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 말 나온 김에 언어를 보태자.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왜 생겼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의도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너 행복을 원하지 않아? 그렇다면 나를 따라와!’ 이런 거다. 가만있는 산초를 돈 키호테가 꼬신다. ‘너 폼나는 기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나를 따라와.’ 행복이라는 단어로 인간을 꼬시는 거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되는 나약한 존재다. 수동적으로 환경에 반응한다. 행복감은 감정반응이다. 그 감정에 중독된다. 행복에 중독되므로 패배한다. 환경을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 자신이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행복에 중독되지 말아야 한다. 돈 키호테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노자의 비겁함을 버리고 공자의 유쾌함을 얻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없다. 호연지기가 없다. 담대함이 없다. 도전하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에너지는 약해진다. 5살 꼬마는 하루종일 뛰놀아도 기운이 넘친다. 할아버지는 그러지 못한다. 누군들 에너지가 넘치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봄볕에 졸고 있는 고양이처럼 나른한 행복감을 원한다면 이미 영혼이 죽은 것이다. 기운찬 젊은시절이 좋다. 보수꼴통들은 에너지가 없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걸핏하면 나라가 걱정된다고 떠들어댄다. 자신의 에너지 없음을 걱정해야 한다. 에너지라는 말은 불편하다. 이건 물리학 용어 아닌가? 그래서 완전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열정이라는 표현도 동원하고 성聖이라는 개념도 가져와본다. 어느 쪽이든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정신차리는 것이다. 깨달음이 추구하는 것도 정신차리는 것이다. 정신차리면 보일 것이 보인다. 보일 것이 보이면 만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만날 사람을 만났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 노무현은, 김구는, 이순신은 만날 것을 만나 에너지를 얻었다. 빌어먹을 김훈은 이순신이 죽음 앞에서 좌고우면했던 것처럼 사기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물러나지 않고 싸운 것은 인격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애국심 때문도 아니다. 용감해서도 아니다. 단지 싸우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에너지가 쏟아진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긴 변희재도 못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흥분해서 설쳐댄다. 그것도 에너지라면 에너지다. 노무현과 김구는 밑바닥 출신이다. 춘원 이광수와 이승만은 엘리트 출신이다. 출신성분이 다른 것이다. 밑바닥 출신은 위를 바라보므로 천하를 만나게 되지만 엘리트 출신은 아래를 바라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므로 태산의 높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 마음 속에 뜨거운 불을 붙여 에너지를 끌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줄세우려고만 한다. 통제하려면 구조론의 마이너스를 써야 한다. 누군가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숙한 엘리트의 방법이다. 김구는 복제한다. 노무현은 복제한다. 무엇인가? 엘리트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마이너스로만 운용이 가능하다. 노무현과 김구는 외부에서 자원을 끌어온다. 기름을 아껴쓰는게 아니고 송유관을 연결한다. 외부와 연결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무한복제된다. 행복하려는 사람들은 기름을 아껴쓰려는 엘리트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 불타오르려는 사람이 진짜다. 그들은 아끼지 않는다. 무한복제하고 무한히 퍼준다. 그것이 깨달아야 할 완전성의 세계다. 막힌 것을 뚫어서 두 세계를 연결시킬 때, 만나야 할 것이 만나게 될 때 그것은 가능하다. 안희정과 문재인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한정된 자원을 운용하는 엘리트의 사고방식인가 외부에서 끌어오는 지도자의 사고방식인가다. 안희정은 공무원 마인드다. 영웅은 되지 못한다. 영웅은 난국을 타개하고 길을 뚫고 방해자를 제거하고 두 세계를 연결시켜 다른 토대로 올라선다. 행복은 결과다. 위하여다. 에너지는 원인이다. 의하여다. 인간은 행복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에 의하여 행동하는 존재다. 행복을 위하여는 누가 자꾸 물어보니까 둘러대는 말에 불과하다. ‘네가 원하는게 뭐야?’ 하고 피곤하게 물으니 대답이 궁해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인간은 원하는게 없다. 단 불이 옮겨붙는다. 가만있던 사람의 마음에 돌을 던진다. 물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증폭된다. 무한복제된다. 불길은 사방에 옮겨붙는다. 인간은 그렇게 강해진다. 그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에너지며 기운이며 완전성이며 깨달음이며 진리이며 역사의 진보이다. 역사는 격리된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형태로만 진보한다. 고립되면 만나지 못하고 숨는다. 동굴에 숨어서 2채널 일본 네티즌들처럼 ‘난 일본에서 태어나서 참 다행이야.’하고 자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없다.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영혼이 식었다. 거의 죽음에 가까워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틀린 질문이다. 인간은 무엇에 반응하는가? 이것이 바른 질문이다. 인간은 완전성에 반응한다. 주파수가 다르면 반응하지 않는다. 인간은 운명적인 만남에 반응한다. 범종과 당목이 만나 웅장한 소리를 내듯이 만날 사람이 만났을 때 인간은 전율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에 반응하는가? 이 질문이 진실하다. 인간은 신성神聖에 반응한다. 화가들은 그림에서 그것을 포착하고 음악가들은 소리에서 그것을 포착한다. 이야기에도 그것은 있고 사건에도 그것은 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며 부단히 공간을 만들어내고 주변을 호응시킨다. 잠들어 있던 당신을 벌떡 일어나게 만든 그것 말이다. 인간이 원하는건 없지만 반응하는 것은 있다. 당신은 무엇에 반응하는가? 바보도 미녀에게는 반응한다. 고양이는 쥐를 보면 달려든다. 다이아몬드 반지에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당신을 깨워 일어서게 하는가? 그것은 연결이다.
만날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를 취한 자는 모두 행복해졌지만 단지 행복만을 추구한 자는 거의 행복하지 못합니다. 공부를 한 사람은 좋은 성적표를 받지만 좋은 성적만을 추구한 사람은 거의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합니다. 원인이 아닌 결과를 쳐다보는 자는 절대 답을 찾지 못합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사람을 꼬시는 얍삽한 단어에 불과합니다. 저급한 꼬드김에 넘어가지 마시길. |
종교에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한다는 거지요.
거짓말이 허용되면 목사들의 끼워팔기가 생겨납니다.
종교 그 자체의 목적은 온데간데 없고
목사와 승려들이 개인적인 욕심을
마치 종교의 가치인양 사기치는 겁니다.
신을 만났기 때문에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바른 말이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신을 만나라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기독교는 유태교에서 나왔는데 유태교는 천국이 없습니다.
천국 어쩌구는 이슬람교와 힌두교 영향을 받은 거죠.
구원이라는 개념이 나쁜건 아닙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가 개소리라는 거죠.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충족시키는 장치이며
사회적 본성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은 맞습니다.
인간은 집단과 긴밀해지는 데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하고 목사와 승려들이 끼워팔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할을 철학이 대체해야 하는데
철학자가 대체로 바보라서 현실적으로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는 거죠.
동렬님 말씀을 종교에다 갖다 붙이면...
에너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 한 것인데,
종교는 가르치기를
"구원(행복)을 얻기 위해 신을 만나야 한다"
따라서 종교에는 에너지가 없다.
이건가요?
기독교로 말하자면,
예수는 에너지로 살았는데
교회는 예수에게 있는 에너지에는 관심이 없고 구원타령 행복타령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대충 이해를 한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