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증명 이런 주제는 원래 오해되기 쉽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종교적 본성이 있다. 그 본성과 충돌한다. 극복해야 한다. 기를 쓰고 오해하고야 말겠다는 분은 강퇴된다. 오해할 사람은 얼른 오해하고 냉큼 꺼져주기 바란다. 오랫동안 글을 쓰다보니 그동안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게 되었다. 좋지 않은 경험들이 누적되니 피곤하다. 그래서 이런 경고를 때리는 거다. 신의 증명은 법정의 증거나 수학적 증명과 다른 거다. 성경책에서 단어나 문장 따위를 발췌해서 증거댄다는 식으로 나오는 박진영 초딩들은 일단 꺼져주기 바란다.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학적 증명과도 다르다. 수학은 전제와 진술의 전개구조에서 전제를 충족시킨 다음 진술을 해명한다. 연역의 출발점이 되는 제 1 전제는 원래 증명되지 않는다. 이를 공리나 공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증명된다. 진술에 대한 메타진술이 나오고 최초의 진술이 그 메타진술의 전제로 유효하게 기능할 때 공리나 공준을 증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공식을 적용해서 문제가 풀리면 그게 증명된 것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치료되는지 몰라도 환자가 치료되면 일단 약효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구조론의 증명은 이와 다르다. 동치임을 보이는게 아니다.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가 아니란 보장은 절대로 없다. 아니다. 게임 속의 아바타라도 상관없다. 의사결정단위가 존재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타자에 대해 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를 가르는 대칭과 호응의 구분선이 존재하면 설사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라도 상관없이 나는 있다. 무슨 뜻인가?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라 치고 나는 나의 존재 이전에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그 게임을 하는 게이머와 무관하게 나에 종속된 것들 곧 나의 마음, 나의 육체, 나의 직업, 나의 재산, 나의 권리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즉 내가 전제일 때 진술에 해당하는 즉 나에 종속된 것들을 내가 컨트롤 하는 데서 내가 증명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나의 재산과 권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나는 없는 것과 같다. 이건희는 죽은 것과 같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과 권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자.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간 그 사람은 과연 나일까? 아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만약 천국이 있다 해도 당신은 죽고 누가 당신 티켓을 훔쳐서 대타로 가는 거다. 인도인의 환생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죽어서 소로 태어나든 개로 태어나든 부자로 태어나든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다. 또 이런 것을 생각해보자. 마술사가 자신을 복제하여 둘로 만든 다음 하나를 죽였다. 영화 프레스티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는 죽은 것일 것일까 살아있는 것일까? 죽었으면서 살아있는 것일까? 또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5억년 알바라는 만화가 있다. 당신이 버튼을 누르면 어느 별나라로 가서 5억년간 유폐된다. 5억년 후에 돌아오면 그동안 지구 시간은 정지해 있고 당신의 뇌에서 5억년 간의 기억이 지워지며 당신은 알바비로 1천만원을 챙긴다. 이때 당신은 5억년 동안 어느 별에서 개고생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버튼을 눌러야 할까? 그렇다. 5억년간 다른 사람이 대신 고생한 것이다. 5억년의 고생은 당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도소에는 5만 명의 알바들이 적은 보수를 챙기며 일하고 있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사건은 사건의 단위가 있고 사건단위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복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칭과 호응이다. 대칭의 작동범위 안에서만 나다. 내가 호응하는 부분이 나에 해당하며 호응이 끊어지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사건이 끝났기 때문이다. 신의 증명은 허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구조론의 신이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수학적 증명은 의미없다, 구조론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조론적 증명은 의미없다. 구조론의 제자에게만 유의미하다. 또 신이 당신이 믿는 그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염난 할아버지 신은 기독교의 것이며 공자와 노자의 신은 다르다. 신의 개념은 문화마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다. 또 신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개미에게 신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사이즈는 사건의 사이즈와 정확히 같다. 큰 사건 앞에서 신은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신은 작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사건에 속하므로 신의 존재여부가 유의미하지 않다. 역사단위 그리고 문명단위의 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혹은 큰 사건에 가담한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유의미하다. 이 글을 읽는 다수의 독자들에게 신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그런데 있다. 당신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신의 존재가 과연 당신에게 좋은 소식인지는 의문이지만. 신은 공리와 같다. 그 공리를 적용해서 문제가 풀리면 공리는 인정된다. 이건희와 같다. 신이 신에 속하는 많은 영역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신은 없다. 이건희는 존재가 없다. 법적으로는 이건희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되겠지만 말이다. 법은 법이고 구조론은 다른 거다. 구조론은 그 통제되는 부분과 통제되지 않는 부분을 밝힌다. 사건이 결정한다. 존재도 사건이요 나도 사건이요 우주도 사건이고 신도 사건이다. 어쨌든 당신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증명은 안 되겠지만. 이와 같다. 사실은 당신의 존재도 증명된다. 당신의 행위에 의해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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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성으로서의 신 또한 자신을 섬기는 인간보다 자신의 의사를 대변해주는 인간에게 대표성과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서 큰 사건의 완결을 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