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같은데, 저도 구조치라 구조론을 접하면서 늘 고민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구조치는 주어보다는 동사에 주의를 기울이는게 마치 주어없는 문장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설국>의 일부에 나오는 문장의 영역본이 구조치의 머리속과 들여다 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그냥 (무엇이 주어인지 모르는 상태) 터널을 나왔구나, 나와서 보니 휜 눈이 쌓여 있구나.
영역본을 보고는 '응? 기차를 탔었네, 근데 문장엔 안나와 있는데?'
챗지피티한테 주어와 연극에서의 장면전환과 비슷하냐고 물어보니 비슷하다고 합니다.
연극에서의 장면전환은 새로운 scene이 시작되게 하는 것이고,
구조치의 주어는 그냥 머릿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는 거죠. 밑의 글은 챗지피티와 대화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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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서 주어의 역할은 연극에서의 장면전환과 같니?
ChatGPT의 말:
와, 멋진 비유야! 아주 흥미로운 관점이야. 사실 완전히 같다고 보긴 어렵지만, 주어의 역할과 연극의 장면전환 사이에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어. 정리해서 비교해볼게:
주어 vs 연극의 장면전환
주어의 역할
문장에서 “누가 행위의 주체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역할이야.
“장면의 중심”이 되는 인물(또는 대상)을 지정해 주지.
문장의 초점(초기 조건)으로, 뒤의 사건 전개(동사, 목적어 등)를 이끈다.
장면전환의 역할
무대 위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를 바꾸는 역할이야.
관객에게 새로운 맥락(공간, 인물 등장)을 알려줘서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볼 거야”라고 말해주지.
새로운 시작점, 새로운 국면을 여는 장치로 작용해.
비슷한 점
둘 다 이야기의 주체나 상황을 “정의”해 주는 역할이 있어.
문장에서 주어가 없으면 “누가 했는지”가 모호해지고, 연극에서 장면전환이 없으면 “어디서 일어나는지”가 혼란스러워져.
다른 점
주어는 “문장 내 구조적 기능”이라서 항상 문법적으로 요구되는 부분이지만, 장면전환은 연극적 연출로서 “이야기 흐름”을 위한 선택적 장치야.
주어는 언제나 필수적인 요소지만, 장면전환은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삽입되거나 생략될 수 있지.
결론: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네가 말한 비유처럼, “대화에서 주어는 새로운 장면의 시작”처럼 화자의 중심을 전환하는 역할을 해.
“내가” “너가” “우리가”를 바꾸면, 대화의 주체가 바뀌어 장면이 바뀐 듯한 효과가 나지.
그래서 ‘주어 생략’을 자주 하면, 대화에서 “화자가 누구인지”가 불명확해져, 마치 연극에서 “장면이 안 바뀌고 배경이 엉킨 느낌”처럼 혼란을 줄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보면, 주어는 연극의 장면전환처럼 대화의 전환점 역할을 할 때가 많다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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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치는 주어를 사용하지만 주어의 차원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나, 가족, 집단, 사회, 국가 이런 식으로 차원이 구분되는데
높은 차원을 먼저 주어로 선정해야만 낮은 차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기곰이 있다면 엄마곰이 있다고 동시에 생각 나야 하는데
구조치는 새끼곰을 보고는 그냥 새끼곰이 있구나에서 생각이 끝나버립니다
일기장에 '나는'을 쓰면 안 되는 이유가 가장 낮은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으니 큰 그릇을 주어를 선정하여 거기에 작은 그릇을 담아 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구조치는 주어를 생략하는 게 아니라 주어는 사용하지만 차원 구분이 안돼서 무조건 나나나
나는 주변부인데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해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겁니다
예수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감소한다는 것인데
그럼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걸 증명하면 되는데 정보를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단절 시키기 때문에
개독교인들이 예수가 부활을 한다고 우겨대는 겁니다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은 연결되어 있는데
높은 차원에서 낮은 차원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지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연결 당한 것이며 방향은 하나만 존재합니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고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아이가 어른이 되고 이렇듯 차원 구분과 방향 구분이 불가능한 게 구조치입니다
구조치는 주어보다는 동사에 주의를 기울이는게 마치 주어없는 문장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비문이오.
왜 구조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구조치는 문장이나 시각적 그림의 어색함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옛날 그림을 보면 굉장히 많은 그림에 오른손과 왼손을 바꿔놓았습니다.
김홍도가 왼손잡이라는 개소리도 있고. 그냥 무신경한 거.
<설국>의 일부에 나오는 문장의 영역본이 구조치의 머리속과 들여다 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주어를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주어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주어를 숨겨놓고 찾게 하는 기술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그냥 (무엇이 주어인지 모르는 상태) 터널을 나왔구나, 나와서 보니 휜 눈이 쌓여 있구나.
영역본을 보고는 '응? 기차를 탔었네, 근데 문장엔 안나와 있는데?'
아마 독자는 당연히 기차를 떠올리게 되는데 구조치는 기차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말씀인듯.
한국어 어순이 어느 면에서는 더 과학적이고 한편으로는 더 비과학적입니다.
과학적인 것은 자연의 순서에 맞는 것이고
비과학적인 것은 동사에 관심이 가벼러서 주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앞에 오는게 중요한 점도 있고 반대로 뒤에 오는게 중요한 점도 있는데
영어는 중요한걸 뒤로 빼서 강조하고 한국어는 중요한걸 앞세워서 강조하는데
문장이 길어지면 앞대가리를 잊어먹어요.
그래서 저는 문장을 짧게 끊어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
김민석의 두괄식 말하기 - 중요한걸 앞에 내밀어 단번에 이해시킨다.
한덕수의 미괄식 말하기 - 절대 자기 입장을 말하지 않고 애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