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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797 vote 0 2008.12.30 (23:10:42)

 

제 2장 이상주의자가 되라

참된 지성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비극은 이 세계에 참된 지성이 없다는데 있다. 우리나라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나라에 큰 어른이 없고 이 세계에 참 스승이 없다. 전지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없다.

부시의 침략소동을 겪고도 지식 집단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고작 한다는 짓이 부시탓하기다. 부시를 탓한다는 것은 부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의미다. 그것은 적어도 부시를 대등한 경쟁의 상대로 본다는 거다.

쇠귀에 경 읽기도 유분수지 부시, 체니, 럼즈펠드 이런 자들이 도무지 말이 통하는 대화의 상대란 말인가? 이 악당들은 굴다리 밑에 집합시켜 놓고 굴밤을 한 대씩 먹여준다면 몰라도 책임을 논할 대상은 못 된다.

우리를 탈출한 맹수는 물리력으로 통제할 대상이지 합리적인 대화의 상대는 아니다. 물론 지식 집단에 그들을 통제할 물리력이 있을 리 없다. 왜 지식은 힘을 잃었나? 지식은 왜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나?

지적 게으름이다. 성찰의 빈곤이다. 왜 아무도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지성이 문제다. 바야흐로 지성이 죽은 시대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 깜깜한 밤바다를 등대도 없이 별빛도 없이 항해하기.

부시 탓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구소련의 붕괴, 동유럽의 민주화 도미노, 냉전의 해체, 중국과 베트남의 개방, 신자유주의 득세와 같은 역사의 큰 흐름을 예상하지 못하고 뒷북을 치고 있다는 의미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내다본 지성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세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20세기는 그 한 명을 갖지 못했다. 20세기 인류의 집단지능은 그 지점에서 한계를 보였다.

왜 예상하지 못했나? 왜 서구 지식인들은 구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는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구소련의 붕괴를 예상도 못하고 이후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이 권위를 잃고 있는 것이다.

이미 권위를 잃었으니 부시 원숭이가 집권을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지식의 거듭된 오판으로 인한 권위상실이 원숭이 무리의 집권을 도운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인정해야 한다. 지식의 실패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휴거 날짜나 세던 지식인들, 그리고 여전히 휴거를 기다리는 좌파들. 점점 꼴이 우습게 되어가고 있다. 원숭이들의 득세는 당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으름의 결과다.

정신 차려야 한다. 지식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답은 없다. 서구중심의 철학계, 강단학계, 언론계, 문화계, 교수니 석학이니 하는 자들. 바로 당신들이 원숭이의 손에 폭탄과 총을 쥐여준 것이다.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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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양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지식인의 무력함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얻어졌다. 그들은 예고된 재앙을 막지 못했다. 지식은 왜 이다지도 무력하단 말인가?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인들! 그들은 오만하지 않다. 패기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 겸손하다. 그들은 겸손으로 도피해 버렸다. 겸손한 자가 책임을 양보한다. 겸손으로 위장된 비겁함이다. 지식은 오만해져야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세가 있어야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다. 임제 의현은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다. 이 정도의 패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오늘날 지식은 날로 전문화 되고 세분화 되었다. 집 짓는 목수는 집만 짓고 떠난다. 집만 지으면 역할 끝이다. 지식인은 글만 가르치고 떠난다. 그들은 겸손하게도 자기 역할을 좁은 범위에 한정시킨다.

자기 존재를 파편화된 부스러기로 본다. 조직과 집단과 시스템을 자신의 위에 놓는다. 그러니 시스템 속의 부스러기 조각에 불과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아직 독립적인 한 명의 지식인을 보지 못했다.

무엇인가? ‘나’로부터 출발하기다. 집단적 사고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남 뒤에 가서 줄 서지 말아야 한다. 서구사상은 본질에서 노예사상이다. 그들의 사상에는 나의 위에 나의 존재에 선행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별수 없는 기독교도들이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를 보라. 모세가 출애굽 하여 무리를 해방시켰으나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다. 권력에 의한 파라오의 지배에서 교리에 의한 가톨릭의 지배로 바뀌었을 뿐.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서구의 그들에게 지배자로서의 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천 년 전 희랍인에게 있었던 영혼의 자유가 21세기의 그들에겐 여전히 없다.

르네상스가 인문주의 부활을 선언했지만 단지 선언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단정했지만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지배 시스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바꾸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파라오의 지배에서 교회의 지배로, 교회의 지배에서 이념의 지배로, 자본의 지배에서 코뮌의 지배로, 폭력의 지배에서 시스템의 지배로, 십자가의 지배에서 도그마의 지배로 지배주체가 바뀌었을 뿐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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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은 서구의 개념이다. 동양에는 군자(君子)라는 개념이 있다. 군자는 학문적 바탕 위에 인격적 수련을 더한 사람이다. 겸손한 서구의 그들과 달리 오만한 사람들이다. 오만의 극한에서 정상을 찍고 온 사람이다.

소동파의 전범에 의하면 참된 군자는 불교 승려나 도교의 도사들과도 교유하여야 하고 예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이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서구의 창백한 지식인상과 다른 것이다.

서구의 지성인상이 강단이라는 시스템에 하부구조로 종속되어 있다면 동양의 군자상은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강단이니 문단이니 하는 시스템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발상의 밑바탕에는 도교 영향을 받은 남조시대의 청담사상이 깔렸다. 선종불교의 영향도 크다. 양명학의 발달이 그러하다. 굵은 테 안경을 쓰고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는 서구의 지식인상과 다르다.

군자의 필수적인 요건은 안목이다.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 미추를 가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은 결국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논리가 된다. 풍류와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추사는 초의와 교유하며 차 맛을 가렸다. 골동이나 서화에도 안목을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금석문을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는 전통적인 개념의 유교 선비와는 다른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에 빗대어 말할 수 있다. 생불이라던 지족선사도 황진이의 유혹에는 넘어갔다. 그 황진이도 도학의 서경덕을 꺾지 못했다. 도교와 불교에도 이해가 있었던 서경덕의 도학은 폼만 잡는 벽계수의 깐깐함과 다르다.

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선 중후기의 짧은 문예 부흥기에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고 골수 유교주의자의 그것과도 다른 새로운 지식인의 전범이 창출된 것이다. 종교와 계급의 벽을 넘는 소통의 지식인상이다.

무엇인가? 오늘날 지식인은 전문분야에 치중하여 사회적인 소통이 부족하다. 구소련의 몰락 이후 전개된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민중의 마음과 멀어진 결과로 권위를 잃어 원숭이 떼의 발광사태를 자초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고뇌하는 칸트의 얼굴이 아니라 미소 짓는 추사의 얼굴에 진정한 이 시대의 답이 있다. 그것은 비판적인 서구의 지식인상이 아니라 이상주의적인 동양의 지식인상이다.

● 비판적인 서구의 지식인상 ≫ 이상주의적인 동양의 지식인상

참된 지성은 스스로 빛나는 별이어야 한다. 앉아서 부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비판은 뒷북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앞장서서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행동하는 지성이 진짜 지성이다. 그러나 이상주의가 없으면 행동할 수 없다. 이상주의 없이는 저 깊은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 수 없다. 민중과 함께 얼싸안고 춤출 수 없다. 민중의 마음과 소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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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와 그의 제자 오백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그러나 이후 불문에 깨닫는 사람이 없어졌다. 왜? 사회가 점차 세분화 되고 전문화,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석가의 진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다.

석가는 ‘인생은 고(苦)다’ 이 한마디로 무리를 아우를 수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무리들은 충분히 감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밥 먹고 일 하고 똥 싸고 잠 자는 게 전부였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네가 아는 게 뭐야?’ 하고 질문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 정도만으로도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충분히 탄복하고 꺼벅 죽었다. 곧 행장을 꾸려 스승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네가 인생을 알아?’ 하고 집적대봤자 수작이 먹히지 않는다. 제자백가 시절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지식시장의 선점효과는 사라졌고 후속상품은 개발되지 않았다.

2차 대전을 전후로 짧은 지식의 전성기가 있었다. 그 시점에 세계인의 90퍼센트는 문맹이었다. 지식의 계몽이 먹혀서 도처에 학교가 들어섰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구촌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식이 대접받지 못한다.

석가 이후 불문에 깨닫는 사람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화 이후 참된 지성인이 없어졌다. 척하는 사람이나 있을 뿐이다. 교육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후방효과가 사라져서 더 이상 계몽이 먹히지 않는다.

무엇인가? 2차 대전 전후의 반짝 성공은 대중이 지식과 더불어 지식인의 신분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대중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에 관심이 있었다. 모두들 지식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이제는 다르다. 지식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지식의 프리미엄이 사라졌다. 이제 지식은 지식 그 자체의 상품가치로만 말해야 한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도 지식인 집단의 욕망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 진보는 점차 종교적 신념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교육이 보급되어 지식 자체의 상품가치는 떨어졌고 사회가 바뀌어 신분상승의 매력도 줄었지만 지식은 아직도 지나간 시대의 영광을 잊지 못한다.

지식이 타락하면 종교처럼 된다. 이제 그들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접고 종교가 발달시켜온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에만 관심을 보인다. 변화하는 시대의 현실과 멀어지고 민중의 마음과도 멀어진 채로 마지막 남은 국물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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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는 타락했다. 이념의 이름으로 그들은 세계를 균질화 시키려는 그릇된 욕망에 빠져 있다. 서구의 진보주의는 비과학적이다. 별수 없는 기독교도들인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존재 위에 파라오를 두고 있다.

출애굽 사건에서 크게 감동을 받은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출애굽을 반복하고 있다. 지구인의 90퍼센트가 문맹이었던 시대에 지식의 보급은 그 자체로 미망에서 빠져나오는 출애굽이었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이름이 파라오에서 마르크스로, 혹은 조직과 집단과 시스템으로 바뀐다 해도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결코 강단이라는 시내산을 떠나지 못한다. 조직에 얽매여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는 퍼즐조각으로 쪼그라들었다.

지식을 가졌다는 것은 목수가 규구(規矩)를 가진 것과 같아서 좁은 범위에서나 통용될 뿐이다. 자기의 분야를 떠나 종교와 계급의 장벽을 넘어 타 분야와 널리 소통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서구의 진보주의는 목수는 집만 지으면 되고 지식인은 비판만 하면 된다는 식의 편협한 사고에 빠져 있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라면 정부만 비판하면 된다는 식이다. 대안의 제시는 행정부 역할이요 자기들은 비판만 하겠다는 거다.

종교인은 설교만 하면 되고 공무원은 출근만 하면 된다는 식의 옹졸한 태도이다. 그들은 순치되고 길들었다. 슈퍼마켓의 통조림처럼 차곡차곡 쟁여져 버렸다. 그들은 야성을 잃었다. 그들에게서 더 이상 늑대의 눈매를 찾을 수 없다.

추사가 제시한 지식인상, 동파가 제시한 지식인상, 화담이 보여준 지식인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민중의 마음과 더불어 널리 소통하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제시한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상이 아니라 이상주의적 지식인상이다. 권력의 허물을 탓하며 그들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에 기대는 수동적인 지식인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매력으로 민중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능동적인 지식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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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전스와 디버전스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의사소통이다. 금속활자와 같은 새로운 의사소통의 수단이 나타나면 상부구조의 컨버전스와 하부구조의 디버전스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러한 흐름은 일정한 양식화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새로운 양식이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컨버전스와 디버전스의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양식이 완성되면 소통한다.

새로운 양식이 주변부로 전파되며 크게 소통의 맥놀이를 일으킨다. 이윽고 양식이 완전히 정착되면 한동안은 매너리즘의 시대가 이어진다. 양식이 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변형되고 패러디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기술의 진보가 축적되면 낡은 양식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추장스러워진다. 다시 변혁이 일어나 구질서는 무너지고 신질서가 도래한다. 이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기본적인 순환구조다.

종교가 전래될 때도 그랬고, 금속활자가 나타났을 때도 그랬고, 영화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출현했을 때도 그랬고,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선박과 마차와 기차와 자동차 역시 중요한 소통의 매개다.

문명권과 문명권 사이에서 하나의 장벽이 뚫리고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질 때마다 역사는 중심부의 컨버전스와 주변부의 디버전스로 크게 소용돌이치곤 했다. 그 중심에 계급과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이 있다.

지식인이 스스로 그 문명권의 장벽을 넘는 소통의 매개자 역할을 자임한 것이 추사와 동파의 지식인상이다. 유학자인 추사와 다산이 스님인 하층계급의 초의선사와 교유한 것이 그러한 뜻이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다. 민중이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한바탕 축제와도 같은 그 신명의 굿판이 언뜻 소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혼란을 안타까워하는 지식인의 시선에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라는 낡은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며 고상하게 포장하여 말하지만 본질로 보면 한마디로 상고 나온 놈이 설치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거다.

강단의 학자가 흐름을 이끌고 무리를 통제해야 하는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유분수지 네티즌들이 주제에 설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말이나 되는가 하는 꼬부장한 마음, 그 까칠한 마음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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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만 해도 선비들은 몽둥이 들고 사찰 때려 부수기에 분주했다. 율곡 선생도 열아홉 살에 1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이름 높은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한 일로 트집을 잡혀 일생에 걸쳐 여러 번 곤욕을 치렀을 정도다.

소수서원, 병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명한 서원들 중 상당수는 불교의 사찰을 빼앗은 자리에 세워졌다. 소수서원의 앞뜰에는 여전히 무너진 석탑의 기단과 부서진 석등이 뒹굴고 있다.

오늘날 민중을 계몽하려 드는 지식인의 마음도 조선왕조 초기 타락한 불교의 폐단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삼강오륜의 유교 교리로 민중을 계몽하며 사찰을 때려 부수던 선비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21세기에 이른 오늘날 서구 중심의 지식인상도 마찬가지다. 금세기 초까지도 식인풍습이 남아있던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원주민의 악습을 교화하던 선교사들의 찌푸린 그 얼굴이 아직도 펴지지 않았다.

하회탈을 주의 깊게 본 적이 있는지. 양반탈은 해학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비해 선비탈은 사납게 인상을 쓰고 있다. 그 표정이 무섭다. 옛 시골의 무지렁이 백성들이 유교 선비들을 무서워했던 거다.

선비탈의 그것이 서구의 진보주의가 말하는 비판적인 지식인상이다. 드라마 황진이가 비판적 지식인상의 벽계수를 비판하고 민중의 마음과 소통하는 이상주의적 지식인상의 서화담을 추켜세우는 뜻이 거기에 있다.

시성(詩聖) 두보와 시선(詩仙) 이백. 천하를 근심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성 두보의 마음은 아름다우나 민중의 마음과 거리가 멀다. 인간의 세속을 떠나 초인이 되기를 원했던 시선 이백의 마음이 오히려 민중과 가깝다.

불교를 공격하고 민중을 계몽하던 조선 초에는 두보형 지식인이 많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점차 이백형 지식인이 많아졌다. 율곡과 퇴계는 두보에 가깝고 추사와 다산은 이백에 가깝다. 더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지식인이라고 하면 어떤 얼굴을 떠올리는가? 왜 서구의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짓고 있는가?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식인상은 웃음과 해학이 끊이지 않는 이백형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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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가 보급되자 소통의 속도는 급격히 빨라졌다. 그러나 아뿔싸! 라틴어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세계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기는커녕 성경은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오히려 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기어이 바벨탑이 무너진 셈이다.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백 년 동안 전쟁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어느 면에서 보면 활판인쇄술의 발명이야말로 인류의 큰 재앙이었던 것이다.

산업화도 마찬가지다. 산업화가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시스템으로 통합하게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마르크스의 컨버전스 발상이다. 그러나 세계사는 거꾸로 민족주의라는 디버전스로 흘러가고 있다.

컨버전스는 짧고 디버전스는 길다. 오늘날 공병호 등 내로라하는 꼴통들이 숭상하는 영어의 세계지배는 컨버전스 단계의 흐름이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은 거꾸로 한자문화권의 활력을 부활시키고 있다.

한자 타자기가 없어서 애먹던 중국인들이 컴퓨터 덕분에 입력의 편리함을 얻었다. 한자뿐 아니다. 인터넷 덕분에 모든 소수민족이 자기네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보급할 획기적인 수단을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를 혁명하겠다는 마르크스의 발상,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히틀러의 발상, 도량형을 통일한 진시황의 발상, 미터법을 전파한 나폴레옹의 발상은 공통점이 있다. 컨버전스에의 집착이다. 그 환상 버려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는 짧은 컨버전스의 시대를 끝막고 금방 디버전스로 나아간다. 이론으로 보면 항상 컨버전스가 먼저 온다. 계몽이 먼저 온다. 표준의 제시가 먼저다. 그러나 그 붐은 오래가지 않는다.

MS가 윈도 95로 표준을 제시했지만 이후 10년째 활약이 없다. 그 많은 MS의 연구원들이 그 비싼 연봉을 받고도 도무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컨버전스는 언제나 잠시 반짝이었다.

인터넷은 세계주의 컨버전스와 민족주의 디버전스 경향을 동시에 가진다. 프리허그나 플래시몹과 같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뜨면 단 하루 만에 전 세계 수십억 네티즌의 눈으로 퍼져 나간다. 이건 컨버전스다.

그러나 네티즌 댓글족들은 오늘도 민족주의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다. 블로그로 까페로 동아리로 갈라져서 군웅할거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춘추전국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이건 디버전스다.

컨버전스와 디버전스가 충돌하는 이유는 소통의 양식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대가가 나타나 양식을 완성하고 새로운 소통의 전범을 제시할 때 싸움은 멈추어진다. 따로 또 같이 공존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식인이 역할 할 데다. 그러한 이치를 깨우친 사람이 추사요 다산이요 동파요 화담이다. 이는 서구정신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상이 아닌 이상주의적 지식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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