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적 접근과 귀납적 접근 철학의 50개념은 연역적 사유에 기초하므로 연역적으로 풀어야 한다. 귀납적 접근은 결과를 보는 것이며 연역적 접근은 원인을 보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 예컨대 ‘양심’이라는 단어가 있다. 국어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양심 [良心] [명사]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이것이 귀납적 접근이다. 연역적 접근은 뇌구조를 따라간다. 해부학적으로 접근한다. 인간의 뇌에 양심을 담당하는 뭔가가 있다. 인간의 뇌에 실제로 소프트웨어가 깔려있다는 거다. 예컨대 양심수라는 표현이 있다. 양심수는 간첩이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병역기피자인데 그게 왜 도덕적 의식인가? 간첩행위가 도덕이고 병역기피가 도덕인가? 아니지 않은가? 귀납적 접근은 틀렸다. 연역으로 보면 양심은 인간의 가치판단과 그에 따른 행위에 있어서 합리성을 추구함이며 이는 인식과 판단이 행동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원리에 따른다. 인간의 뇌에 그런 소프트웨어가 깔려있다. ● 합리성='인식≫판단≫행동'을 한 줄에 꿰어 연동시키되 행동이 판단을 어기지 않게 하고 판단이 인식을 어기지 않도록 함. 그 이유는 인간이 양심에 따라 일정한 원칙을 정해놓고 판단과 행동에 있어서 그 양심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뇌에 부하와 스트레스를 덜주기 때문에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게 양심을 지향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양심적 동물이다. 그 양심이 반드시 도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단 도덕으로 나타날 확률이 높다. 양심은 인간의 사회적 태도이고 이는 나를 나로 인식하는 자아의 영역범위가 사회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의 나라, 나의 겨레, 나의 인류도 나로 인식하는 자아의 발달과 성숙이다. 이는 사회적인 선으로 나타난다. 악은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치는 것인데 어디까지가 남인가? 가족은 나인가 남인가? 이웃은? 나의 해당범위는 인간의 지위가 상승할수록 또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사회적 역할이 커질수록 확대된다. 나의 범위가 일정하지 않다. 악당이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친다면 그 악당이 사회적으로 활약할수록 모순에 빠지게 된다. 나를 위해 나를 해친 결과가 된다. 나를 위해 남을 해치다가 급기야는 내 이웃을 해치게 되고 내 가족을 해치게 되고 결국 나를 위해 나를 해치게 됩니다. 나의 지금 이순간을 위해 나의 미래를 해치는 거다. 자기 몸에 해로운 마약을 먹는다면 바로 나를 위해 나를 해치는 것이다.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를 죽이는 것이 마약이고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다. 범죄도 마찬가지다. 모든 범죄는 오늘의 나를 위해 내일의 나를 죽이는 행위다. 그러므로 선은 일관될 수 있어도 악은 결코 일관될 수 없다. 선은 나를 위해 남을 돕는 것인데 나의 사회적 역할이 커질수록 남도 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일관될 수 있다. 일관되게 선행을 할 수 있다. 양심은 뇌에 스트레스를 덜 주기 위해 원칙을 정해놓고 인식≫판단≫행동의 일관성을 쫓는 행위다. 그런데 선으로는 그렇게 일관될 수 있어도 악으로는 결코 일관될 수 없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러므로 높은 확률로 양심이 도덕으로 나타날 뿐 양심이 반드시 도덕 그 자체는 아니다. 양심수나 양심적 병역거부의 경우 원칙을 따른 행동이므로 설사 결과가 반사회적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결과를 묻지말고 양심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가 정신이상자를 처벌하지 않음과 같다. 양심은 뇌에 깔려있는 소프트웨어이므로 양심을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다. 정신이상자는 그 소프트웨어가 고장났으므로 치료할 뿐 처벌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결론적으로 양심을 도덕적 의식이라 말함은 귀납적 접근이고 이는 결과를 보는 것이며, 결과로 볼 때 높은 확률로 도덕으로 귀결되지만 양심이 반드시 도덕인 것은 결코 아니므로 오류가 있는 접근법입니다. 연역으로 보면 양심은 ‘알면 곧 실천한다’는 인식≫판단≫행동의 관통원리로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일관되기 위해 원칙을 정해놓고 그 원칙을 따르는 경향이다. 뇌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도둑이 곧 재범을 저지르고 도둑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도둑은 양심 때문에 자기를 도둑놈으로 규정하고 일관되게 도둑질을 하다가 결국 감옥으로 가는 것이다. 도둑도 양심이 있어서 차마 자신을 ‘민주시민’으로 격상시키지 못하고 ‘나는 천상 도둑이야.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는 것이다. 시민이 딱 한번 범죄를 저지르고 완전히 손을 씻는 영악한 일은 거의 없다. 그게 있다면 양심불량이다. 구조론은 구조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이는 연역적으로 보는 것이며 연역은 실제로 있는 것을 토대로 보는 것이다. 양심이 실제로 뇌 속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연역은 결과를 보고 추론하지 않는다. 빛은 실제로 입자가 있고 어둠은 입자가 없다. 광자는 있어도 암자는 없다. 절대로 존재하여 있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연역이다. 결과를 보면 어둠도 있는데 원인을 보면 빛만 있다. 이 세상에 구조는 하나 밖에 없고 보편성도 하나 밖에 없다. 일반성은 보편성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귀납으로 일반성이 연역으로 보편성이다. 보편으로 보면 모든 구조는 같다. 이 세상에 저울 아닌 것은 없다. 저울은 ‘작용 반작용의 평형계’인데 저울이 아니면 외부의 작용에 대해 반작용하지 않으므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게 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저울 아닌 것은 당연히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