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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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107 vote 0 2008.12.30 (12:43:36)

 

● 구조론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구조론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요. 뉴튼의 고전역학 이래 최대의 지적인 도약이라고 봅니다. 


● 세상은 닫힌 계를 잘 정의해서 파악해야 한다?

닫힌 계는 중복이나 혼잡이 없이 단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입니다. 이는 역으로 우리가 많은 중복과 혼잡의 어수선한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지요.


● 닫힌 계는 무엇이나 5단계로 파악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5단계는 다섯개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의 사물을 보는 다섯가지 관점입니다. 여기서 차원개념이 반드시 수학에서 말하는 그것과 백프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본의(本意)와는 백프로 일치합니다.


● 이 구조는 반복된다?

반복됩니다. 그러나 ‘반복’이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는데 수평 공간에서의 산술적인 반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전혀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단지 패턴의 닮은 성질을 내세워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구조가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구조가 반복되는 일은 전혀 없지요. 그 보다는 ‘공유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 이로부터 연역하여 여러 가지 이론과 원리, 생각하는 방법을 찾았다.?

구조론은 무한한 확장성과 개방성을 가집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예컨대 한의학에서 말하는 음양오행이론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분야에 적용될 수는 없지요. 구조론은 문학, 음악, 예술,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응용이 가능합니다.


구조론의 핵심을 깨치지 못한 채 단지 약간의 연역적인 사고능력을 기르는데 그쳤다 해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는 수학을 배우되 미분과 적분을 깨치지 못하고 겨우 구구셈이나 배웠다 해도 실생활에 이를 응용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뉴튼의 고전역학을 온전히 이해못하는 사람도 뉴튼의 이름을 한번쯤 들은 덕분에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는 있는 것과 같지요. 구조론적인 세계관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소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의 세계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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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닫힌 계가 있는가?(즉 존재하는 것인가? 인식하는 것인가?) 인식하는 것이라면 닫힌 계 사이의 소통(에너지와 물질, 그리고 정보)은 어떻게 인식하나?

‘계’를 하나의 사건이 미치는 공간의 범위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논할 때 실제로는 별개인 여러 개의 사건을 뭉뚱거려서 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오류는 그 때문에 일어나지요. 질문과 맞지 않는 답변일 수 있지만 질문이 모호하므로 이 정도로 답변하겠습니다. 


● 열린 계는 닫힌 계들의 혼잡한 집단인가? 열린 계는 존재하는가? 인식할 수 있는가?

열린 계는 잘못 정의된 사건입니다. 실제로는 여러 사건들의 집합이지요.(존재하는가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은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질문이 모호한 데가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합니다.)


회로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회로도는 하나의 입력과 출력의 단자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의 전원으로 부터 전개된 바 하나의 입력과 출력의 단자를 가지는 구조가 닫힌 계입니다.


잘못 설계된 회로도라면 꼬마전구에 불이 켜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강력한 전기시설이 자장을 형성하고 있을 때 회로를 그 주변에서 흔들어주면 유도전류에 의해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건 안쳐준다는 거지요. 이 원리를 이용한 속임수 초능력이 텔레비젼에 방영된 예가 있지요. 맨손으로 형광등을 켜는 사나이의 속임수 말입니다.


● 왜 구조는 4개나 6개가 아닌 다섯 개의 요소로 파악되는가? 예를 들면 열역학 법칙은 2개 밖에 없는데 열역학 원리의 추상적 구조는 2개의 요소 밖에 없기 때문인가?

다섯은 원래 하나입니다. ‘요소’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는데 구조론은 하나의 요소를 가질 뿐입니다.


‘김동렬의 내가 사는 이유’에서 충분히 언급하고 있지만 구조론은 요소를 중심으로 보는 원자론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구조 중심으로 보는 관계망의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구성인자를 요소로 보는 관점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조론이 다섯개의 요소를 가진다는 이해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구조론은 요소론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구조론이라는 표현 자체가 요소론(원자론)을 반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소가 아니라 구조라는 말이지요.


예컨대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입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관점으로 보면 토지자본, 노동자본, 신용자본으로 셋 다 자본일 수 있습니다. 즉 산술적인 반복이라는 거지요. 구조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렇게 분류된 다섯은 수평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토지가 부족할 경우 동일한 토지에 노동투입량을 늘려서 토지가 많은 경우와 동일한 생산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부족할 때 토지(경작면적)를 늘려서 노동이 많은 경우와 동일한 생산량을 얻을 수 있어요. 이렇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으면 분류가 틀렸다는 거지요.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 만을 가지고 논해야 합니다.


학문은 분류로 부터 시작되기 마련이고 분류는 요소의 분류이기 쉽지요. 그게 틀렸다는 말입니다. 차원의 분류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열역학 법칙이 2개 밖에 없다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최소한 다섯개의 법칙은 찾아진다고 봅니다. 이 부분은 더 설명해야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일단 여기서 줄입니다.


● 인과율은 절대법칙인가? 상대성원리와 불확정성의 원리가 시간과 공간, 존재와 인식의 절대적 구분을 부정하면서 인과율의 절대성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 아닌가?

인과율은 절대 법칙입니다. 상대성원리와 불확정성의 원리가 공간과 시간, 존재와 인식의 절대적 구분을 부정한다는 견해는 상대성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상대성원리는 절대적으로 성립하는 절대법칙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 또한 절대법칙이지요. ‘상대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틀렸으므로 ‘연관성이론’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최근의 언론 보도가 참고가 될 수 있겠네요. ‘상대성’이라는 잘못된 번역 때문에 무수한 오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연관성이라는 표현이 좋은데 구조론이야말로 연관성을 추적해 가는 방법에 관한 이론입니다.(아래 기사 인용 참고)


● 왜 10가지 질문 (구조의 5요소 x 능동/수동)은 이분법을 택하고 있나? 이는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인데요. 디지털 시대의 이진법이 기본 문법이고 세상을 인식하는 좋은 도구임에는 틀림 없지만 님이 비판하는 이항대립적 사고와는 무엇이 다른 건지요? 0과 1사이에는 0.5가 존재하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가끔 오류로 인해 중성이 나오는데요.

능동은 있고 수동은 없습니다. 존재론은 있고 인식론은 없습니다. 여기서 ‘있다’는 ‘실재’로 있다는 말이고 ‘없다’는 관념(추상 개념)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공간은 있고 시간은 없습니다. 현재는 있고 과거나 미래는 없습니다. 실재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실재하지 않는 과거나 미래를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는? 실재하는 현재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지금을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현재를 현재라고 말해도 이미 오류가 되지요.


그 말이 듣는 사람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이미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5요소(여기서 요소라는 표현은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가 있을 뿐이며 능동은 있고 수동은 없습니다.


능동은 존재론이고 수동은 인식론인데 인식론은 인간의 관념 안에서만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능동의 5가 있을 뿐이며 그 5는 사건의 진행순서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1이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물은 ‘앞과 뒤’를 가지고 있지만 우주 공간에서 지구는 앞과 뒤가 없습니다. 앞이란 그 사물을 보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즉 그 앞이란 것은 움직이는 사물의 진행방향을 나타내거나 또는 그 사물에 접근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임의로 규정된 것이며 실제로는 앞과 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실(絲)은 길다와 짧다의 두 요소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길이’라는 하나의 요소를 가질 뿐이며, 돌맹이는 무겁다와 가볍다의 두 요소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라는 하나의 요소를 가질 뿐입니다.


본래 하나인데 왜 5로 전개하는가? 변화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5가 아니라 1입니다. 그 변화는 반드시 시간 상에서 성립하고 시간성의 개입에 의해 5로 전개하는 것이며 그 5는 인간의 인식에서의 5일 뿐입니다. 


● 구조는 왜 반복되는가? 반복의 횟수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구조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단지 공유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반복된다고 말해지는 것은 차원의 다름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손으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면 그 일이 시계 태엽의 스프링에 저장되고, 그것이 진자의 운동으로 전개하고 다시 톱니바퀴와 시계바늘의 운동으로 전개합니다.


이때 ‘태엽손잡이=용수철=진자=톱니바퀴=바늘’로 동일한 일이 5회 반복됩니다. 그러나 태엽과 용수철과 진자와 톱니바퀴와 바늘은 각각의 일을 하고 있으며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입력과 출력의 방식이 같기 때문입니다.


즉 다섯은 같은 에너지원을 공유하고 있는데 입력과 출력의 코드가 맞아야만 동력의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거지요. 그러나 조금 더 세분해서 말하면 전혀 반복되지 않습니다.(이 부분을 말하려면 이야기가 매우 길어집니다.)


예컨대 나뭇잎과 나무의 한 가지와 나무한그루와 나무뿌리는 닮은 꼴이지만 이는 수분의 전달이라는 하나의 동력원을 공유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유사성일 뿐 버섯의 갓과 그 뿌리(포자의 번식)가 외형에서 전혀 닮지 않았듯이 닮지 않은 형태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계 안에서 반복(사실은 전혀 반복이 아닌)은 5회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그 반복이 산술적인 반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술적인 반복이라면 무한정한 반복이 있을 수 있겠지요.


반복이 아님에도 반복으로 오해되는 이유는 우리가 차원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조론은 항상 차원을 말하고 있는데 점과 선과 면(구조론에서는 각)은 평면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점의 반복이나 선의 반복, 각의 반복은 반복이지만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의 비약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반복이 아니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점은 없습니다. 종이 위에 아무리 작은 점을 그려도 크기를 가지므로 돋보기로 보면 평면이고 현미경으로 보면 입체입니다. 그런데 물리적인 성질에서 점의 성질은 분명히 있습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크기를 가지지 않는 하나의 점을 기점으로 성립하고 있지요. 점은 있습니다. 여기서 점은 없다고 말했다가 또 점은 있다고 말했는데 이 차이를 설명하려면 존재론을 동원해야 합니다. 있되 독립하여 개체로 있지 않고 더 큰 것에 딸리어 그 속성으로 있다는 거지요.(존재론은 독립해 있는 것과 딸리어 있는 것을 구분하기 위한 이론.)

 

● 구조론은 너무나 결정론적이고 이진법의 단순적용이라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군요.

역사 이래 새로운 이론이 나타날 때 마다 결정론 혹은 결정론적인 사고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이론에 대한 몰이해와 이론에 대한 과신이라는 잘못된 태도 때문입니다.


뉴튼의 고전역학이 나타났을 때도,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나왔을 때도 결정론적인 태도들이 나왔지요. 유교주의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도, 법가사상이 출현했을 때도 결정론적인 태도들이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연역적 사고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론은 연역적 구조를 가지며 모든 연역적 구조는 서투른 인간들에게 위험합니다. 구조론은 요소론이 아니며 원자론이 아니고 관계론입니다. 연관성이론이라는 말이지요.


바둑에 비유하면 초반 포석과 중반의 전투와 막판의 끝내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하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데나 둔다는 점에 있어서 반복되지만 말입니다. 구조론은 충분히 오해될 수 있고 그 오해를 피해나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5에 집착하지 말기 바랍니다. 밤낮은 왜 2인가? 4계절은 왜 4인가? 터무니없죠. 밤낮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의 자전이 있을 뿐이지요. 4계절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의 공전이 있을 뿐이지요.


자전과 공전이 있을 뿐인데 즉 하나가 있을 뿐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2로 나누고 4로 나눕니다. 시에스타가 있는 남부유럽 사람이라면 하루도 4로 나누어 지겠지요. 오전과 시에스타, 오후와 밤잠으로 말입니다. 이건 산술적인 구분이지요. 2진법의 단순적용이지요.


구조론은 모든 이진법 곧 앞과 뒤, 위와 아래, 안과 밖, 겉과 속의 2원성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밤과 낮의 2가 아닌 하나의 자전이 있을 뿐이며 앞과 뒤의 2가 아닌 하나의 운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등식은 5의 요소를 가집니다. [1], [+], [1],[=],[2]의 다섯입니다. 왜 5입니까? 사실은 하나의 [=]이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이 [=]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것들입니다. 구조론의 5를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의 등식에서 나타나는 다섯의 항(기호 포함)을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 예로 들은 자동차에 대한 구조론적 접근을 보면 빠진 내용이 많습니다. 자동차의 연료는? 자동차를 만드는 재료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motorization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 경우 자동차를 경제적 성공의 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동차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은 매우 복잡한 사회경제적 후과(consequence)를 낳습니다. 이런 문제는 열린 계에 대한 관심에서 파악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귀납적/경험적 사고에 의해 풍부해 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자동차에 대한 설명은 많은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글을 즉흥적으로 올려놓은 것이 많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입력과 저장과 제어와 연산과 출력이 있을 뿐입니다. 자동차 역시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5를 가질 뿐입니다.


입력이라면 자원이 되겠지요. 자원이 말이면 마차이고 개솔린이면 자동차가 되겠지요. 저장은 자동차의 생산을 말합니다. 현대자동차나 대우자동차는 그 생산에 해당하겠지요. 조립공장 말입니다. 제어는 자동차의 성능을 결정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디젤이나 가솔린이 있겠지요. 연산은 그 자동차의 도로 위에서의 운행을 말합니다. 출력은 그 소비(자동차가 남기는 것)를 말하구요. 예컨대 자동차여행 따위가 되겠지요.


예컨대 서점가에 자동차에 대한 서적이 있다면 내용이 중복되지 않는 다섯가지 분야의 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여행에 대한 책, 자동차 운전에 대한 책, 자동차의 성능에 대한 책, 자동차의 생산에 관한 책, 자동차의 발명에 관한 책입니다. 이는 질적으로 완벽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왜 자동차는 입력과 저장과 제어와 연산과 출력의 5 밖에 없는가? 컴퓨터와 같습니다.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5에서 하나를 뺄 수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자동차나 컴퓨터나 일을 한다는 점에서 같으며 5는 그 일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린계에 대한 관심도 중요합니다. 귀납적/경험적 사고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먼저 연역적 사고를 알고 그 다음에 귀납과 경험을 더해야 합니다.


역사라면 연대기도 필요하고 열전도 필요하지만 일단 연대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난 다음에 열전을 덧붙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연대기는 시간의 진행이라는 한 줄에 꿴다는 점이 특기할만 합니다.


‘한 줄에 꿰기’가 구조론에서 말하는 하나의 ‘닫힌 계’와 같은 것이지요. 이 답변 역시 질문의 모호함 때문에 약간 빗나간 답변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상대성 이론은 '상대적인' 이론이 아니다

스위스 베른이라는 도시의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무명의 젊은 하급관리가 ‘뉴턴(Issac Newton; 1642~1727)’ 이래로 완성되어 왔던 근대 고전역학의 틀을 완전히 바꿀만한 혁신적인 물리학 논문을 발표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대학 교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명한 연구소에 근무했던 것도 아닌, 평범한 일개 특허청 직원이 밝힌 새로운 이론이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이며, 발표자인 젊은이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다.

상대성원리를 갈릴레이가 처음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해에 상대성 이론뿐 아니라, 광량자 가설 등 훗날 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요한 논문들을 여럿 발표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 등을 기리는 의미에서 꼭 100년째가 되는 내년도를 ‘물리학의 해’로 하기로 세계적으로 결정한 바 있다.

물리학이나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상대성 이론’하면 누구나 아인슈타인을 먼저 떠올리게 될 정도로, 상대성 이론은 다른 물리학 이론과는 달리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비슷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형성된 이론으로서, 상대성 이론 만큼이나 물리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아마도 양자역학은 플랑크(M. Planck)로부터 시작하여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슈뢰딩거(E. Schrodinger), 디랙(P.A. Dirac) 등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여러 이론과 노력에 힘입어 완성된 데에 비하여,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의 천재성에 의존하여 만들어졌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 특히 일반 상대성 이론은 특유의 난해함으로 인하여 알려진 명성에 비하여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은 측면이 많으며, 또한 그 명성만큼이나 대중들의 오해를 자주 불러일으킨 이론이기도 하다. 상대성 이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잘못 이해되어왔던 것들은 무엇인지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할 듯하다.

먼저 놀랍게도, 상대성 이론, 혹은 운동의 상대성 원리를 처음으로 발견한 과학자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이다. 즉 물체의 낙하법칙을 밝히고 근대적 역학의 기초를 세운 갈릴레이는, 정지한 상태에서 보는 운동과 움직이는 상태에서 관찰하는 운동의 관계 등을 기술하는 운동의 상대성 원리를 알아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인 19세기 이후, 맥스월(James C. Maxwell) 등에 의해 전기 및 자기의 성질, 전자기파의 실체 등을 설명하는 전자기학(Electromagnetism)이 발전한 후로는, 갈릴레이, 뉴턴의 고전역학과 전자기학 사이에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여 졌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역학과 전자기학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기술하면서 운동의 상대성 원리가 잘 적용되도록 한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상대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은 그 말처럼 그저 ‘상대적인’ 이론이 결코 아니다.

일부 대중들은 관측된 계에 따라서 길이와 시간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잘못 해석하여, 관측하는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물리법칙이 달라지거나 모든 것이 상대적인 뿐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상대성 이론의 핵심은 ‘모든 물리법칙은 관측하는 사람의 상태와 무관하게 같다’라는 것으로서, 즉 정지한 상태의 관찰자건, 등속 혹은 가속도로 운동하는 상태의 관찰자건,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주 어디에서나 물리법칙은 바뀌지 않으므로, 상대성 이론이라 해서 절대성에 가까운 보편적인 원리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여, 상대성 이론을 우리말로는 ‘연관성 이론’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물리학자도 있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의 유명한 공식, 즉 E=mc2 이라는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도 관측계와 무관하게 물리법칙이 동일함(Invariant)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종의 ‘부산물’이며, 그 자체가 상대성 이론의 본 목적이거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 공식에 대해서도 오해가 적지 않은데, 그 의미를 “질량이 없어지면서 에너지로 변환되고, 역으로 에너지가 뭉치면 그것이 다시 질량으로 바뀐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좀 잘못된 이해이다. 즉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전혀 별개의 실체로 놓고, 양자가 서로 바뀌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질량은 곧 에너지의 또 다른 표현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 다시 말하면, 이 공식은 질량이나 에너지나 그 본질이 다를 바가 없는, ‘등가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대성 이론 및 아인슈타인을 둘러싸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 오해가 있으나, 구체적인 것을 다 밝히기는 어려울 듯하니, 독자 여러분은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의 정확한 의미와 “상대성 이론은 상대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최근에 각광받는 물리학 이론 중의 하나로서, 복잡계를 설명하는 이른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 혼돈 이론)’이 그저 ‘혼돈스러운’ 이론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2005년 세계 물리학의 해를 맞아서, 물리학이라면 진절머리를 쳤던 분들이라도 난해한 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의 내용과 그 의미 정도는 제대로 알아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최성우 -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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