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마음자리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관점을 보는 것이며 집단 안에서의 무의식을 보는 것이다. 상황 속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에 홀려 있는 사실을 보는 이다.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연기하게 된다. 지켜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무의식 중에 압박을 받는다. 상대가 질문한다고 해서 곧 답하려고 하는 그 자체로 홀린 것이다. 김어준이 노회찬에게 농담을 건다. 그 대머리는 언제부터 까졌습니까? 분위기를 띄우려는 행동이다. 적절한 리액션은 그러는 김어준 너는 언제부터 머리에 까치집을 지었냐?가 된다. 그런데 노회찬이 정색하고 대머리에 대한 의학적 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건 눈치가 없는 것이며 얼떨결에 홀린 것이다. 이에 대해 김어준은 ‘의원님이 긴장하셨나 보다.’고 말하는데 그렇다. 긴장한 거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런 말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맞춰주지 못한다. 인사치레로 ‘날씨 좋네’ 하면 ‘날씨가 좋긴 뭐가 좋아? 잔뜩 흐리잖아.’ 이런 식으로 되받는 사람 꼭 있다. 빈정대는 형태로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매사에 말꼬리 잡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고, 모든 말을 질문형태로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짜장면이 좋다'고 말할 것을 '너는 짜장면이 좋지 않냐?'로 말하는 식이다. '사과를 달라'고 하지 않고 '사과 먹으면 안 돼?' 하고 묻는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잘못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관계에 홀린다.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몰래카메라를 찍어보면 알 수 있다. 대체로 걸려든다. 설정된 돌발상황에 놀아난다. 그 상황을 이겨야 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떠나 언어 자체에서 그리고 존재 자체에서 또 주어진 대상 자체에서 내재하는 구조를 찾고 질서를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이길 수 있다. 언어는 호응하는 것이다. 호응은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다. 호응은 사건 안에서 기승전결로 연결시켜 가는 것이다. 1대 2대 3대로 계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부름에 응답하는 방법은 효도가 아니라 손주를 만들어 3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21세기다. 과학이 먹어주는 시대다. 당나라 시절에나 먹히던 화두를 들고 앉아있어봤자 조금 깨달을 뿐이며 그걸로 귀신을 물리치고, 음모론에 휘둘리지 않고, 유사과학이나 사이비 종교에 속지 않고, 환빠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강박증에 걸리지 않고, 보이스 피싱과 같은 사기에 넘어가지 않는 정도일 뿐 대단한 성취는 없다. 그걸로는 양자역학을 이기지 못한다. 이기지 못하는 깨달음은 쓸모가 없다. 그때 그 시절에는 그걸로 이겼다. 당나라 때는 그게 첨단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겨야 가치가 있다. 이기면 되는데 이기지를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철 지나간 선문답 따위에 흥미를 가질까? 동료를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조론 회원 중에도 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런 짓을 왜 하느냐 연구해보니 한 가지 쓸모가 있었다. 그걸로 동료를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님들도 화두 가지고 논쟁하다가 칼부림을 하기도 한다고. 네 화두는 개떡이야. 이런 걸로 대판 싸움 난다. 다들 목숨을 걸고 화두를 들고 있는데 말이다. 결론인즉슨 21세기 이 시대에 고상한 양자역학으로 깨달아도 되는데 굳이 수준 떨어지는 1500년 전의 유행을 따르려는 이유는 그걸로 동료를 이겨 먹으려는 호승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심한 일이다. 라즈니쉬는 띨한 인간이다. 저 정도는 나도 이겨 먹겠다는 자신감이 든다. 띨빵한 라즈니쉬 정도야! 이런 생각으로 띨방한 그룹에 들어가는 짓이 띨방한 거다. 수준 떨어지는 것을 들고나올수록 인기가 있다. 대중이 쉽게 이겨 먹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굳이 공안을 들고 싶다면 양자역학을 들기 바란다. 그 안에 다 있다. 스티븐 호킹을 이겨 버리면 되잖아. 뭐가 어려워? 마음자리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마음자리에 무엇이 있나? 동료를 이겨 먹으려는 저급한 권력의지가 있다. 거기에 홀려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화두 들고 앉아있는 바보는 왠지 만만해 보인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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