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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오돌
read 3326 vote 0 2013.08.09 (15:58:01)

그간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설국열차를 통해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서와 같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자? 개봉 국가? 관객층? 작품성? 뭐 어떤 이유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가 영화에 영향을 준건 분명할 테니. 아무튼 지금 나를 비롯한 한국 관객은 <설국열차>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이거 뭐지?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 또는 “별것도 아닌 게 장황하기만 하네. 봉준호 스타일도 아니잖아. 나름 재미는 있네. 볼거리도 있긴 해. 누군가는 이 영화에 열광할 수도 있겠다.” 정도. 이들은 지난날 흥행한 한국인의 감성이 잘 묻어났던 한국영화를 기대했거나 헐리우드의 흥행공식이라는 프레임에 이 영화를 끼워 맞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봉준호는 이상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순 없겠고 한 마리만 잡는 건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만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던지. 좋은 영화든 실패한 영화든, 아니면 시도만 좋은 영화든 그건 나중 얘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이 영화는 ‘벽과 공포’다. 내용상 꼬리칸과 머리칸의 계급적 나뉨. 혁명, 인류, 각계각층의 사람들. 착취와 차별. 구조적 모순과 도전. 그리고 좌절, 순응. 절대자라든지 빅브라더스의 변형태. 모두 좋은 얘기다. 기차의 구조는 크게는 전 지구를 축소해 놓았고 그보다 작게는 국가들. 어찌보면 강대국과 약소국. 더 작게는 한 국가. 마치 북한 사회라든지 70-80년대 한국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내가 어린 시절 반 아이들과 외던 국민교육헌장과 닮아있다. 더 작게는 한 개인의 정신세계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엔 모두 벽에 막혀 있고 단절과 부조리는 외부의 공포로부터 합리화된다. 그건 열차를 지구에 비유하든 국가에 비유하든 개인에 비유하든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열차는 달렸고 눈덮힌 외부는 공포의 대상이다. 열차는 ‘벽’이고 설국은 ‘공포’다. 빙하기가 되고 무임승차해서 꼬리칸에서 고통 받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벽이 열차가 아니어도 괜찮고 공포가 설국이 아닌 어둠이라고 해도 관계없다. 벽을 넘는 방법은 열차를 멈추는 것이고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공포에 맡서는 것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실현했다. 하지만 이게 현실에서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여자는 결혼 전에 섹스를 하면 안됐다. 시집을 가면 시어머니가 때려도 참고 살았고 남편이 첩을 두어도 참고 살았다. 왜?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처음에는 누군가 그래야 한다고 시켰겠지만 성인이 된 조선시대 여자는 스스로 그것을 신념처럼 생각했다. 또는 영화 <나쁜 남자>에서 여주인공은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창녀의 삶을 받아들인다. 구한말 노예제가 폐지됐지만 많은 종들은 모시던 주인 밑에서 계속 일했다. 나갈 수 있어도 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거나 그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우리는 아직도 노예다. 윌포드의 교육을 받은 엔진의 노예든 어떤 자본의 노예든 말이다. 왕따를 당하는 한 학생을 예로 들자. 왕따 당하면 학교 안가면 된다. 학교라는 벽으로부터 나오고 부모라는 공포에 맞서면 된다. 더 나아가 미래에 발생할 저학력자라는 공포에 나름대로 맞서면 된다. 하지만 아이는 왕따를 당하면서 끝없이 학교에 간다. 그리고 학교 옥상에서 자살한다. 이게 뭔가? 학교의 폭력에 맞설 수 있다면 학교에서 스스로 이겨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자살을 할 정도면 그냥 학교 안가면 고만인데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벌써 윌포드의 엔진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시대 여인처럼.

지금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메우고 있다. 지난 4.19처럼 87년처럼 마치 커터스의 지도하에 엔진칸(청와대)까지 간다고 해도. 우리는 엔진칸의 운전자 하나를 바꿀 뿐이다. 열차는 계속 달리고 공포 역시 멈추지 않는다. 민주진영 지도자라던 YS는 엔진칸에서 윌포드와 3당합당 한다. 이게 현실이다. 아무도 벽을 넘진 못한다.

이 얘기를 봉준호는 거시적으로 얘기하고 싶었다. 심리를 이용해 스릴러로 끌고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미시적 이야기가 된다. 감성을 자극할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규모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왕 투자받아 하는 거 미시적인 부분을 뺀 것이다. 그게 한국 관객을 실망시켰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영화의 흥행과 상관없이 영화의 메시지는 벽을 뚫고 공포와 맡서는 이야기. 그랬더니 희망이 있더라. 뭐 그런 거다. 우리는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독일인처럼 우리도 가로막힌 휴전선을 뚜벅뚜벅 넘어갈 수 있을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럴 수 있는 작은 희망(환경: 비행기가 꼬리에서 몸체를 드러내고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듯이)이 우리에게도 생길까? 다음 상상은 알아서 하시라. 마지막 살아남은 소녀와 소년의 눈빛에서처럼. 영화의 메시지도 알아서 자신에게 맞게 적용하시라. 그게 관객의 특권이니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빙하기도 아닌데 열차 안에 갇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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