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read 7028 vote 0 2002.10.16 (12:31:16)

[게시판의 답글임]
에일리언을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4편은 안봤고 3편은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에일리언은 어떤 영화보다 인간 공포의 본질을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습니다.

공포란 무엇인가? 그 전에 고통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고통 하면 브루스 윌리스지요. 가족을 사랑하는 40대 아저씨(지긋지긋한 헐리우드의 가족주의, 더럽게 우려먹는다!)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생고생하다가 악당을 물리치고 마침내 가정을 회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는 이혼 등으로 가정파괴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영화에서 가족주의를 우려먹습니다. 근래에 본 영화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지긋지긋한 가족주의 타령이죠.

가족주의는 헐리우드의 첫 번째 흥행코드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영화가 잘 들여다 보면 가정을 지키는 40대 초 아저씨와, 역시 가정을 보호하는 30대 후반 아줌마(아줌마는 드물지만 전형적인 아줌마로는 시고니 위버)가 등장합니다.

고통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가족파괴에서 비롯되죠. 이혼, 상실, 고독, 상심, 일탈 이런 코스로 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족을 복원할 수 있는가? 고통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극중에서는 테러리스트나 괴물 혹은 악당, 심지어는 외계인이 밀밭을 엎어놓았다는 사인, 식스 센스의 귀신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실제의 현실에서는 이혼이죠. 그리고 분가입니다. 미국에서는 17살만 되면 부모 곁을 떠나죠.

가족의 해체가 고통을 준다면 어떻게 가족을 복원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죽도록 고생하기입니다. 브루스 윌리스처럼 디지게 고생을 해야 합니다. 시고니 위버처럼 디지게 고생을 해야 가족이 복원됩니다.

고통에 관한 영화라고 하면 말은 되겠지만 좀 어색합니다. 그 보다는 본질에서 가족의 해체와 복원을 암유하는 영화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듯 합니다.(잘 보면 헐리우드의 흥행영화는 대부분 그러함) 물론 모든 영화는 소통에 관한 영화이므로 역시 가족과의 소통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은유여서 포착하기는 쉽지 않지요.

전통적인 공포라면 벌레나 병균이나 미치광이나 괴물의 습격인데 도망치면 되죠. 주인공들은 보통 섬이나 어떤 고립된 지역에서 탈출하려 듭니다. 괴물을 죽이고 헬기를 타고 도망칩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은 이겁니다.

"병신들 거기는 뭐하러 갔니? 우리처럼 안전한 극장에서 팝콘이나 먹으면 되잖니?"

에일리언의 강점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데 있습니다.

"괴물은 우리 내부에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어쩔테냐?"

이 점을 포착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남자도 아닌 여자가 주인공이 되는데서부터 이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괴물은 바로 7살 먹은 꼬마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애들은 말 안듣죠. 웬수입니다. 웬수. 말썽장이. 진짜 공포는 가족입니다. 즉 모든 공포의 근원이 가족의 해체에 대한 불안에 있다는 점을 에일리언은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1살 때 문득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아기는 최초의 공포를 경험한다. -

특히 공포 중의 공포는 기형아에 대한 공포입니다. 모든 산모들은 아기를 임신했을 때 기형아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즉 에일리언은 외계생물이 아니라 실은 산모들의 기형아출산에 대한 공포를 은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해석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잘 보면 이런 점을 은연중에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떼어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 괴물은 술주정하는 폭력남편, 말썽 피우는 자기 자식, 거짓말하고 바람 피우는 아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 그것은 주인공의 희생입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시고니위버에 와서 헐리우드의 흥행코드로 이 점은 예리하게 포착되었습니다. 이후 모든 영화에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들어갑니다.

'희생'이라는 코드는 원래 전래 민담이나 설화에는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멀리는 헤라클레스의 괴물퇴치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바리데기 신화에서 흰 옷은 검게 빨고 검은 옷은 희게 빠는 고생시리즈 그리고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이 죽도록 고생하는 것도 원래는 전통적인 설화의 코드입니다.

시집가면 고생이죠. 고생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해 가족을 복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리는 원래 전통적인 무속이나 종교적인 제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무녀나 신관은 끔찍한 고통의 제의를 거쳐 신탁을 받도록 훈련됩니다.

하여간 이 점은 중요한 흥행코드로 발견되어 있기 때문에 헐리우드에 의해 앞으로도 100년은 더 우려먹어질 것입니다. 가족의 해체가 덜한 우리에게는 약간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설화나 민담에서도 전통적인 흥행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정리하면 에일리언이 등장하는 미래 세계는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파괴된 가상 세계입니다. 모든 공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가족의 해체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에 기초하고 있으며, 에일리언에서는 괴물은 우리 내부에 있을 수도 있다는 철학적인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 물음에 대한 정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전통적인 흥행코드였던 고통의 감수와 희생을 통한 가족의 복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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