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로 고정관념이 생긴다. 경험을 고집하여 선입관이 생긴다.
대통령 , 정치가, 리더 라는 언어들이 노무현이란 단어 앞에 딱 버티고 서서 고정관념 선입견이라는 장막을 둘러친다
사상가 노무현...... 철학자 노무현.... (한 가정의) 가장 노무현..... 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인류역사에 반면교사인 사례로
수학 , 철학 이란 언어에 가려서 종교지도자로서의 조직의 리더 피타고라스는 보려 하지 않는다 현대용어인 직업(?)으로 분류하면 , 피타고라스의 직업 직종은 예수 나 붓다 마호멭 과 같은 직업군이다 수학강사 수학교수 수학교사 와 동일직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현대과학에서도 마찬가지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광속불변의 원칙과 상식을 20년간 가지고 있었다. 십대후반에 가진 이 생각을 서른 후반까지 순수하게 간직하다가, '빛의 속도가 일정하면 ' 관찰자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를 수 있다' 는 즉, 나에게 1초가 다른사람에게는 1년이 될 수도 있다' 는 당시로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모순 속에서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는 자신의 원칙과 상식을 양보하지 않았기에 상대성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모두가 아인슈타인을 위대한 과학자로 존경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을 머리가 좋은 과학영재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이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과학의)혁명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학)혁명에 점진적인 변화는 없다" 어느 시점에 떠오른 과학자(리더)의 관의 전환이 혁명의 전부이고 그 후 수십년... 수백년의 변화는 필연적 漸進的 -그럴 수 밖에 없는 -관점의 변화에 따른 그림자일 따름이다. 죽은 사람을 아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산 사람을 온전히 안다는 것? ....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유행가 가사 " 사람(사랑)을 안다(한다)는 것 참 쓸쓸한 일인것 같아..." 생각난다
진정 인간을 본다는 것은..
그 쓸쓸함을 보는 것이다.
원초적인 쓸쓸함.
그것은 미소같은 것이기에 그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볼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가 곧 나이어야만 보이는 것이다.
예수가 누군지 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인 것이다.
노무현을 안다.
그렇다면 그가 노무현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의 신상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를 아는 것이 그를 아는 것이다.
조금더..그를 통해 나를 보는 것 .그것이 안다의 메커니즘이다.
나는 나의 쓸쓸함을 사무치게 안다.
그래서 노무현의 쓸쓸함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아니,단어는 무엇이라도 좋다.
쓸쓸함이 아니라 미소라해도 좋다. 분노라 해도 좋다.
나에게 그것이 있다. 그러므로 안다.
유유상종이다.
스쳐만 가도 그 냄새는 동일하기에 안다.
내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