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구조론 삼국지만큼 좋은 컨텐츠는 없다. 삼국지의 가치는 진실됨에 있다. 삼국지가 진실된 이유는 당대의 기억왕 왕찬이 1차 사료인 영웅기 10권을 썼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가공되기 마련이다. 유표의 식객이었던 왕찬은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당시에 일어난 일을 시시콜콜 기록해 놓았다. 승자의 기록이 아니므로 믿을만하다. 진수의 삼국지는 승자의 기록인데다 내용이 소략하다. 배송지가 영웅기를 비롯한 사서 150종을 참고하여 거기에 주석을 달았다. 우리가 아는 삼국지연의는 영웅기>삼국지>배송지>나관중에 길거리에서 꼬마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팔던 소설가들의 삼국지평화가 가세한 것이다. 거대한 작업이 일어났다. 물론 충분히 왜곡된 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대강을 말하면 삼국지에서 가장 폄훼된 인물은 유비다. 초반에 장비가 한 일과 나중 제갈량이 한 일의 다수가 실제로는 유비가 한 일이다. 중요한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유비의 일은 사소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었을까? 유비가 자화자찬에 나르시시즘에 빠진 떠버리였기 때문이다. 유비 에피소드가 장비의 일화로 왜곡된 이유는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 장비였기 때문이다. 삼국지평화는 길거리의 꼬맹이가 독자다. 꼬맹이의 특징을 반영한 장비가 주목된다. 장비의 모든 행동은 꼬맹이의 행동이다. 안휘현에서 현위벼슬을 할 때 독우를 매질한 사람은 유비 본인이다. 연의에서는 장비의 소행으로 왜곡되는 식이다. 학자였던 제갈량은 초반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제갈량을 띄우려고 유비의 공적을 제갈량이나 서서의 공적으로 둔갑시켰다. 나이 조정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긴 세월 동안 일어난 일이라 상당히 세대차가 나는데 독자들의 긴박감을 위해 마치 10년 사이에 동년배들 간에 일어난 일로 왜곡하다 보니 이상하게 되었다.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논영회다. 연의에서 창작한 내용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일어난 사건이고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 큰 줄기가 결정된다. 이 사건 또한 떠버리 유비가 언플을 해서 유명해진 것이다. 그는 진작에 미디어의 힘을 알고 이용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작고 논영회 때문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왕찬의 영웅기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영웅론이 퍼져 있었다. 조조는 유비를 천하의 영웅으로 봤고 유비를 자신의 오른팔로 삼을 목적으로 좌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유비는 논영회 사건을 원소에게 고자질했다. 원래 조조는 원소의 수하로서 천자를 끼고도 원소에게 일등 벼슬을 내려서 원소를 서열 1위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원소가 조조를 시켜 천자를 구한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동탁 토벌에 참가한 18로 제후는 안심했다. 18로 제후의 거병은 동탁이 임명한 헌제를 부정한 셈이고 그 맹주는 원소이므로 법대로 하면 원소는 역적으로 몰리는데 조조가 구해준 것이다. 사실 동탁 토벌에 열중한 원술은 스스로 천자가 되었고 원소는 유우를 세우려고 했다. 따지자면 원술과 원소에 조조까지 모두 반역자인데 조조가 총대를 매고 문제를 해결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감사하고 우정을 나눌 형편인데 조조가 원소를 졸로 보고 있으며 조만간 토벌할 거라고 폭로해버린 것이다. 이에 원소가 분기탱천해서 조조를 치게 된다. 더 큰 왜곡은 조조의 부하인 유비를 공손찬의 부하로 왜곡한 것이다. 공손찬과 도겸과 동탁은 셋 다 천하의 악당들인데 연의에서는 동탁만 나쁘게 말하고 도겸과 공손찬은 추켜세운다. 유비는 처음 황건적을 토벌하고 공을 세워 벼슬을 받았는데 이렇게 뜬금 벼슬을 받으면 사병을 거느리고 조정의 말을 듣지 않는다. 벼슬을 도로 떼내려고 독우를 보내 감찰했는데 유비는 독우를 매질하고 도망쳤다. 이후 반란군 토벌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고 죄를 사면받는다. 또 벼슬을 받았는데 취임하지 않자 현령을 추가로 내렸는데 유비는 낙양으로 가서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 애초에 유비는 독자세력으로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지방에서의 수령노릇에는 흥미가 없었던 거다. 사병을 해산하기 싫어 튄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18로 제후가 일제히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주모자는 원소와 원술이다. 동탁이 낙양의 원소집안 사람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탁과 싸운 사람은 원술 부하인 손견과 원소 부하인 조조뿐이었다. 유비는 조조의 기병부대로 들어가 싸웠다. 애초에 18로 제후는 한자리에 모이지도 않았고 손견 빼고 낙양에 오지도 않았다. 실제로는 제후들이 주동자인 원소와 원술을 견제하러 온 것이다. 결국 원술이 손견을 시켜 낙양을 먹고 옥새를 챙겨 황제가 된다. 원소는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여 원술과 맞서려고 했다. 황제가 세 명이 될 뻔했다. 원술이 가문의 적통이고 서자 출신인 원소가 6년상을 치렀다지만 원술 입장에서 원씨도 아니고 집안 종놈의 자식이었다. 게다가 원소야말로 낙양의 원씨 가문을 몰살시킨 원흉이다. 원술 입장에서 원소가 원수다. 원술은 옥새를 차지해서 목적을 달성했고 원소는 원술을 견제하려고 서두르다 장안을 탈출한 황제를 조조에게 뺏기는 실수를 저지른다. 조조는 원소에게 벼슬을 줘서 안심시켰다. 세력이 약한 조조는 유비를 이용해 원소 대신 원술을 잡았다.
유비는 조조의 손아귀를 탈출해 원소에게 붙는다. 그리고 관도대전이 벌어진다. 조조에게 몰린 유비는 원소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토벌하기를 기다렸다. 원소는 유비와 조조에 원술과 여포까지 서로 치고받다가 모두 망하기를 바란 거다. 원소는 유비의 명성만 챙기고 교묘하게 유비가 서주를 잃도록 만든다. 남쪽으로 내려가 원술 땅을 차지할 구실을 얻자는 계산이다. 유비는 조조 턱밑의 요충지인 서주에서 원소와 유표를 움직여볼 심산이었다. 원소가 유비를 도와 조조를 막고 유비가 서주를 지킨다면 원소는 얻는게 없다. 패전후 원소에게 의탁한 유비는 배후에서 조조의 식량을 끊고 조조는 궁지에 몰렸으니 원소의 노림수가 맞았다. 원소진영에 내분이 일어나 다수가 조조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조조가 관도에서 이겼다. 조조는 운으로 이긴 셈이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중대한 전략적 오판을 저지른 일은 없다. 애초에 유비를 구하지 않은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고 유비를 이용해 조조의 배후를 끊은 것도 탁월한 지휘다. 망한 이유는 부하들을 경쟁시켰기 때문이다. 박정희도 그런 이유로 멸망하고 손권도 그런 이유로 멸망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다들 그렇게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라이벌 모로를 모함하고 다녔다. 원소가 특별히 못난게 아니고 늙은 것이다. 자식이 장성하면 분열은 필연이다. 조조도 사후에 자식들이 분열했고 이런 점은 사마씨 정권도 마찬가지다. 다들 그런 식으로 망한다. 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중재그룹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개인이 참모를 거느리면 백퍼센트 원소처럼 된다. 원소의 인간 됨됨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원소가 형편없는 자라면 애초에 크지도 못한다. 결과가 나쁘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죽는 법이다. 결과론은 곤란하다. 원소의 결정은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천자를 끼지 못한게 오판이지만 18로 제후의 맹주가 되어 헌제를 부정한게 근본 원인이다. 제후들의 맹주자리를 노리다가 논리적 함정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원술과의 대결구도 때문에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는게 자연스럽다. 원소는 천자에 오른 원술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바르게 판단한다면 천재다. 원소가 천재는 아니다. 공손찬이 역경성을 쌓고 30년치 식량을 비축할 때 동탁 역시 미오성을 쌓고 30년치 식량을 비축한 것을 보면 천하에 대한 야심이 없는 필부의 사고방식은 거기서 거기다. 손권도 부하를 경쟁시키는 원소 짓을 했고 유표도 비슷한 짓을 했다. 거기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그런 구조를 깨는 사람이라야 천재다. 여포가 싸움을 잘한 이유는 여포의 부하들이 각기 사병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이 편제를 바꾸기 전의 13쿠리엥 전투 때 부족장들이 자기 병사를 거느리고 연합군을 편성한 것과 같다. 사병집단을 거느린 장료와 고순이 여포 밑에서 특출나게 잘 싸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배신을 당해서 여포도 죽게 된다. 여포, 원소, 손권, 원술, 유표에 박정희까지 모두 자기 부하들을 경쟁시키다가 죽거나 약화되었다. 원소나 유표나 손권이나 느슨한 군벌연합체를 이루었을 뿐 지역을 완전 장악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어떻게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까? 조조는 원래 하후씨다. 유방의 마차를 몰았던 하후영 후손으로 명문의 후예다. 전투에 임해서는 장수 두 명을 짝지어 보내는데 그중에 한 명은 조씨 아니면 하후씨였으니 집안 사람이다. 괜찮은 감시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다른 제후들은 왜 조조처럼 하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다. 보급문제 때문에 안 된다. 장수를 두 명씩 보내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조군은 괜찮았다. 조조는 어떻게 보급을 해결했지? 청주병을 시켜 식량의 보고였던 서주를 탈탈 털어먹었다. 조조는 여러 번 대학살을 저질렀는데 그 목적은 결국 보급을 손아귀에 틀어쥘 목적이었다. 조조는 대학살로 재물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부하를 완전히 통제한 것이다. 장군을 두 명씩 보내면 서로 다투기 마련인데 조조집안 출신 장군이 보급권을 쥐고 있으면 만사형통이었다. 다른 제후들은 보급을 대지 못하니 전방에 나간 장수가 각자 식량을 조달해야 한다. 이때 주군이 부하를 불러 다른 장수의 지휘를 받게 하면? 보급은 누가 대고? 원술 부하인 손견이 낙양을 공격할 때 원술이 식량을 보내지 않은 일이 있다. 이런 문제로 결국 각자보급으로 가는 거다. 그 경우 먹는 문제에 걸려 지휘권을 뺏지 못한다.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비롯한 반복적인 학살로 많은 재물을 챙겨 보급을 틀어쥔 것으로 전투에는 자기집안 사람을 딸려보내 감시할 수 있었다. 우금과 하후돈이 함께 출정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결국 군대의 지휘권은 보급권이다. 징기스칸이 전투 중에 전리품 챙기기를 금지한 것이 결국 보급을 자기가 틀어쥐겠다는 수작이다. 손권이 적벽싸움에서 50만 대군의 침략에도 겨우 3만 병을 동원한 것은 보급문제 때문이다. 지역 세력으로부터 병사를 넘겨받으면 병사를 먹일 식량을 확보해놓아야 한다. 게다가 대군이 수도를 비우고 멀리 나가있으면 뒤치기 들어온다. 위화도 회군도 고려해야 한다. 10만 병력이 있다 해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숫자는 적다. 적벽대전은 유비가 지휘한 전투다. 강 위에 떠 있는 선단에 불을 질러 죽일 수 있는 숫자는 많아야 1만이다. 화공은 조조의 기세를 꺾는 수단일 뿐 실전은 육지에서 벌어졌고 이때의 병력손실로 조조군은 당분간 전쟁을 벌이지 못했다. 적벽 이후로 유비가 형주를 독식하고 익주로 진출하는데도 조조와 손권은 그다지 한 것이 없다. 조조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고 손권도 적벽싸움으로 얻은게 없다. 이는 적벽대전의 실제 지휘자가 유비였기 때문이다. 조조군이 실제로는 형주의 유표군사인데 형주에서 유비를 지지하는 세력이 조조가 패배하자 대거 유비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이 한 일은 형주지역 지식인들의 여론을 돌리는 선전작업이었다. 적벽대전은 형주의 유표군이 유종편과 유기편으로 나눠 싸운 것이다. 제갈량은 선전작업을 했는데 낙양이 불타고 이각과 곽사에 의해 장안이 쑥밭이 되면서 엘리트들이 대거 형주로 피난을 왔는데 이들은 마음에 드는 주군을 찾아 간을 보고 있다가 일제히 유비편으로 붙었다. 유비는 나중 한중왕이 되면서 또 한 번 조조를 이겼다. 그 외에 제갈량과 서서가 지휘한 걸로 되어 있는 자질구레한 싸움도 유비가 지휘한 것이다. 조조를 두 번이나 이긴 사람은 유비밖에 없다. 그런 유비를 키워준 인물은 조조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아 원소와 원술과 유표를 견제한 것이다. 논영회의 발언은 조조가 원소와 유표와 원술의 협공에서 살아남으려고 기술을 쓴 것이다. 유비는 영웅이 맞다. 조조는 천재가 맞다. 조조는 군벌연합이 아닌 독자적인 지휘를 했고 그 바탕은 학살로 얻은 막대한 재물이다. 이런 짓을 열심히 한 사람은 동탁이다. 동탁은 싸움마다 지는게 특기다. 그런데도 천하를 거머쥔 것은 어떻게든 대군을 유지했기 때문이고 그 비결은 그냥 백성을 학살한 거다. 조조는 동탁에게 배웠다. 무조건 자기 병력을 장악하고 내 돈으로 먹여야 한다. 각자 알아서 먹으라고 하면 말을 듣지 않는다. 먹일게 없으면 민중을 학살하면 된다. 무조건 주변 연합세력보다 많은 직속부대를 거느려야 하며 보급을 자신이 틀어쥐어야 한다. 군대는 먹는게 핵심이다. 이걸 조조는 배운 대로 실천했다. 동탁이나 조조나 비슷한 인간이었다. 군대는 밥이다. 밥을 주지 않으면 병사는 싸우지 않는다. 알아서 먹으라고 하면 그때부터 말을 안 듣는다. 말 안 듣고 돌아다니는데 어디 갔더냐고 물으면 밥 먹으러 갔다고 둘러댄다. 이 변명 먹힌다. 이게 인간의 본질이다. 밥을 줘야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사기가 어떻고 애국심이 어떻고는 개소리다. 밥만 제때 주면 말을 듣는다. 조조는 여포와 원술과 원소와 유표의 협공을 받아 살기 위해 학살을 저지르고 이에 추락한 명성을 회복하려고 유비를 좌장군으로 띄워준다. 유비는 조조에게 이용당한 사실을 알고 발을 뺀다. 그때부터 유비는 천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지식인은 조조의 학살을 보고 동탁과 같다고 생각했다.
결론.. 1) 실제 역사적 사실이 소설보다 재미가 있다. 2) 우리는 그냥 원소바보 하지만 사실 그럴 만한 내막이 있다. 3) 조조는 천재지만 동탁과 마찬가지로 민중을 학살해서 끌어모은 재물로 군대를 장악했고 이것이 이후 중국사를 망친 원인이 된다. 유비는 서주의 부자인 미축에게 투자받아 군대를 일으켰다. 황건적을 칠 때도 상인에게 정당하게 투자를 받았다. 4) 유비는 백성을 살해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명분싸움을 이겨서 문재인이 포레스트 검프 하듯이 삼국지의 많은 장면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원소와 조조의 정면충돌은 유비의 작품이고 그 배경은 논영회다. 5) 유비가 너무 뛰어나므로 캐릭터의 균형을 맞추다 보니 한국에서 제갈량이 뜨고 일본에서 조조가 뜨고 중국에서 관우가 뜨고 어린이들에게는 장비가 뜬다. 이제 진실을 말하자. 싸움을 잘한게 아니고 학살을 잘해서 끌어모은 재물로 성공한 사람이 동탁, 공손찬, 도겸, 조조다. 부하들에게 권력을 넘기거나 부하를 경쟁시키다가 망한 사람이 원술과 여포와 유표와 손권과 원소다. 학살도 하지 않고 권력도 나눠주지 않고 부유한 장사치에게 투자를 받은 사람은 유비다. 유비만 창의적이었다. |
역시 삼국지! 해석은 무궁무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