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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993 vote 0 2008.12.30 (23:08:05)

 

섬진강 김용택 다목리 이외수

“돼지를 묶을 때부터 고기를 나눌 때까지 사사건건 참견하며 입으로만 감놔라, 배놔라, 틀렸다, 그렇게 하면 되간디, 거긴 아니여(중략)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일하는 사람의 부아를 돋우고 약을 올리는 이가 한두 분쯤 어느 마을에든 있다.”

“길가에 난 풀을 베거나 동네 앞길 청소할 때(중략) 빗자루만 들고 왔다갔다 하거나 낫들고 풀 한주먹 베어 들고 그 풀을 끝까지 들고 다니면서 자기가 가장 동네를 생각하는 것처럼 입으로만 온갖 일을 참견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동네마다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분이 진메에도 있다.”

어이쿠! 이렇게 까발려놓고 수습이 되려나.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를 읽다 말고 하늘 한번 쳐다본다. 이쯤 되면 책갈피 끼워놓은 채 커피라도 한 잔 타 와야 한다.

이웃에 사는 동네 어른을 욕하고 있잖은가. 독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기어코 일은 저질러졌다. 김용택 시인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는 더 지켜볼밖에.

“돼지를 잡아 묶을 때 동네 사람들 뒷전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일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간섭하고 시비걸고 찍자붙고 탓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돼지 발목을 그렇게 묶는 것이 아니여, 저울추가 그렇게 밑으로 가면 되간디. 헤리고만 아니 세고만, 물이 안뜨겁고만.”

“자기가 아니었으면 돼지가 살아서 도망을 가기라도 할 것처럼, 자기가 아니었으면 돼지고기가 닭고기로 될 것처럼(중략) 시종일관 따라다니며 큰소리치고 비웃는 사람, 그래서 동네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핀잔받고 욕을 얻어먹는 사람... 그분이 바로 문계선씨다.”

이렇게 얄궂은 글을 써 놓고는 진메마을 문계선씨 사진을 떠억 실어놓았다. 한 편의 서스펜스 영화를 보듯 손에 땀을 쥐는 기분으로 읽게 된다. 멋진 반전으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데 어떻게 수습하지?

“돼지를 잡는 일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칼날이 번득이고 피가 낭자하고 돼지의 몸이 하나하나 해체되는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판에 아무 소리도 없이 숨을 죽이고 피와 칼에 잘리운 돼지의 몸을 보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다. 그 침묵과 공포의 시간에 죽음을 살려내는 이가 바로 그분인 것이다. 으스스한 죽음의 판을 말로 살려내어 살판으로 만들어내는 분 그분을 나는 마을의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최상의 찬사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다. 예술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의 책 한 권을 통째로 다 인용하고 싶지만 실례가 될 것이므로 이 정도로 줄인다.

두 얼굴의 문계선씨가 있다. 온갖 트집을 잡는 훼방꾼 문계선씨가 있는가하면 마을의 예술가 문계선씨도 있다. 극에서 극이다. 남극의 문계선씨와 북극의 문계선씨다. 그 사이의 넓은 중간지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 넓은 중간지대에 관한 것이다. 낱낱이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대비시켜 보이는 방법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또한 교보재로 맞춤인 이문열 대인(大人)을 동원할밖에.

이문열이라면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이문열의 글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비열한 사기꾼이 있다. 온갖 속임수로 어리석은 추종자들을 속여먹다가 막판에 감옥에 가거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 비열하고 악랄한 사기꾼이 있다. ≫ 그는 구세주처럼 행세하고 어리석은 대중은 그를 추종한다. ≫ 그 사기꾼은 자칭 민주투사, 진보, 운동권이다.

이것이 이문열 공식이다. 비유로 말하면 이문열의 모든 글은 진메마을 문계선씨에 대한 비난이다. 어린 시절에 마을마다 꼭 한 사람씩은 있기 마련인 경북 영양 어느 시골마을의 문계선씨에게 조롱당하고 트라우마에 걸려버렸나.

‘사회에는 질서가 있다. 국가에는 법과 제도가 있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무질서는 악(惡)이며 질서를 어기는 자는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문열은 뇌구조는 대략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진메마을의 훼방꾼 문계선씨를 잔뜩 욕해놓고는 돌연 마을의 예술가라고 추켜세운다. 그는 인생의 역설을 아는 사람이다. 새옹지마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가 똑 부러지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느냐다.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느냐다.

교과서에서 읽은 김동인의 ‘붉은산’을 연상시킨다. 정익호는 삵으로 불린다. 진메마을의 문계선씨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정도이지만 삵은 수준이 다르다. 투전과 싸움과 행패로 날밤을 새운다.

삵이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은 없다. 그는 완벽한 마을의 기생충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마을마다 꼭 하나씩 있다. 김용택 시인도 어려서는 문계선씨를 미워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분도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동네에서 돼지를 잡을 일이 별로 없고 잡는다 해도 두어 사람뿐이니 그분이 끼어들어 잔소리할 데가 없는 것이다.(중략) 어찌 보면 돼지 잡는 일이 없어진 뒤로 동네는, 진메는 끝이 난지도 모른다.”

“죽음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타고난 솜씨를 가진 마을의 예술가 문계선씨”로 하여 김용택시인은 돼지 잡는 날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문계선씨가 없었다면 돼지는 소리 소문 없이 처리되었을 것이다.

일은 짧은 시간에 금방 끝났을 것이다. 아이들이 몰려가 구경할 새도 없이 말이다. 김용택 시인의 머릿속 깊은 곳에 돼지 잡는 날의 풍경이 새겨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 판이 아니라 죽을 판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쉬다가 이 글을 끝맺는다. 해가 졌다.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를 덮자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강물 흐르는 쪽으로 걷는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걷는다. 단순한 고요의 절정이다.”

돼지 잡는 이야기 하다가 뜬금없이 흰옷 입은 할머니는 또 왜 나와? 돼지 잡는 날의 시끌벅적한 도떼기판에 느닷없이 푸른 산에 고요의 절정이라구? 아뿔싸. 그렇다면, 무언가 있다.

돼지 잡는 이야기와 김용택 시인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에서 돌아와서 쓴 맺는 글 사이에는 커다란 여백이 있다. 하늘만큼 크고 땅만큼 넓은 여백이다. 필자는 그 여백에 가려진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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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졌다. 패배는 예고되어 있었다. 월남전 패배의 교훈이 멀지도 않다. 그런데 왜 그는 어리석게 전쟁을 결정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멍청이니까. 그는 오판한 것이다. 멍청이가 멍청이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이 전부일까? 단지 오판했기 때문일까? 역사의 숨은 함수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친 부시 때리기, 네오콘 때리기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있다. 진짜 나쁜 건 사태를 방조한 미국 유권자들이다.

냉전에서 승리하고 오만해진 그들이 내친걸음에 전쟁이라는 사치를 결정한 것이다. 어리버리 부시는 그 흐름에 등 떠밀려 얼떨결에 총대를 멘 것이다. 바보처럼 말이다. 바보니까 말이다.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승자들은 열국의 제후를 소집시켜 놓고 회맹을 했다.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뽐을 내는 것이다. 냉전의 승자인 미국은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만만한 넘 혼내주기로 자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천 년 전 아즈텍과 마야의 정글 속에서는 산 사람의 심장이 도려내졌다. 아메리카 정글 속 태양의 신전에서 있었던 야만이 21세기 이 문명시대에 또 반복된다. 왜? 전쟁이야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니까.

미국이 나쁘지만 그런 미국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역설적으로 부시와 네오콘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으로 나타난다. 골수친미 김민웅이 대표적이다. 프레시안은 네오콘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미국을 변호한다.

진실을 말하자. 부시와 네오콘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문제고 21세기가 문제다. 21세기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이 문제다. 정확히 말하면 근현대사를 주도하고 있는 서구 기독교문명의 몰지성적 전근대성이 사고를 친 거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슬픔이 진행될 동안 세계의 지성은 무엇하고 있었나?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부시 원숭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부시 하나도 설득하지 못한 촘스키가 문제라는 거다.

책임을 물을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원숭이에게 책임을 묻겠다면 허무하다. 부시를 설득하지 못한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왜 그들은 다수의 미국 유권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잃었나?

왜 그들은 미국 유권자의 반지성주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나? 왜 그들은 그다지도 무력하다는 말인가?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지성이 문제다. 지성의 설득력이 문제다. 신뢰가 문제다.

이 세계에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지성이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지식인들은 여전히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다.

60억 인류가 나아가는 길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들은 모르고 있다. 전모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지적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은 계몽하려는 태도에 있다. 무리가 큰길을 가는데 길 밖으로 삐져나가는 어린 양들이 있다. 이문열 부시들은 그 어린 양이 못된 사탄의 꾐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탄을 향해 눈알을 부라린다.

반면 김동인은 길 잃은 삵을 옹호한다. 삵은 도시의 질서에서 벗어난 원시의 사람이다. 복종하는 질서가 없는 대신 맞서는 가치가 있다. 시스템에 얽혀있지 않으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바꿀 수 있어야 진짜다.

김용택 역시 문계선씨를 옹호한다. 문계선씨도 무리들 사이에서 송곳처럼 삐져나온 한 사람의 어린 양이다. 문계선씨는 늘 사고를 치지만 자신이 벌여놓은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름답기 때문에 진짜다.

김용택 본인도 대열에서 삐져나가 섬진강 가에 외따로 있다. ‘너희들이 인간을 알어?’ 하며 그 강변에서 소리를 지른다. 이외수도 다목리 산골로 숨어들었다. 김용택과 이외수, 나는 그들을 이 시대의 부족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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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워드포드의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는 이 문제를 논하고 있다. 워드포드에 의하면 역사는 도시민과 부족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한다. 부족민은 몽골족이나 훈족과 같은 도시 주변의 유목민들이다.

또 그들은 수렵 채집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이다.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거나 캐나다의 이누이트족이거나 남아프리카의 부시맨이거나 피그미족이거나 아마존의 야노야미족이거나 호주의 애보리진들이다.

도시에도 부족민이 있다. 그들은 서울역 지하보도에 산다. 노숙자들이다. 중요한 점은 21세기 현대문명이 아니 서구 기독교문명이 후세인이나 빈 라덴이나 김정일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울역 노숙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다. 그들을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기는 난망이다. 논하려는 바는 그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며 무리하게 그들을 돌려보내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노숙자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미국에도 있다. 그 어떤 훌륭한 선진국도 노숙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선진국일수록 더 노숙자와 잘 공존한다. 그들은 얼굴 찌푸리지 않고 잘도 적응해낸다.

무엇인가? 서구중심 기독교문명은 부족민과의 싸움에서 패퇴하고 있다. 그 패배가 이유 있는 패배임을 말하고자 한다. 삵을 옹호하고 문계선씨를 이해하는 동양정신의 대안에 진정한 해결의 답이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부시야말로 부족민 세계의 족장이다. 도시민 촘스키가 부족민 부시를 설득하지 못한다. 보라! 촘스키의 지지자들은 뉴욕이나 LA에 살고 있다. 부시의 동맹자들은 텍사스 사막 근처에 살고 있다.

주변부 비주류들이 부시를 편들고 중심부 주류는 힐러리 편에 선다. 이건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21세기 이 문명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시스템에 얽혀 보폭이 좁아진 지식인과 자기 세계를 가진 자유민의 대립이다.

조중동과 재벌, 강남기득권이라는 주변부 권력이 참여정부라는 중심부 권력과 각을 세운다. 마찬가지로 텍사스라는 주변부 권력이 부시를 족장으로 뽑아 촘스키가 대표하는 뉴욕의 중심부 권력과 각을 세운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이라크 부족민 대 텍사스 부족민의 전쟁이다. 후세인 앗틸라 대 부시 크레이지호스의 전쟁이다. 야만과 야만의 충돌이다. 도시의 문명인 촘스키는 그 전쟁을 말리려 했으나 무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전에 소통의 단절이 문제다.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는 앗틸라의 말발굽 앞에서 도시의 교부와 철학자들은 도무지 어떤 말로 설득하여 로마나 파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 도시가, 이 문명이 그냥 불을 싸질러서 없애버리기에는 아까운 도시라는 점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가능한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고를 논하기에 앞서 문명사회라는 시스템의 본질적 취약점이 들추어진 것이다.

선과 악의 판단으로는 해결이 난망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노숙자들은 자신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다. 소통과 공존의 방법으로만이 갈등의 해소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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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주의는 비판되어야 한다.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행태 말이다. 이문열처럼 혹은 부시처럼 선과 악 사이에 금을 딱 그어놓고 ‘요 금을 넘어가면 안 돼’ 하고 경고하며 이를 위반하면 응징하는 수법 말이다.

그런 방법이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섬진강 김용택이나 다목리 이외수는 선과 악 사이의 경계가 본래 희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외수의 장미촌은 선과 악이 뒤섞인 모호한 공간이다.

‘우리 집은 사창가 장미촌이다. 아버지는 장미촌의 악질 포주다. 악마적인 심성의 소유자인 큰형은 우리 집에 갇혀 있는 창녀들을 학대한다. 큰형이 동물과 같다면 둘째형은 식물과 같다. 착한 둘째형은 홀로 저항하다가 결국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만다. 문학을 공부하는 막내아들인 내가 이 미쳐버린 장미촌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의 방법은?’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 줄거리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한 한국은 별수 없는 사창가 장미촌이다. 오늘날 한국이 성매매대국으로 성장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어쩔 것인가?

박정희는 자기 식구를 팔아서 먹고사는 악질 포주다. 그는 월남에 생목숨 5천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했다. 사악한 조중동 큰형은 포주인 아버지를 거들어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다닌다.

식물처럼 착한 둘째형 한겨레는 미쳐버렸다. 막내아들인 내가 이 미쳐 돌아가는 나라에서 사랑하는 그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이라면 이 미친 나라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다들 미쳐 돌아가는 판에 나 혼자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할 텐가? 진정 구원은 가능한가? 부시의 방법은 간단하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 이 말은 그의 아내가 연설에서 부시의 성격을 소개하는 일화랍시고 꺼낸 유머다.

이문열의 해법도 간단하다. 나쁜 놈들은 감옥에 가두면 된다. 그래서 엄석대는 감옥으로 잡혀간다. 이문열은 제도와 질서를 믿는다. 그리고 그 질서에 순종한다. 그는 본래의 야성을 잃고 집고양이처럼 길들었다.

문제는 실패했다는 거다. 이 전쟁에서 부시는 실패했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문열도 실패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놓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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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사이의 경계는 본래 희미하다. 선이 굴러 악이 되고 악이 굴러 선이 된다. 둘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더 높은 시선을 얻어야 한다. 어질러놓고 수습하며 그 과정에서 전부를 한 줄에 꿰어내는 미학의 시선이다.

호주의 애보리진은 백인에게 얻은 옷이 삭아서 가루처럼 부서져 내릴 때까지 입는다. 세탁이라는 개념이 없다. 악취 때문에 다가갈 수 없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을 씻겨야 한다.

물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애보리진은 그 집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마른 강바닥에 노숙하다가 아침이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걷는다. 백인의 자동차에 치여 죽은 캥거루를 줍는 것으로 하루 일과는 대충 끝난다.

누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누구도 애보리진을 착한 농부로 개조할 수 없다. 그러한 노력들이 없었던 바는 아니나 대개 실패했다. 그들은 한사코 메마른 사막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도시로 이주시키면 곧 쇠약해져서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예가 많다. 그 이유도 어이없는 것이다. 도시의 벽들이 눈앞을 가로막고 줄줄이 서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거다.

사방이 확 트여있지 않은 답답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을 가두는 건물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고통이다. 이 문명한 시대에 60억의 지혜로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문제가 있다면 두 종류의 대처법이 있다. 수구의 방법은 물리력으로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히틀러 되어 죽여 버리거나 선교사 되어 세뇌시키거나 조중동 방식으로 억압하고 지배하거나다.

이라크에서 보듯이 이 방법은 한계가 드러났다. 누구도 서울역 노숙자들을 설득하거나 위협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총깨나 쓴다는 전두환도 못하고 말씀깨나 쓴다는 조용기 목사도 못한다.

좌파의 방법은 그들을 교양하고 계몽하는 것이다. 그들을 가르쳐서 문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시 실패한다. 어떠한 교육방법으로도 그들을 회유할 수 없다. 그들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부족민들인 것이다.

부족민이 있다. 문명사회의 바깥에 머무르는 원초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사고한다. 그들은 숲 속의 은자가 되거나 혹은 독립하여 소그룹의 족장이 되려고 한다.

김용택 부족민은 은자에 가깝다. 이외수 부족민은 족장에 가깝다. 춘천시절 이외수의 집은 늘 그의 부족민들로 들끓었다. 이외수의 아내는 늘 쳐들어와서 죽치고 있는 부족민들에게 밥해대기 바빴다고 한다.

따라쟁이 이문열은 이외수의 부족을 부러워했다. 그는 돈을 풀어서 인위적으로 부족을 결성하려고 했다. 부족민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인이 되고 싶어 했으나 부족원이 모여들지 않아 낭패하고 있다.

시골에서의 삶은 자체적으로 완성된다. 애보리진이 아침에 일어나 사막을 뒤져 먹거리를 구하고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각자의 채집물을 꺼내놓고 환담하며 백인에게 얻은 술 한 병을 마시고 낮잠에 빠지면 하루는 완성된다.

별이 뜨고 달이 지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자면 된다. 나무통 속의 철인 디오게네스가 부럽지 않다. 서울역 노숙자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 그리하여 김용택 시인은 말했던 것이다.

해가 졌다.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를 덮자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강물 흐르는 쪽으로 걷는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걷는다. 단순한 고요의 절정이다.”

도시민의 삶은 불완전하다. 그들의 하루는 내일을 위해 희생하는 하루다. 목표는 50년 후로 정해진다. 내 집과 내 차와 내 가족이 있어야 한다. 지위는 친구들보다 높아야 한다. 그러고는 떵떵거리며 세계일주 여행을 하기다.

도시민은 심중에 이런 그림을 하나씩 그려놓고 하루에 한 조각씩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도시민의 하루는 불완전한 한 조각의 퍼즐이다. 퍼즐의 제대로 된 완성은 50년 후에나 가능하다.

그들에게 오늘 하루의 완결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민에게는 해가 뜨고 지는 일도 없고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를 덮는 일도 없고 흰옷 입은 할머니가 강물을 따라 걷는 일도 없다.

섬진강 김용택이 본 단순한 고요의 절정 따위는 없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완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늘 불만족스럽다. 긴장과 이완의 사이클이 균일하지 않은 것이다.

수탉이 홰치는 새벽이 없고 참새가 뒤꼍에서 짹짹거리는 아침이 없고 밥 짓는 연기가 낮게 깔리는 초저녁도 없고 저녁 공기가 무거워져서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저음으로 들리는 황혼 무렵도 없다.

문명의 본질은 소통이다. 완성되어야 소통한다. 완성되어야 종은 소리를 낸다. 완성되어야 그 울림과 떨림은 전파된다. 그런데 도무지 완성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그들은 불행하다. 어쩔 것인가?

방해물은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방법이 있다. 교양하여 보다 균질화된 사회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각자의 존재와 다름을 인정하고 제각기 그 동아리 안에서 별도로 완성시킨 다음 소통하는 방법이 있다.

필자는 세 번째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수구가 쓰는 물리력의 방법도 아니고 좌파가 쓰는 계몽의 방법도 아닌 소통의 방법이다. 21세기는 진보나 보수의 문제에 부닥친 것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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