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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7528 vote 0 2008.12.30 (23:09:27)

 

살어리 살어리랏다

진보가 위기다. 진보의 위기는 이상주의 위기다. 이상주의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이상주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진보가 구심점을 잃고 민중의 마음과 멀어져서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진보가 있기에 앞서 이상주의가 먼저 있었다. 이상주의 총론에 각론을 더한 것이 진보주의다. 이상주의라면 유토피아관을 말할 수 있다.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에는 어떤 형태로든 유토피아관이 존재한다.

일찍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있었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니 이것이 유토피아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15세기 이래 르네상스 운동과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이면에는 당시 붐을 이루었던 유토피아론의 역할이 있다.

여러 형태의 유토피아가 있다. 밀턴의 실낙원은 에덴동산 개념에서 파라다이스를 그리고 있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샹그릴라도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에겐 우리식 유토피아가 있다. 중국에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있고 한국의 고려가요에 청산별곡이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바로 그것이다. 고려인의 유토피아관이 반영되어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말하고 싶어 하는 ‘산 뒤에 있는 그리운 것들’에는 그의 소박한 유토피아관이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숨어 있다. 이외수가 다목리에 꾸미려 하는 것도 하나의 작은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스타’는 강원도의 소도시 영월을 배경으로 남성들만의 작은 유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니다. 의외로 이상주의는 우리 가까운 곳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

유토피아는 모든 영감(靈感)의 원천이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작가의 심중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의 이상주의로부터 아이디어를 조달한다.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이상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참으로 가난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작가도 창의할 수 없다. 아이디어가 샘솟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가졌는가? 당신의 샹그릴라는 어떤 것인가?

어린이에겐 동화책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오즈의 마법사나 미하엘 엔데의 모모나 아라비안나이트나 다 나름대로 소박한 유토피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인성(人性)의 씨앗이 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상상력의 씨앗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어느 구석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점차 자라나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향기를 전할 때 그대의 인간성을 오롯이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주의는 유토피아를 잃어버렸다. 진보의 출발점이 유토피아인데 출발점을 잃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창한 이래 리얼리즘이 득세하면서 진보는 유토피아를 잃고 왜소해졌다.

무슨 일이든 근본이 중요한 법이다. 그런데 근본을 잊었다. 원천을 잃어버렸다. 아이디어가 샘솟던 상상력의 샘이 말라버렸다. 비단옷 입고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렸다. 길은 떠나왔는데 떠나온 목적을 잊어버렸다.

유토피아는 비현실적이다. 눈앞의 승부에 집중하려면 현실문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단기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비현실을 부정한 결과 진보는 유전적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장기적으로 위험을 헤지(hedge)해야 한다. 수출기업이 환율변동의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달러를 유로로 바꾸는 판국이다. 어느 한 가지 종목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분산투자 해야 한다.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유전적 다양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진보주의는 마르크스주의라는 하나의 방법론에 올인한 결과로 전략적 유연성을 잃어버렸다. 냉전해체와 신자유주의라는 지식의 빙하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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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이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상이 현실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이상의 존재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것이다. 이상을 무리하게 현실과 접목시키려 하기 때문에 도리어 실패하게 된다.

근대는 대탈주였다. 기독교가 그어놓은 금제의 울타리를 넘어 일제히 달아난 것이다. 왜? 누군가가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토피아다. 지리상의 발견, 원양항해, 신대륙 진출이 모두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자 천국이라는 상상력의 울타리가 파괴되었다. 그들은 천국이 하늘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대륙이나 동양의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일제히 탈주를 벌인 결과 근대가 촉발된 것이다.

공자는 요순시대라는 이상향을 제시했다. 기독교가 천국이라는 울타리로 묶어버렸듯이 공자는 주나라의 왕도정치라는 울타리로 묶어버렸다. 불행하게도 중국사에는 한 명의 토마스 모어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왕도정치라는 공자의 울타리 안에 얌전히 갇혀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상해내지 못했다. 상상하지 않으니 모험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열정이 죽어버렸다. 탈주를 벌이지 못했다. 근대를 만나지 못했다.

이상주의는 리얼리즘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 왜 현실적인지 이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인가? 내가 어떤 이상향을 상상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엘도라도를 상상하는 사람과는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다. 샹그릴라를 상상하는 사람과는 티벳 오지 트레킹에서 만난다. 청산별곡을 노래하는 사람과는 자연 속의 작은 풀꽃마을에서 만난다.

내가 어제 어떤 유토피아를 가슴 속에 품었느냐에 따라 오늘 어떤 사람을 사귈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주의는 리얼리즘이다. 일생을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오늘날 종교가 가진 권력의 절반도 가지지 못한 지식 집단의 참담한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왜 맹랑하기 짝이 없는 종교 따위에도 밀리고 있는가? 진보가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진보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전술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천국이라는, 유교가 요순시절이라는 하나의 유토피아를 고집하다 왜소해진 것과 같다.

매일 아침에 밥을 먹듯이 이상주의라는 정량의 꿈을 섭취해야 한다. 나의 일생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기 위해서는 꿈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진보를 하나의 방향으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이상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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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는 무능한 유비가 주인공이고 유능한 조조가 악역이다. 조조가 뛰어난데 왜 유비가 주인공인가? 독자들은 역사 속의 실존인물 유비나 조조의 업적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를 평가한다.

유비 삼형제가 도원에서 맺었던 맹세는 현실적이다. 왜인가? 그 소설의 독자들도 그들처럼 맹세하고 싶기 때문이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얻었듯이 그들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조조로부터는 민초가 배울 것이 없다.

생각하라. 본받아 얼마나 많은 도원결의와 삼고초려가 이루어졌겠는가를. 유비 삼형제의 우정은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있다. 제갈량의 삼고초려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이야기다. 너무나 현실적이다.

이건 역사가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이다. 왜 민중의 삶과 밀접한 미학의 관점을 팽개치고 권력의 관점만을 강요하는가? 진보주의가 인문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 기술의 혁신에 충격 받은 나머지 진짜를 잊어버렸다.

우리가 수호지나 임꺽정이나 홍길동전을 읽을 때 그 안에 감추어진 이상주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의 일로 착각하는 사람은 없다. 임꺽정은 영웅이 아니라 산도적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독자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 일각의 계몽주의는 어떠한가? 그들은 비뚤어진 시선으로 감시한다. 독자들이 소설 속의 가상세계를 현실로 착각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독자들이 임꺽정이나 홍길동을 본받아 도둑이 되지 않을까 경계한다.

천만에! 독자들은 청석골의 이상주의나 율도국의 이상주의를 빌릴 뿐이다. 그 작은 이상향의 설계과정에서 민중이 스스로 자기 내부에 질서를 부여하며 나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본받을 뿐이다.

그들이 비록 현실에서 용납될 수 없는 도둑이라 해도 가슴 속에 품었던 이상주의는 얼마든지 유효하다. 네티즌들은 오늘도 사이버 청석골을 꿈꾸고 인터넷 율도국을 꿈꾼다. 우리들만의 작고 빛나는 공동체를 꿈꾼다.

인생에서 얻는 것은 하나뿐이다. 기다려야 할 신통한 소식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가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이며 누가 그 길을 안내할 것인가? 그래서 세상에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당신은 어디서 누구를 만나기 원하는가? 백화점에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박물관에서 만나는 사람이 예쁘다.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증권사 객장에서 만나기보다는 진동리 산골마을에서 만나기 원한다. 그렇지 않은가?

진정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맺어주는 일은 예술가의 몫이다. 60억 인류에게는 60억 가지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각자에게 각자의 이상주의를 찾아주는 일이 시인과 철학자와 예술가의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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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는 인간적이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정직하고 용기 있는 리얼리스트였다. 이백은 엉뚱하게도 인간의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방랑자였고 공상가였다. 모험가였고 로맨티스트였다.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인가? 민중의 마음으로 보면 현실을 떠나 꿈을 꾸던 이백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두보가 거꾸로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은자의 동굴 속으로 도피해 버린 셈이다.

왜인가? 그에게 시의 미학이 있되 삶의 미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보의 미학은 시 속에 숨어 있다. 이백의 미학은 삶 속에 녹아있다. 삶으로 체화되어 있다. 이백의 미학은 행동하는 미학이다.

이백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고 소설이고 시고 영화다. 무엇인가? 인식이 판단을 유도하고 판단은 행동으로 전개된다. 두보는 인식에 머물렀을 뿐 판단과 행동으로 전개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양식을 낳지 못했다.

미학이란 만나고 사랑하고 소통함에 있어서의 양식이다. 이백은 그의 삶 그 자체로 우리가 낯선 사람과 만나 서로 인사하고 긴장을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모든 예술은 낯선 세계와 만나 긴장을 풀고 어깨동무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한 잔의 커피가 그러하고, 한 곡의 음악이 그러하고, 한 줄의 시가 그러하고, 한 편의 영화가 또한 그러하다.

만약 시가 없다면, 음악이 없다면, 영화가 없다면,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낯선 사람과 인사하지 못한다. 서먹서먹해진다. 고양이처럼 도사리고 앉아 서로 노려보다가 끝내 등을 돌리고 헤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고양이처럼 노려보지 말고 개처럼 친해져야 한다. 두보가 위대한 것은 인식이 행동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이백이 친숙한 것은 그 인식이 판단과 행동으로 최종 완결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한 줄에 꿰어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이백은 삶이 곧 음악이고 시고 그림이고 소설이고 드라마다. 섬진강 김용택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화다. 다목리 이외수의 삶 또한 그대로 소설이고 드라마다.

이상주의가 리얼리즘이다. 서구의 지식인상은 이상주의를 잃었다. 창백한 지식인 두보가 있되 너털웃음 이백이 없다. 엄격한 선생님 퇴계가 있되 해학의 방랑자 김삿갓이 없다. 그다지 아름답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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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두 가지 형태의 이상주의가 있어왔다. 카오스와 코스모스다. 니체는 코스모스를 숭상하는 아폴론의 이상과 카오스를 숭상하는 디오니소스의 이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 정신의 부활이다. 그리스적인 것은 무엇인가? 비너스상의 황금비례 팔등신으로 대표되는 기하학적인 질서다. 파르테논 신전에 늘어선 열주와도 같은 그것은 스파르타 군대의 질서다.

아테네의 자유분방함은 다르다. 두 가지 그리스 정신이 있다. 스파르타의 그리스와 아테네의 그리스가 있다. 문제는 오늘날 서구정신이 스파르타의 그리스를 살려내되 아테네의 그리스를 부활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로마가 무력으로 그리스를 제압하면서 앞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스파르타의 강(剛)을 배우되 아테네의 유(柔)를 배우지는 못하였다. 아폴론을 배우되 디오니소스를 배우지 못하였다. 불완전하다.

그리스가 불과 몇십 년 만에 전 세계에 전파했던 것을 로마는 천 년을 지배하고도 전파하지 못했다. 양식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은 널리 인류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유혹하지 못한다.

르네상스는 신(神)의 얼굴을 한 기독교를 극복하고 보다 인간적인 그리스를 부활시켰으나 여전히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붙잡혀 있다. 그들의 회화는 소실점이론과 같은 기술적 혁신들을 캔버스 위에 반영하지 못해 안달 난 듯이 보인다.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관객들 역시 그림에서 뭔가를 배워야만 흡족해한다. 그 작품을 낳은 화가의 마음을 짚어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림 속의 소재와 구도와 테마에 주목할 뿐이다.

고갱이 남태평양 타이티 섬으로 떠난 것이 그 때문이다. 이론적이고 도식적이고 권위적인 사실주의 사조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고갱 역시 저항했을 뿐 그 반대편에서 양식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서구의 미학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질서의 논리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 석가탑의 엄격함이 강조될 뿐 다보탑의 풍성함이 없다. 자기 마음속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는 동양화와 다르다.

그들의 그림은 혼이 없는 그림이다. 인간이 아닌 로봇의 그림이다. 그들은 창조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틀로 찍어내는 장인이다. 고객의 주문에 응하여 작품을 생산할 뿐 자기 마음을 담아내려는 주체적인 의지가 없다.

소실점을 찾는 관객의 시점(視點)을 반영할 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觀點)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색채의 기교에 치중할 뿐 화가가 가진 안목의 차별화가 가능하지 않다. 남종화의 깊은 경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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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두 날개로 난다. 진보와 보수의 날개가 아니다. 보수는 날개가 없다. 역사의 두 날개는 둘 다 진보의 날개다. 이상주의가 둘이므로 날개가 둘이다. 인식의 진보와 행동의 진보라는 두 날개다.

● 지식은 인식의 진보로 난다. ≫ 대중은 행동의 진보로 난다.

환경과 인간이 인식으로 맞서 판단으로 유도하고 행동으로 전개한다. 지식인이 주도하는 인식의 날개와 대중이 주도하는 행동의 날개가 있다. 둘 사이에 판단이라는 밸런스의 축이 있다. 그리고 변증법적인 순환을 반복한다.

역사는 공자의 이상과 노자의 이상으로 난다. 두보의 날개와 이백의 날개로 난다. 아폴론의 날개와 디오니소스의 날개로 난다. 코스모스의 날개와 카오스의 날개로 난다. 질서의 날개와 가치의 날개로 난다.

주류의 진보와 비주류의 진보가 있다. 메인스트림의 진보와 아웃사이더의 진보가 있다. 도시민의 진보와 부족민의 진보가 있다. 스파르타의 진보와 아테네의 진보가 있다. 전자가 먼저 지평을 열고 후자가 마침내 양식을 완성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클래식과 팝,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북종화와 남종화, 교종불교와 선종불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석가탑과 다보탑, 강(剛)과 유(柔), 계몽과 소통은 역사이래 경쟁해온 진보주의의 두 축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가치다.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가 있다. 가치가 본래 둘이므로 날개도 본래 둘이다. 하나는 힘이고 둘은 미다. 전자는 힘으로 계 내부에 질서를 부여하고 후자는 멋으로 외부와 관계를 맺는다.

역사는 힘의 논리와 미의 논리, 질서의 논리와 가치의 논리, 문제해결의 논리와 동기부여의 논리, 중심부의 논리와 주변부의 논리라는 두 수레바퀴 사이에서 반복되는 변증법적 대결과 그 선순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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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래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이론, 새로운 기술, 새로운 미디어가 나타나면 아폴론의 이상, 공자의 이상, 두보의 이상이 앞서가며 길을 연다. 그러나 양식화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곧 한계에 봉착한다.

이상주의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려면 양식화에 성공해야 한다. 불교사상은 불교미술의 양식과 함께 전파되고 기독교사상은 기독교 미술의 양식과 함께 전파되고 마르크스주의는 리얼리즘과 함께 전파된다.

공자가 창안한 이론보다 공자가 체계화한 양식이 먼저 전파된다. 그것이 공자의 예(禮)다. 공자는 인의(仁義)라는 유교사상을 예법이라는 상나라 문화의 수레에 실어서 운반했던 것이다. 양식이야말로 사상의 운반체다.

왜 마르크스는 실패하였는가? 마르크스가 창안한 사회주의자의 생활양식이 기독교 양식의 삶을 대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왜 리얼리즘은 실패하는가? 사실을 인간에 우선하는 리얼리즘이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정작 자기가 만드는 자동차를 타지 못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이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의 요청을 따를 뿐이라면 그것이 곧 인간소외다.

사실주의는 그림이 나타내는 주제가 그리는 화가의 마음에 앞선다. 그렇게 화가를 소외시킨다. 화가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은 그림은 진짜가 아니다. 화가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 있지 않은 그림으로는 소통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북종화는 남종화에 패배해 왔다. 남종화에는 삶과 문화가 반영되어 있지만 북종화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북종화는 계몽하기 위한 관제미술이다. 남종화는 소통하기 위한 대중미술이다.

북종화는 사실주의라면 남종화는 표현주의다. 북종화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이 걸려있는 건물의 용도를 안다. 건물이 주인이고 그림은 장식에 불과하다. 남종화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소장한 애호가의 인격을 안다.

남종화는 사랑방에 걸려 그 그림을 감상하려고 방문하는 손님의 마음을 끈다. 사람이 주인이고 그림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의 매개가 된다. 그렇게 소통이 진짜다. 삶이 진짜이고 표현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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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고갱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이면서도 경쟁자였다. 둘은 진정한 친구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팠다. 특히 고흐는 명망가에 지식인이었던 고갱 때문에 상처 입었다.

문명을 비판하는 칼럼을 기고하여 먼저 유명해진 사람은 고갱이지만 그 그림에 화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데 성공한 사람은 고흐다. 고갱은 타이티 사람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렸지만 고흐는 자기 마음을 그려냈다.

고갱과 고흐가 두 달간 동거하며 그렸던 지누부인의 초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같은 모델을 두고 완전히 다르게 그린 것이다. 고흐의 지누부인은 탁자 위에 낡은 책을 펼쳐놓고 고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건 가짜다. 그녀는 술집 주인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모델을 부탁하자 정숙한 귀부인의 옷을 입고 낡은 책을 펼쳐놓고 숙녀의 포즈를 취한다. 이를 두고 고갱이 고흐를 호되게 비판했음은 물론이다.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카페는 솔직하다. 탁자 위에는 싸구려 술병이 놓여 있다. 뒤에 모여서 떠들고 있는 사람은 창부와 집배원과 그 거리의 사람들이다. 고갱의 그림이 더 그 거리의 실상에 가깝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관객이 얻고자 하는 것은 아를 거리의 실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관객은 언제라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관객은 객(客)이지만 주(主)가 되고 싶다.

고흐는 그 방법을 알려준다. 고흐의 그림에는 여인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탁자 위에 펼쳐진 책이 나타내는 것은 지식을 동경하는 그 여인의 마음이다. 관객은 고흐의 그림을 매개로 타인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다.

관객은 그림을 통하여 타자와 소통한다. 청중은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시청자는 드라마를 통하여 소통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극 중에서 이야기한 그 대사를 인용하며 친구와 수다를 떤다. 그렇게 관객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

고갱의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마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 관점(觀點)이 없고 시점(視點)이 있을 뿐이다. 단지 그 시대 그 마을 사람의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누가 그거 알고 싶댔나?

알려주는 그림이 아니라 유혹하는 그림이 진짜다. 고흐의 그림 값이 비싼 이유는 관객을 유혹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소장가는 고흐의 그림을 매개로 누군가의 마음을 초대하고 싶은 것이다. 이게 진짜다.

무언가 알려주려고 하는 계몽주의는 가짜다. 알려주는 것이 곧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는 주가 되고 배우는 자는 종속된다. 지식은 교육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소통이 진짜다. 사람은 단지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매개로 삼아 자기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진정 원하는 것은 소통이다. 지식은 소통을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

베토벤을 듣는 사람과는 어깨를 기대고 함께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모차르트를 듣는 사람과는 손잡고 함께 정원을 거니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국 그렇게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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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진보는 이상주의가 있고 보수는 이상주의가 없다. 진보는 두 날개가 있고 보수는 한 날개도 없다. 그들은 기생한다. 진보는 스스로의 이상으로 살고 보수는 진보의 실패에 빌붙어 기생한다.

반미든 반북이든 반일이든 무언가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이상주의는 그 무엇도 반대하지 않고 스스로의 빛으로 유혹한다. 이상주의는 햇볕을 반사하는 달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태양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를 가져야 한다. 당신은 도무지 어떤 매력으로 타인을 유혹하고자 하는가? 당신의 심중 깊은 곳에 있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인가? 각자는 각자의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사랑은 가능하다.

공자는 도시사람이 예(禮)로 공존하는 이상을 만들었고 노자는 시골사람이 도(道)로 소통하는 이상을 만들었다. 예는 가까이서 마주친 타인을 배려함이고 도는 멀리서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공자의 이상은 도시 사람이 만원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움이고 노자의 이상은 시골사람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사립문까지 뛰어가서 환대하는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이 이문열을 따 시키는 것은 그에게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환대하는 노자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고 이외수의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그에게 누구에게라도 문을 열어놓는 노자의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오직 진보뿐이다. 보수는 지향하는 가치가 없다. 보수는 무언가를 반대하는 방법으로만 존립한다. 어떤 이상주의든 당신 마음속 깊숙한 곳에 품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진보로 귀결된다.

물고기는 꼬리를 왼쪽으로 치든 오른쪽으로 치든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당신이 어떤 이상주의를 가지든 타인의 이상주의와 맞물리면서 전진하는 추력을 얻는다. 그대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역사의 진보로 귀결된다.

비참한 것은 꿈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이상을 좇는다. 미국의 이상을 좇고 일본의 이상을 좇고 유럽의 이상을 좇는다. 자기 심중에 품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뻐꾸기 알을 키우는 개개비 신세다. 키워봤자 제 자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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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제 1장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 김동렬 2008-12-30 6334
24 깨달음 소통 현대성 김동렬 2008-12-30 6751
23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8-12-30 10002
22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김동렬 2008-12-30 8337
21 깨달음 - 우주와의 합일 김동렬 2008-12-30 6841
20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기 김동렬 2008-12-30 5522
19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김동렬 2008-12-30 5301
18 낳음이 희망이다 김동렬 2008-12-30 5163
17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8-12-30 7455
16 왜 직관이어야 하는가? 김동렬 2008-12-30 6133
15 ----- 제 2장 이상주의자가 되라 ----- 김동렬 2008-12-30 5665
14 참된 지성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8-12-30 6797
» 살어리 살어리랏다 김동렬 2008-12-30 7528
12 섬진강 김용택 다목리 이외수 김동렬 2008-12-30 5993
1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김동렬 2008-12-30 6814
10 가치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8-12-30 9489
9 ----- 제 3장 학문의 역사 ----- 김동렬 2008-12-30 5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