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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835 vote 0 2009.02.23 (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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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해 보이는 근육이 청동조각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강렬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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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강조되어서 강해보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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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굵은 그림

draza_ru_19535.jpg

선이 굵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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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응시 그리고 대지를 든든히 밟고 있는 두터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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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과 사진은

특별히 가려뽑은 걸작이 아니지만(좋은 사진과 그림 찾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주장하는 '굵은 선'의 의미와 맥락이 닿은 그림들이다.

'선이 굵다는' 말은 '사물에 내재한 기운'을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구조론의 '심과 날'을 드러내는 것이다.

위 사진들에서 '심과 날'을 찾아보기 바란다.

(이거다 하고 콕 찍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님.
왜냐하면 무게중심, 힘의 중심, 소실점, 시선의 중심 등 여럿이 공존하므로)

거기에 과학성이 있다.

과학성이 있어야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청동으로 빚은 것은 청동의 기운을 끌어내야 하고 나무로 빚은 것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내야 한다.


묵직한 바위는 묵직한 물, 묵직한 구름, 묵직한 나무, 묵직한 배경, 묵직한 조명,

묵직한 명암, 묵직한 꽃과 함께 있어야 그 묵직한 기운이 드러난다.


바위는 묵직하고, 꽃은 가볍고, 구름은 들뜨고,
물은 촐싹대고, 배경은 가볍고 그런 식으로 중구난방이면 기운이 죽는다.


운동의 중심, 무게중심, 시선의 중심, 소실점, 방향성,

분위기, 무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65t.JPG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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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그림은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라는게 문제.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설따라 삼천리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두번째 그림에서
'떠오르는 태양같은 희망을 품고 비록 초가집에 살더라도 소처럼 일하자'는 교훈.

문제는 현대회화도 이런 식으로
주로 환경문제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텍스트가 들어있다는 점.

이런 따위들은 예술의 본질에서 멀다.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발소 그림들의 문제는 담벼락이 없다는 것이다.
그림의 근본적인 고민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물의 공존문제, 인접선 문제인데

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대신 담벼락과 논두렁을 아예 그리지 않아버리는 방법으로 피해간다는 점.
강에는 강둑이 없고 강변에는 백사장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가리지 않고 살짜쿵 비켜주며(조연이 주연배우 앞을 가리면 안되듯이) 
결코 인접할 수 없는 두 사물을 억지로 공존시켜 놓았다.

그래서 이발소그림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들어있고
새벽과 아침과 오전과 오후와 밤이 공존하고 태산과 산맥과 시골과 바다와 호수와 강이 공존한다.


76y.JPG

이발소 그림의 걸작
태양과 바다와 언덕과 정원과 등대와 집과 숲이 공존하고 있다.

돛단배도 있고 섬도 있고 파도도 있고 물보라도 있고
안개도 있고 구름도 있고 밤도 있고(집과 정원에 등불이 켜져 있으니 밤이다) 낮도 있다.

예술성 빼놓고 있을건 다 있다.
그러나 이발소 그림에 꼭 있어야 하는 갈매기는 없다.

구름속 태양에서 나오는 서광이 저런 각도로 나오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점에서
자연을 실제로 관찰한 사람의 비위를 심하게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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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그림에도 숨은 예술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건 별개의 문제.

길거리 낙서에도 예술성이 있을 수 있고
조선시대 민화에도 예술성이 있으나 이는 별개의 논의사항.

근본적으로 자연을 탐구하여 과학하느냐의 자세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느냐의 자세의 차이다.

현대회화가 환경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을 말하는 척 하지만
결국 자기 욕망의 표현이면 현대성이 결여된 이발소그림이다.

이발소 그림에서 숨은 소비자의 욕망을 탐구하여 과학적 성과를 얻어냄과
새끼 열두마리 낳은 복돼지 그려서 복을 빌고 자기 욕망을 현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림의 품격은
자연에 내재한 숨은 질서를 포착함으로써

인류문명의 집단지성에 기여한다는
뚜렷한 방향성과 자세를 가져야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현대성이 없는 그림은 우선 그림이 아니다.

뉴스카메라가 비추는
여야정당들의 벽에 걸려있는 대형그림이나 사진들도 그런 점에서 이발소그림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09.02.23 (17:06:21)

Biblis 1884.jpg
Retour_des_champs.jpg

부게로 (William Bouguereau) 그림 추가..

부게로의 그림이 하나로 묶어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감은 확실히 있소. 생동감 있는 공기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까..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09.02.23 (17:18:02)

저늠의 올빼미들 눈을 보면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소. 그래서 눈 큰 여자들이 인기인거 같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17]안단테

2009.02.23 (17:37:01)



검은 복면(?)을 쓴 올빼미들... 초롱초롱한 눈.  '심각하냐'물었더니 고개를 흔들며 '심각하지 않다고....' ^^
봐도 봐도 웃음이 나옵니다...  잘 보았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2.23 (18:13:54)

원문의 부게로 그림은
모르고 우연히 가져온 거고

아무님이 소개한 두 편의 부게로 그림은
그다지 내가 강조하는 맥락이 아니오.

원문의 바이올린 소녀는 묵직해 보이는 옷을 포함하여 엉덩이 아래 대지와 든든히 결합되어 있고
뒤의 나무도 잘 받쳐주고 있다는 느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인물의 묵직한 느낌과 확실한 시선을
배경이 역시 묵직하게 받쳐주고 있는 데서 기운을 포착한다는 뜻.

그러나 아래 두 그림은 화사한 누드와 어두운 배경
그리고 앳된 얼굴의 소녀는 (얼굴 이외는 괜찮음)

대지와 든든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이 약하오.
공중에 붕 떠있다고 해야.

나라면 여인의 누드를 그리되
피부의 묵직하게 접힌 살이, 길게 웃자란 풀을 누르게 해서

대지와 든든하게 접촉하고 있다는 '긴밀감'을 나타냈을 것이오.
아래 소녀의 두 발은 대지와 든든하게 결합하고 있고
 
풀다발도 마음에 들지만 얼굴은 좀 아니오.
예술가의 고민은 두 사물의 접촉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인데

위 그림처럼 소녀의 얼굴 주변을 깜깜하게 하거나
혹은 누드에서 머리카락이 물이 닫지 않고 팔이 바위에 닫지 않고 허리가 물에 닫지 않고 허벅지가 풀을 살짜쿵 피하며

배경과의 접촉을 최소화 한 것은 과학에 도전하고 탐구하는 정신이 아니오.
물론 부게로의 그림은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과학적이고 또 피부의 혈관까지 정밀하게 관찰한 흔적이 있으나

피부가 어떻게 물과 나무와 흙과 풀과 바람과 햇볕과 접촉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탐구를 회피한 점은 작가정신에 있어서 진정 용맹하지는 않은 것이오.

물론 이 평가가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평가는 전혀 아니오.
단지 내 주장의 설명일 뿐.

나는 화격을 말하고 싶은 것이며
이는 그림의 가치와 작가의 실력을 떠나서 별도로

내가 그 맥락을 이어가는 것. 
내 주장은 여백을 두거나 까맣게 해서 회피하지 말고

접촉점의 문제에 용맹하게 도전해야 내면에 감추어진 기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거요.
도레미 부엉이 세마리는 리듬감으로 연동되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오.

대칭에 의해서 연동에 의해서 혹은 배경의 질감에 의해서
혹은 구도에 의해서 그 공존의 문제는 해결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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