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일본 소설이 대학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일본 소설의 특징인 신선한 소재와 감각적인 문체가 대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풀이된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등 4편의 일본 소설이 주요대학 도서관대출 순위 10위권에 올랐다. (이상 기사발췌)‘

대학생들이 일본소설에 심취해 있다. 왜? 이문열 때문이다. 나쁜 대가(?) 한 사람이 문단 전체의 질을 떨어뜨린다. 물론 이문열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황석영, 조정래, 신경숙, 은희경, 박경리들이 합작으로 버려놓았다.

한국에 ‘문단’이라는 혹은 ‘시단’이라는 혹은 ‘등단’이라는 있어서 안될 괴물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신춘문예’라는 허가받지 않는 권력이 존재하는 한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신춘문예는 친일파들이 일본제도를 본딴 것인데 일본에는 없어졌다.)

‘등단’이라니 이게 어느 나라 말인가? 다른 나라에 없고 한국에만 있는 ‘단’이라는 괴 시스템이야말로 필자가 노상 말하는 ‘타도되어야 할 중간집단’의 전형적인 예다. 이것이 존재하는 한 발전은 없다. 미래는 없다.  

개혁은 구조개혁이다. 구조개혁은 중간에서 가로막고 소통을 방해하는 중간집단을 때려부수는 것이다. ‘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런데 그 단에 속하면 갑자기 시인이니 문인이니 하는 귀족칭호를 얻는다.

웃기고 자빠졌어. 연고 좋아하고 학벌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단이라는 이름으로 폐쇄적인 권력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괴물은 한강에 없고 ‘단’에 있다. ‘단’이 존재하는 한 대학생들은 일본소설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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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독자들이 한국소설을 싫어할까?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밑바탕에 깔린 철학과 정서와 가치관 문제다. 사상과 정서와 가치관이 맞지 않으니 소설을 읽으면 아버지 꾸지람을 듣는듯 가슴이 답답해진다.

위 인용한 기사에서 일본소설의 특징인 신선한 소재와 감각적인 문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재와 문체는 일정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 문체의 파격을 시도하지 않으면 소재는 절대로 다양화되지 않는다.

이 또한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사상이 문체를 규정하고 문체가 주제를 규정하고 주제가 소재를 한정한다.  

한국 소설의 특징은 한 마디로 ‘찌질’ 하다는 것이다. 찌질하다는 것은 자기의 문제를 타인에게 따지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가족주의, 의타심, 어리광.. 이런게 남아있어서.. ‘남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아서 내가 요로코롬 망가졌으니 이게 다 노무현 네 탓이다 책임져라. 엉엉엉’.. 이런 거다.

시종일관 자기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궁시렁궁시렁. 웃기셔들. 하여간 이 정도만 하고 영화와 드라마 이야기로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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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황진이가 호평 속에 끝났다. 이 드라마를 조금 밖에 못보았으므로 약간만 이야기 하겠다. 황진이는 과거 도금봉, 강숙희, 김지미, 장미희를 내세워 무수히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만들 때 마다 성공하는 춘향전에 미치지 못했다.

황진이라는 ‘거인’을 소화할 수 있는 대가가 우리나라에 있을까? 없다. 지금 또 황진이를 뮤지컬로 만들고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황진이를 영화화 하려면 감독 수준이 황진이보다 뛰어나야 하는데 한국의 찌질한 영화감독들이 멋쟁이 황진이를 소화한다고? 어림없다.

사극 황진이는 성공했지만.. 초반은 대장금 따라하기였다. 작가는 이걸로는 쪽팔려서 안되겠다 싶었든지.. 대장금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황진이의 스승인 백무와 라이벌인 매향의 대립을 선과 악의 2분법 구도가 아닌.. 예술가의 고집대결로 전환한 것이다.

필자가 늘 하는 이야기대로.. ‘선과 악의 대결’을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전환한 것이다. 백무는 제법 철학이 있는 고수, 매향은 형식과 기교만 따르는 하수로 나온다. 그러다가 또 엎치락 뒤치락 변하는데 제대로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결말에서 황진이는 민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진정한 예인의 길을 걷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좋다. 그러나 역사 속의 실존인물 황진이를 능가하지 못했다.

역사 속의 황진이는 기생 명월이 아니고 서화담의 친구 황진이다. 사람들은 그를 이르되 ‘명월’이라 하지 않고 ‘황진이’라 한다. 그런데도 드라마와 황진이는 결국 ‘춤꾼 명월’로 끝맺고 말았다.

황진이는 16세기의 현대인이었다. 몸은 16세기를 살았으나 정신은 21세기를 사유하였다. 그는 진정한 춤꾼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의 길을 간 것이다. 이건 차원이 다른 것이다.

황진이가 스스로를 ‘송도 3절’로 칭함은 자신을 서화담의 제자로 칭함이 아니라 서화담과 동급의 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서화담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19세기의 추사 김정희에 비견될 수 있다. 김정희는 단순한 한 사람의 유학자가 아니다. 19세기 조선의 선비사회에서 그 시대정신의 정수를 뽑아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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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 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황진이와 관련된 인물로 백호 임제가 있다. 일생동안 칼 한자루와 거문고 하나를 걸머매고 다녔다는 당대의 명사요 풍류객이다. 그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는 도중 송도 대로변에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술을 따르고 제문을 지었다. 임백호의 이 시조는 교과서에도 나올듯 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슳어 하노라.

이 일로 탄핵되어 벼슬을 떼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 이때 임종하는 자손들이 모두 우는지라 임제가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르기를.

"너희들은 곡 하지 말거라. 사이팔만(四夷八蠻)이 다 한번씩 중원을 정복하고 황제를 칭했거늘, 그러지도 못한 작은 나라에서 나서 살다가 죽을진대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서 운다는 말이냐"고 탄식 했다. 지금도 나주 회진의 옛터에는 후손들이 세운 '물곡비(勿哭碑)'가 있다.(성호사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성옹지소록)

무엇인가? 서화담과 황진이와 임백호가 박연폭포 앞 정자에 모여앉아 담소하되 황진이가 시조를 창하고 서화담이 시를 짓고 임백호가 거문고를 뜯으면 완벽한 16세기 조선정신의 정수가 되는 것이다.

자손들에게 곡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 임백호, 역시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한 황진이..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태도.. 이는 천상병이 그의 ‘귀천’에서 (전략)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는 바와 같다.

무엇인가? 그것은 큰 깨달음이다. 깨달은 이의 당당한 태도다. 아름다운 이 세상 즐거운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황진이에게 무슨 슬픔이 있고 남은 한(恨)이 있겠는가? 그 정신 한 번 담백하다.

황진이와 임백호의 이런 담담함이야 말로 이문열, 은희경류 유치짬뽕 한국 소설가들의 복수, 분노, 증오, 눈물콧물 범벅 찌질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하여간 나는 황진이와 임백호의 이 멋진 만남을.. 그 정수를.. 완벽하게 끌어낼 한 명의 영화감독이 한국에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한국의 전반적인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왜 수준이 안되는가?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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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KBS의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다'는 황진이가 아니다. 거문고는 남성적이고 가야금은 여성적이다. 드라마의 황진이는 거문고의 황진이가 아니라 가야금의 황진이다. 시인 황진이가 아니라 춤꾼 황진이다.

서화담과 대등하게 소통하는 친구가 아니라 서화담에게 한 수 배우는 제자로 끝내버린 것이다. 그래놓고 송도삼절이라니. 뜨악하다.

백호 임제가 잔 잡아 권하려 한 것은.. 그를 한 여인으로 보고 사모해서가 아니다. 조선이 중국을 정복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던 사람, 즉 호방한 기상의 임제가 마찬가지로 성품이 남자와 같아서 거침이 없기로 대화가 통하는 친구로 여겼던 황진이에게 잔 잡아 권하려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학이란 무엇인가’를 필자는 이야기하려 한다. 미학은 소통이다. 소통은 무엇인가? 그것은 막연하게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백프로를 구사하여 상대방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다. 가능한가?

KBS 황진이는 백성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그것으로 황진이 자신의 백프로를 끌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와 함께 춤 추는 흰옷입은 사람들의 백프로를 끌어낼 수는 없다. 그 점에서 드라마의 미학은 황진이 보다 한 수 아래다.

가능한가? 내 안의 백프로로 상대방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진정한 소통은 가능한가? 가능하다. 추사와 다산과 초의가 다산초당에 모여 안개낀 보성만을 발 아래로 굽어보면서 차 한잔을 달이면 가능하다.

가능하다. 서화담과 황진이와 임백호가 박연폭포 앞 범사정에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면 그러하다. 화담은 시를 짓고 백호는 거문고를 뜯고 황진이가 노래할 때 그 순간 시는, 그 음률은, 그 노래는 최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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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은 소재가 다양하다. 일본만화도 소재가 다양하다. 특이한 발상을 잘 하는 것이다. 올드보이가 그렇고 미녀는 괴로워가 그렇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못한다. 무엇이 우리의 정서를 억누르고 있길래?

독재 때문이다. 빌어먹을 박정희가 한국인의 사고의 범위를 축소시켜 놓았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마음 속에 무수한 금을 그어놓고 그 금밖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못박아 놓았다. 이문열은 아직도 그런 짓을 하고 있다.

미녀는 괴로워가 신선한 것은 그런 특이한 발상을 하면서도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형수술은 옳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원작 일본만화는 수술부터 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다.

한국문학은 한 마디로 찌질이 문학이다. 왜? 이런 시시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의 영화평에서 외모지상주의 어쩌고.. 놀고있네? 몇 살인가? 어린아이인가? 유치원들은 졸업하셨나?

유치원 나오고서도 아직도 외모지상주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마라. 소통이 안 된다. 하여간 그래서 일본 만화에는 그 수술하는 데 까지의 이야기가 아예 없다. 수술 끝내놓고 이야기 한다.

하여간 추사와 다산과 초의가 초당에 모여 차 한잔을 나누는 자리에 껴들어 외모지상주의 어쩌고 하면 귀싸대기 맞는다. 서화담과 황진이와 임백호가 모여앉은 자리에서 그 따위 찌질한 소리 하면 임백호가 그 검으로 베어버린다.

그런데 묘한 것이 일본 소설은 소재가 다양해서 잘나가는데 왜 일본영화와 드라마는 잘 안될까? 이게 또 재미있는 현상이다. 헐리우드도 그렇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수준이 약간 낮아야 잘 된다.  

● 최하 - 선과 악의 대결(정통서부극 혹은 대장금)
● 중간 - 고수와 하수의 대결(마카로니 웨스턴, 사극 황진이)
● 높은 - 위대한 만남을 통하여 내 안의 백프로를 끌어내기.

선과 악의 대결이 어떻게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바뀌는가 하는 부분은 필자가 예전에 무수히 했고 이번에는 그 다음 수준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식은 주유소습격사건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네 악당이 주유소를 터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네 악당의 어린시절을 회고하는 찌질함을 보여준다.

‘주유소 털자. 왜? 그냥!’이라고 자막으로 딱 써놓고 실제로는 ‘어린 시절에 누구에게 두들겨 맞아서 그때부터 성격이 비뚤어졌어요. 엉엉엉’ 왕찌질.. 에구에구. 박정우 작가 쪽팔려!  

어쨌든 주유소습격사건은 선과 악을 논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녀는 괴로워는 성형수술에 대한 찬반을 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하는가?

그것은 ‘변신’이다.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할 수 있다. 변신이야말로 모든 소설의 모든 동화의, 모든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가 아닌가. 신데렐라 시절부터 인간은 변신해 왔다. 어떻게 변신할 수 있을까?

수술은 변신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돈을 벌어 변신을 하든, 결혼을 해서 변신을 하든, 마법을 써서 변신을 하든, 꿈속에서 변신을 하든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변신에 관한 이야기다. 이 점을 꿰뚫어 보았다면 영화를 바로 본 것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소통할 때 인간은 변신한다. 극중 강하나는 노래를 잘 부른다. 소통은 내 안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

강한나는 언제 노래를 잘 부르는가? 강한나는 한상준을 바라보고 한상준을 향하는 마음으로 노래할 때 가장 잘 노래한다. 한상준과 강한나가 만났을 때 서로는 서로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이다. 그 뒤에 어찌되었느냐는 쓸데없는 사족일 뿐이다.

둘은 그 후로 헤어졌을 수도 있고 결혼해서 잘먹고 잘살았을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작가가 관객에게 어느 선까지 친절하냐의 문제일 뿐 영화의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누가 어디서 누구를 만날 때 서로의 백프로를 끌어내느냐다.

추사가 다산과 초의를 만나듯이 황진이가 서화담과 임백호를 만나듯이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는 서로의 전부를 완벽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스타일이 나온다. 스타일에서 소재의 다양성이 나온다.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만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비해 한국은 그 만나는 과정이 무지 어렵다. 외인구단처럼 섬에 가서 몇 년 수련해야 만날 수 있다. 대장금에도 빠지지 않는다.  

● 일본 - 만난 다음 어떻게 소통할까?
● 한국 -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중요한건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미학이다. 스타일이란 강한나와 한상준이 서로의 백프로를 완벽히 끌어낸 시점에서 그대로 이야기를 끝내버릴 수 있는 미학적 기준을 말한다.

한국의 소설이 안 되는 이유는 미학적 기준이 없어서 주제를 중심으로 가다보니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를 장황하게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만 해도.. 원작과 달리 강한나가 수술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구질구질하게 설명하며 관객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걍 수술하면 수술하는거지 유치하게 뭘 그걸 가지고 구구하게 변명하나.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런 찌질함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소설이 안 되는 이유도 역시 찌질함 때문이다.(드라마와 소설의 수준 차이다.) 그러니 작가들이여. 구태여 관객의 동의를 구하려 하지 마시라.  

어쨌든 나의 결론은.. 당신이 만약 당신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끼든, 능력이든, 열정이든, 재능이든, 무엇이든..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의 백프로를 끌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야만 한다면.. 지체없이 그 만남을 방해하는 장벽을 제거하고 달려가라는 것이다.

왜? 그 만남의 한 순간에 당신은 전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남에 따른 후과는 순전히 당신의 책임질 몫이다. 그러다가 불행해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호 임제는 주저없이 달려갔다. 어디로? 황진이의 무덤으로.

그 결과는? 역시 불행해졌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 불행까지도 자신의 삶을 미학적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소도구이고 장식품인 것을. 칼 한자루와 거문고 하나가 남았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으므로 수술을 했든 안했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은 순전히 당신의 몫이며 그에 따른 후과는 당신이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박수를 받든 비난을 받든 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쨌든 황진이도 멋쟁이고 백호 임제도 멋쟁이다. 그들은 주저없이 달려간 결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다.


타짜 - 우리는 하수가 아니다. 2006/10/8

저번에 쓴 타짜 이야기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타짜.. 영화평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영화가 도박판을 빗대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저는 영화를 빗대어 정치를 이야기하자는 거지요.

요지는 세상이 바뀌니까 영화도 바뀌더라 뭐 이런 말씀..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이야기..

홍콩영화의 몰락은 거대중국에 흡수된 이후 기세가 꺾인 홍콩의 현실과 같이 가는 거고.. 마찬가지로 근래 한국영화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성공과 같이 가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왜 제가 이 부분을 특별히 밑줄그어 강조하느냐? 사실이지 80년대 학번 사람들이 그동안 변변히 이루어 놓은게 없어요. 데모 하나는 잘했지요. 정권창출도 했고.. 인터넷도 좀 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너희들이 잘하는게 뭐냐?”

기성세대들의 이러한 물음.. 조중동과 수구꼴통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이승만세대 처럼 전쟁을 잘한 것도 아니고.. 박정희세대 처럼 노가다를 잘 뛴 것도 아니고.. 멍박이처럼 불도저를 잘 모는 것도 아니고.. 불신이죠. 신구세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습니다. 그 장벽은 불신의 장벽입니다.

사실이지 저는 이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가 압축성장과 압축민주화에 따른 세대간의 헤게모니 갈등이라고 봅니다. 본질은 서구에서 60년대 후반에 일어난 학생혁명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너무나 확연히 차이나는 철학과 가치관과 스타일과 문화의 차이.. 그에 따른 문화충격.. 이에 따른 코드의 불일치.. 지속되는 엇박자.. 그리고 불협화음.. 거대한 부조리와 언밸런스가 실제로 있습니다.

정치는 실제로 있는 그 모순을 반영할 뿐.. 그런데 둘러치기 전문의 논객들은 이 문제를 이념문제로 환원시키는 초식을 구사하지요. 그게 거짓이라는 말씀.

식민지에 주눅들고.. 625전쟁에 기죽고.. 분단에 쪼들리고.. 미일중소 사강의 압박에 억눌려 순치되고 나약해진 기성세대, 노예근성에 찌든 기성세대와 구김살 없이 자라난 신세대와의 사이에 거대한 의사소통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간의 의사소통 장애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득권을 차지한 기성세대가 그 수구꼴통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80년대, 90년대 학번 사람들을 향하여 질문하는 거죠.

“너희들이 할 줄 아는게 뭐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창이 처럼 목에 힘주어 권위를 세울 줄도 모르고.. 박녀처럼 우거지상으로 인상을 써서 민심을 회유할 줄도 모르고.. 멍박이처럼 불도저를 몰 줄도 모릅니다.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어요.

그러나 최근 뜨고 있는 한국영화, 한류드라마를 보면 이 젊은이들이 인터넷만 잘하고.. 데모만 잘하는게 아니고 그 외에도 잘하는게 하나는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거죠.

하여간 최근 한국영화의 성공은 80, 90년대 학번의 우리세대도 잘하는게 있고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이 있다고 내세울만한 근거가 됩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 독재를 겪은 기성세대와 구김살 없이 자라난 신세대 사이에 철학과 가치관과 스타일과 문화와 코드의 차이를 놓고 이루어지는 패권경쟁.. 헤게모니 싸움..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본질입니다.

이 논리로 가면 조중동은 반드시 집니다. 왜냐? 역사의 법칙 상 신구세대의 갈등은 결국 신세대의 승리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젊은이는 태어나니 숫자가 자꾸만 늘어나고 늙은이는 사망하니까 숫자가 자꾸만 줄어들잖아요.

그래서 조중동은 이를 이념의 문제로 환원시키려고 합니다. 저놈들은 죄다 빨갱이다 이거죠. 그러나 거짓말입니다. 거짓말도 전술이 될 때가 있지만 두 번 써먹을 전술은 못돼죠. 양치기 소년노릇도 하루이틀이지 말입니다.

하여간 다음 대통령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맞게.. 먹고사니즘 대통령도 아니고 불도저 대통령도 아닌 문화 대통령이 나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동의합니까? 뭐 속에 있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 타짜를 끌어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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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박정우 작가가 작업한 모든 영화와 범죄의 죄구성 이후 최동훈 감독의 모든 영화.. 그리고 킬러들의 수다 이후 장진사단이 만든 대부분의 영화를 지지하기로 합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뭔가 배짱이 맞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영화는 좋은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겠지만.. 뭔가 숨통이 트이고 시원시원한 맛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최동훈 감독.. 평경장 백윤식 입을 빌어.. 이승복처럼 아가리가 찢어지고 싶거든.. 뭐 이런 식의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 멋쟁이야.

장진사단-박정우 작가-최동훈 감독.. 이분들 실제 연세가 몇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세대의 느낌이 팍팍.. 노무현 대통령도 연배는 우리와 크게 차이가 나지만 배짱이 맞기로 하면 우리 세대 같아요. 그런 느낌 안듭니까?

백윤식은 환갑이 되어도 정신연령은 딱 신세대야!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배창호, 이장호, 안성기의 전성시대.. 그때 그시절과는 다르다는 느낌. 배창호나 이장호나 임권택이나 뭐 다 훌륭한 감독들입니다. 안성기도 훌륭한 배우고.. 그러나 이분들은 킬러들의 수다.. 주유소 습격.. 타짜.. 이 분위기가 아네요.

안성기의 라디오스타도 훌륭한 영화라지만.. 이 아저씨는 뭔가 흘러간 노래만 부르고 있다는 느낌.. 조용필 이 분도 그래.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국민배우, 국민가수, 국민타자.. 그 국민이라는 말이 아까워서.. 모범생체질..

안성기라면.. 이승복 아가리 찢어지고 어쩌고 이런 대사 절대로 안할거 같어. 국민배우가 어떻게 그런 상스런 대사를.. 국민가수가 어떻게.. 이러고 점잔떨고 계시면 세대차이 팍팍 나는 거죠.

사고는 치더라도 조용필 보다는 차라리 전인권이 뭔가 통한다는 느낌.. 그런거 있소.. 배짱이 맞다는거. 세대차나는 저쪽 사람들과 다른 느낌..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는 내용이 좋아도 대략 망하는 느낌.. 그 이유는 안성기에게 “이승복처럼 아가리가 찢어지고 싶니?” 이런 대사를 하라고 명령할 간 큰 감독이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 백윤식은 해도 안성기는 못해. 안성기보다 더 샌님인 유인촌이라면 때려죽인다 해도 안하겠지. (유인촌 이 분은 원래 해당사항 없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인간 수준이 딱 그렇다는 말씀).. 그러니까 안성기 영화는 내용이 좋아도 젊은 세대와 코드가 안맞아서 흥행이 안되는거.

‘누벨바그’라는 말이 있는 것도 60년대 서구에 그러한 세대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러니 한국에서도 누벨바그가 나타날 때가 된거지. 의사소통의 장벽.. 기호의 차이.. 문화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본질은 세대차인데 그걸 이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다 보니.. 진보인척 하는 보수도 있고 보수인척 하는 진보도 있는데 이를테면 최장집 같은 분.. 이론은 진보이고 사상은 진보인데 386 세대를 대단히 못미더워 하고 그들 세대의 약진을 불안해 하며 노심초사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소.

그분들이 꾸지람을 내리실 때는 이념이라는 연장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못믿는 겁니다. 하긴 노무현과 그 사람들 하는거 지켜보자면 사실 불안감이 들고도 남지요..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불안감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야 진짜 스승이라는거.

이념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본질은 불신.. 그 불신의 배경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부족과 역사인식의 얇음 때문. 이건 철학의 문제, 인격의 문제가 아닌가. 인간이 바탕에 철학이 받쳐주고 인격이 받쳐주고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다 이해하고 포용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

의사소통의 장벽.. 신구세대 사이에 그 장벽을 누가 앞장서서 허물어야 할까요? 젊은 세대가 구세대에 맞춰줘야 하나 아니면 생각있는 구세대가 젊은 세대 분위기에 맞춰줘야 하나? 서로 맞춰주는게 좋지만 역사에 그런 일은 없지요.

역사는 결국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는 거고 뉴웨이브가 구세대를 밀어내고 젊은 세대가 낡은 세대를 밀어내는 식으로 해결될 수 있을 뿐이며 아주 드물게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스승이 있어서 젊은 세대에 맞춰주곤 하지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진보, 보수의 이념을 떠나 뭔가 기존의 판도를 흔들어 버리려는 사람, 일단 뒤집어 엎어놓고 보자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일치가 있고 그들 사이에 배짱이 맞다는 점이 큽니다.  

과연 그러한가? 타짜의 성공이 최동훈 감독 개인의 재능이 일회성으로 반짝 빛을 발한 사건이냐 아니면.. 시대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는 즉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한 번 크게 용틀임을 하며 여울을 이루고 폭포를 이룬거냐?  

영화를 만들건 소설을 쓰건 음악을 연주하건 시대정신과의 대화입니다. 그래야만 맥놀이가 이어지고 울림과 떨림이 전파되고 오르가즘이 느껴지는 겁니다. 최동훈 혼자 최동훈이 아니고 박정우와 장진사단과 더 많은 신세대와 만나 붐을 이루고 트렌드를 만들고 스타일을 만들고 유행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성공은 세익스피어 한 사람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위대함이 반영된 것이오. 그 시대에 후진 유럽에 선진 아랍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세계로 눈을 돌리고 시야가 더 넓어졌기에 3막5장이라는 고전극의 형식을 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는 다빈치라는 한 천재의 우연한 출현이 아니라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기독교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가 허용된 결과라는 거. 도시의 공기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 결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쏟아져 나왔다는 거.

시대의 배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소. 안성기, 배창호, 이장호.. 이 사람들과 박정우, 최동훈, 장진사단은 완전히 다른 눈높이를 가진다는 것.

울보 최민식의 시선은 낮은 곳에서 위를 바라보며 투덜대는 찌질이 시선.. 교장 안성기의 시선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염려하는 마초 가부장 시선.. 그러나 누벨바그의 시선은 정상에서 또다른 지평을 바라보는 것.

위에서 아래를 보고 걱정하거나 아래에서 위를 보고 투덜대거나 둘 다 돌아가는 판 안에서 자기네끼리 복작대는 좁은 시선이라오. 그 돌아가는 판 바깥에서 새로운 지평을 보자는 것이오.

대한민국은 강하다.. 이런 결론.. 이제는 한국도 변두리 하수가 아니라 중앙의 고수가 되었으므로 고수의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는 거.. 최민식처럼 늘 줘터지고 얻어맞고 울고짜는 찌질이 캐릭터.. 안성기처럼 늘 근심하고 염려하고.. 식구들 챙겨야 하는 근엄한 가부장 캐릭터.. 뭐 그딴 것이 아니라.. 타짜의 조승우처럼 영리하게 치고 빠질줄 아는 신세대 캐릭터.. 식민지도 모르고 전쟁도 모르고 구김살 없이 자라온 세대의 등장..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자부심을 가지고 체면도 좀 차리고.. 일본식 경제동물이 아니라 문화강국을 지향하면서.. 우리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주저하지 말자는 그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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