는 인간의 길어진 수명을 감당할 수가 없소. 결국 반드시 대학을 가야할 필요가 없어짐. 경쟁 또한 의미가 없어짐.
본질을 모른체 쓴맛잔뜩보고 '파시즘 나쁜거야'란 교훈 어렵게 얻어서, 파시즘 유령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마 있겠지.
3류 지식인의 열등감 표출..
인간이나 쥐나 '니가 이렇게 가면 나는 이렇게 간다'는 단세포에서 벗어나지 못하오.
생각없이 1초만에 판단하는게 무조건 상대방의 반대로 가는 거.
또는 전에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거.
소통하는 대중덜이 등장해서 도장놀이가 쉽지는 않겠지만 언론은 3류지식인 편이오,,,그러면 우리도 도장을 준비해야 하는게요..자본파시즘, 재벌파시즘, 전근대파시즘, 시장개방파시즘...음 이렇게 옮겨놓고 보니..소수에 의한 폭력은 진행중인거구 진중권등이 정의하는 대중 파시즘은 싹이 트기전에 밟아놓자 이런 차이가 있소..너희들은 폭력을 휘두를거니깐 지식인이 미리 규정하고 밟아도되...이런차이...전쟁광 부쉬의 전쟁명분과 맥락을 같이하오...
걸어다닐때 조심하시오..진중권 패거리가 몽둥이로 뒤통수 칠지도 모르오...왜냐고...파시스트일지도 모르니깐..
나는 그들의 미학적 판단력이 유치하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중의 시대에 대중에 대한 것은 정작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오.
어느 시대마다 그 시대에서 사람이 새롭게 발견되듯이,
어느 시대마다 사람집단이 새롭게 형성 되듯이...
그 시대의 대중 또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대중이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한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주체세력이 생겨난다는 것.
다수의 국민과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구별이 되는 것 같고,
개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어떤 핵심으로서 대중 자체의 길이 있다라는 것.
다수의 대중으로서, 그 시대의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그 시대의 대중의 흐름과 향방이 결정된다라는 것.
그 시대의 주체세력이 되는 대중들이 공유하는 집단의식이 있다라는 것.
그것을 보아야 대중의 시대에 걸맞는 것들이 생겨난다고 생각되오.
기사보다가 같이 보게 된 비슷한 느낌의 기사. 부조리도 꽤나 생명력 있네.
일감 몰아주기라는 기사.
현재 대 기업은 성장지상주의 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생각됨.
성장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니...
1대에서 이룬 성장을 2대에서 확장 시키고 3대에서 다시 마구잡이 거둬들이는 수법으로 성장을 유지시켜야 하는 것.
성장을 시키지 못하면 실력이 없다고 할 것이고,
3대에 가서는 어찌 되었든 세포분열하듯이 기업이 분열을 하게 되는데...이들이 다시 혈연으로 뭉쳐져 있는 것이고, 결국 쪼개져서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성장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대기업이란 틀 아래서 갈라져서 다시 대기업이란 틀 안에서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라는 것. 결국 분리가 분리가 아니라는 거...
그러다보니 성장에 목을 메는 것. 대 기업이 성장을 유지하려면 그 옆에 있는 잔챙이 회사들은 양분을 빼앗겨 다 고사된다.
대기업이 3대를 거쳐서 분리되면 그 회사 자체적으로 성장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몰아주기를 하기 때문에 분리된 회사가 금방 성장하고 다시 주변을 장악하게 되는 것.
스스로 성장을 멈추지도 못하고, 무조건 성장해야 하는 기업의 생리...
이 역시도 성장 그 자체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불만족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식탐과 다를 바 없는 상황.
기업이 이러한 성장만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서 있는 것도 산업주의를 뒷받침하는 자본과 과학과의 결합에 의한 것이고 보면,
기업의 변화에 철학과 미학적 관점은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들은 성장을 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고 존재의 의미가 없어져 죽으나 사나 그것에 매달려야 함.
그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둘 다 연식이 비슷한가?란 생각이 들었음. 임재범이 나치 복장 퍼포먼스도 좀 쌩뚱맞아 보이고 , 할려면 나치마크에 쥐대가리 하나 그려넣던가...진중권이 알러지 반응 보이는 것도 다 연식들의 한계를 보는 거 같고..자기 연식을 뛰어넘는 건 어려운 일인듯....임재범이 어느 선을 넘어가면 언론은 제동걸 것. 다 자신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놀아야 물어뜯지 않을 것. 자본주의의 범위.자본이 허락하는 범위. 임재범은 아마 알고 있을 것. 개인적으로 옛386시대인들은 에너지 없다고 봄. 새로운 시대를 열..
진중권의 나열식 미학은 별로니 임재범의 반나찌 퍼포먼스 비판은 논거로 적절하진 않지요.
허나, 임재범의 반나치 퍼포먼스 속에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면 임재범의 카리스마와 나찌복장이 주는 강렬함이 반나찌를 시사하기 보다는 임재범=히틀러가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임재범이 자신의 카리스마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나찌복장을 입은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임재범의 이번 퍼포먼스는 단순한 무대 아이디어에 그칠 뿐, 새로운 음악적 지평이나 창의적인 연상을 일으키지도 않네요.
전체적인 예술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대중음악을 대중음악의 테두리 안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런 시각이 생겨난다고 생각되네요.
퍼포먼스가 다른 것에 영향을 주든 안주든, 새로운 장을 열든 안 열든...
현재 임재범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라는 것이 중요하고,
임재범이 오버했는지 안했는지는 직접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단 임재범이 의도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 결과를 어느 정도 짐작 했을 것이니 의도했다고 얘기하는 것에서..
가수들이(예전에 마이클 잭슨도 그런 퍼포먼스를 했었고..) 간혹 그렇게 집중 혹은 이슈가 될만한 무대의상과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집중의 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전체주의 미학을 차용했다고 하는 것이 웃기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무슨 전체주의가 있을까요? 집단으로 모인 팬들의 대한 어떤 쑈킹 현상을 노린 것이라면 몰라도...
마이클 잭슨이 흰티에 빨간완장차고 노래한 것도 전체주의 미학일까요...?
나치를 상징해서 비판 한 것이 아니고, 전체주의 그 자체의 효과를 노렸다고 비판한 것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현상은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별로 특이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히 쑈는 그런 효과를 극대화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라는 것도 있을 테고, 뭔가를 보여 주기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도 있는 것이니...그런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되는 것일텐데... 그러다보면 물론 다양한 것이 나올 수도 있지만, 임재범의 이미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런 효과의 극대화를 꾀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데 전체주의를 극대화 하는 그런 류의 퍼포먼스 밖에 못하느냐? 전체주의 미학을 차용하는 것은 취향이 몰취향이어서 그렇다.라고 비판을 하는 것이니 결국 임재범이나 그 기획자들이 수준이 떨어진다. 그것에 열광하는 대중들 역시 뭐 도매급으로 같이 넘기는 것이구요....뭐 이런 비판을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어떤 것이든 전체주의 속성을 내 보이면 무조건 비판하는 방식...늘 해왔던 방식대로....
꼴통들은 오직 임재범을 때리는 방식으로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
'묻어가기' 혹은 '찔러보기'구랴. 묻어가는 것 외에 달리 할 수있는 것이 없다는 자백성 글질이오.
일단 상승하는 임재범에 글하나 묻혀 흔적 남겨두기, 그냥 1등이라고라도 쓰고 싶었으나, 미학을 남에 눈으로 배운 탓에 눈 빌려준 남이 OK하기 전까지는 찔러보는 것이오. 달리 뭘 해야할 지 모르지 싶소.
이런 류에 맞수는 명박쥐가 딱이오. 쥐들하고 붙으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긴 하오. 그런데 똑 거기까지요.
전체주의 미학이라 함은 사람을 홀리게 하는데 있다. 말 그대로 홀릭이다.
정신을 빼놓고 좀비가 되는 것처럼 대중을 대중예술로 홀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계획된 이벤트에 대중은 압도되고 황홀지경에 빠지게 하고 중앙에 집중하게 하고, 지지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일단은 미를 대표적인 것으로 내세워서 그것을 이용한다.
군복 등을 멋지게 장식하고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는 것도 그런 효과다.
비단 이것은 파시즘에서만 이용된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에서도 마찬가지다. 군무가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6.25 당시 군복 비교에서 북한의 군복이 남한의 군복보다 미적인 면에서는 더 멋있었다.
이것 역시 홀리는 것이다. 군복을 멋지게 디자인 하는 것 역시 홀리게 하기 위함이고 권위를 주기 위함이다.
이 역시 단체로 있을 때 아름다움을 극대화 하기 위함이다.
히틀러 당시 군복 다자인에 신경을 썼던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의 히틀러가 사용했던 대중동원 방식과 정치와 공연예술의 대중동원 방식은 얼추 비슷하다.
대중동원 그 자체가 성공이 열쇠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방송에서 뜨고 나면 바로 콘서트를 여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것은 대중동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공연예술에서 기획,제작,연출, 주인공의 카리스마, 대중 동원 능력, 그리고 절정에 치닫는 클라이막스를 기획하는 것 등에서 보자면 하나의 공연은 그 자체의 서론과 본론의 클라이막스와 결말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의 가장 키 포인트는 주인공의 카리스마 작렬이다.
공연에서 보여줄 거리는 주인공 이외에 모든 장치들이나 게스트들로 이루어지지만 뭔가 아쉬운 점이 남는데 주인공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렬한 인상을 줘야 하는데, 거기에 행위예술을 더하여 주인공을 극적으로 부상시키고 그럼으로 인해서 모여든 관중을 일시에 제압해 버리는 것이다.
무대 장악력이 절정을 이룬 것이다. 특히 락은 무대장악력이 필수라고 보여진다. 락커가 무대를 장악하지 못하면 맥이 빠진다. 그 공연은 실패가 된다. 김빠진 맥주... 거기에서 오는 관중의 불만과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더 극에 달하게 됨으로 잘못하면 역효과를 부르기 때문에 철저한 기획이 필요한 것이고 락커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무대를 장악하므로 인해서 관중을 홀릴 수 있다. 아니 기꺼이 홀려주는 것이다. 거기에 100% 충전되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히틀러는 이러한 집단주의의 속성과 대중예술의 속성과 사람들이 경외시하는 미를 접목시켜 환상적인 이벤트들로 대중들을 현혹시킨 것이다. 즉 철저하게 대중과 대중예술, 미를 권력과 체체유지를 위해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파시즘을 완성시켜 가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예술을 권력과 체체에 이용하는 사례는 모든 독재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형 공연예술들은 그런 형태를 띠고 있다.
왜 그럴까? 역시 무대에서 무대를 장악하여 관중을 압도하지 못하면 이미 그 공연예술은 실패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중이 밀집해 있는 곳의 열기는 대단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렇게 밀도가 급 상승해 있는 상태에서 무대를 장악하지 못한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면..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그 안에서 가수는 주인공이자 절대적이다. 왜 모두 그 가수를 보고 자발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어떤 기대감이 급 상승해 있으므로 그것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런 엄청난 기대를 갖고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공간안에서 바로 성립되는 밀도차 때문에 그렇다고 보인다. 순간에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열기로 인하여 기대치가 올라가 버린 것이다. 그럼으로 그 이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만족하게 된다.
진중권의 비판의 핵심은 나치의상을 입고 행위예술을 했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어떤 집단주의적 대중예술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임재범의 공연은 전후사정을 가지고 추측해보면 그러한 법칙을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대형 공연예술이 갖는 어떤 성공의 요인들을 아주 착실하게 이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다.라는 어떤 법칙, 히틀러 역시 사용했던 그런 법칙..그러면 대중이 홀리게 된다라는 어떤 법칙....
임재범이 나가수에서 북을 등장시키고 여가수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베이스를 깔고 임재범이 거기에 카리스마적인 목소리로 강타한다. 역시 이것도 대중을 홀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임재범이 없다면 다 필요없어지는 것이다. 임재범이 있기에 그런 공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가수들이 공연할 때 다양한 장비들과 기구들과 퍼포먼스를 개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리스마로 엄청난 관중을 압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악기나 오케스트라나 퍼포먼스를 추가하여 극대화 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 요인은 주인공이 얼마나 카리스마를 발산하는가에 공연의 성패는 결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이 있기에 그에 맞춰서 다른 다양한 부수적인 것들이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을 얼마나 부각시킬 수 있는가에 공연은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안에서 주인공은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공연은 희열감을 주고 마무리하게 된다.
콘서트장에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사람들이 그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미 대형 공연이나 쑈 자체가 목적인 공연에서는 이러한 효과 없이는 공연을 끝내기 어렵다. 왜 그것을 원하여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대형공연은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것을 전체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히틀러 역시 이러한 것의 속성을 알고 이용한 것이다. 히틀러에 의해 만들어 졌다기 보다는 인간안에 내재되어 있는 집단주의적 발현인 그것이 대중의 속성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 속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히틀러도 이용했고, 공연예술도 이용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 이래 그러한 속성을 이용한 사례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가장 극단으로 치닫고 어떤 경고성을 보내 우려를 짙게 만든 것이 히틀러다. 역사의 사례로서 깊이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속성을 잘못 사용하고, 미를 잘못 사용하고, 권력으로부터 조장된 예술을 유통시키기고, 이러한 행위 자체는 인간사회에서 충분히 감시되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의 집단주의 속성은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공연예술은 이런 집단주의의 발산에 대한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디선가는 발산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꾹꾹 눌러 담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공연예술을 극대화하여 국가와 권력과 체체를 유지하는 사이비 공연예술을 유포시켰지만, 이것은 히틀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잘못 악용된 사례이다.
대중공연예술이 좀 더 제대로 자라잡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간의 속성과 공연예술이 갖는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속성이 사회 곳곳에 침투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중음악이나 예술에 있어서는 대중이고, 국가에 있어서는 국민이고, 정치에 있어서는 이런 대중이 유권자이고, 넷상에서는 네티즌이 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어떤 입장들이 취하는 것은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군중속에 파 묻힐 때 나타나는 집단적인 심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신의 판단이 있고 또한 집단적인 판단도 있다. 개인의 판단과 집단의 판단이 맞을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지만, 거기서 분명히 개인은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럼으로 인해서 다시 판단 할 수 있다. 전체주의 집단주의 이러한 것에 개인이 늘상 홀리거나 거기에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시대이다. 그 흐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그럼으로 전체주의 미학이 설령 있다하더라도 이름이 그렇게 붙은 것이지 전체주의에서 처음부터 나온 현상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는 현상을 전체주의가 그런 부분을 부각시켜 극대화 사용했기 때문에 전체주의 미학이라는 말보다는 다른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전체주의 미학이라 하면 그것을 사용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공연예술들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전체주의 미학이라는 말로 사용되면 그것 역시 하나의 족쇄가 된다고 생각된다. 집단주의 미학하면 역시 공산주의 이런 문구들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집단 미학이라는 말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됨...전체주의 미학하면 상징하는 것들이 있어서 이해는 되기가 쉽지만, 어떤 적용에 있어서 그 범위를 한정시키고 제한하여 막아버리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역행이라고 생각된다.
...일단은 이곳에 일어나는 생각을 올려봅니다. 나중에 다시 정리 할 수 있으면 하구요. 쓰다보니 조금 길어졌네요.
쥐쉐퀴 2년 후 모습이라는 댓글이 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