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섹스는 관계의 시작이다 30대 중반의 남자. 파트너와 정신적인 교류는 없고 섹스에만 골몰하고 있다. 한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니 질린다. 몸만 탐하는 타락한 사람인 것 같아서 괴롭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는 없을까? 한심한 질문이다. 한심한 사람이 이런 한심한 질문을 하는 것이며 원래 한심한 사람은 답이 없다. 사랑은 예술이다. 예술가는 예술가의 끼가 있어야 한다. 멋진 사랑 하려면 사랑가의 끼가 있어야 한다. 모두가 예술가로 될 수 없듯이 모두가 사랑가는 될 수 없다. 사랑가의 소질이 없으면 포기하도록 하자. 소설과 TV가 사랑에 대한 터무니없는 판타지를 퍼뜨려서 대중을 압박하고 있다. 대중을 아주 사랑교 광신도로 만들려고 한다. 쿨하지 못하게 말이다. 철학자가 상업주의 TV의 장삿속에 부화뇌동하면 안 된다. 강신주의 답변은 길게도 써놨는데 대개 독자에게 아부하는 사랑타령, 섹스찬양이다. 책 한 권 더 팔아먹으려고 아주 기를 쓴다. 남자의 몸도 악기인데 내담자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임자를 못 만났다고. 남자 몸을 만질 줄 아는 여자를 만나면 질리지 않고 관계 유지할 거라고. 섹스는 관계의 시작이라고. 한국사회는 섹스를 금기시해서 문제라고. 얼굴 쓰다듬고 머리카락 만져주면 기분이 좋아져서 관계가 지속된다고. 사랑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이라고. 진정한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몸을 연주해서 꽃을 피웠느냐에 있다고. 진정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버리라고. 사랑은 정신이 아니라 몸이라고. 몸을 만져주라고. 이런 소리를 아홉페이지나 써놨는데 추한 이야기라 더 언급하지 말자. 하여간 이런 소리는 머저리들이 술먹고 제정신이 아닐 때나 하는 소리다. 호모 사이엔스 이래 인류사가 10만 년이라면 사랑이 논의된 것은 근래 300년도 채 안 된다. 스탕달의 '적과 흑'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사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대사회에도 사랑이야기는 있었지만 극소수 귀족의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적이냐 흑이냐 사랑이냐 출세냐다. 사랑도 출세의 방편이다. 적은 귀족부인을 꼬셔서 출세하기다. 춘향이 몽룡을 꼬셔서 출세하는게 적이다. 흑은 사제신분을 얻어 출세하는 것인데 사회의 기성질서에 순응하기다. 당시만 해도 카톨릭 사제는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불타는 야망을 간직한 사나이가 갈림길에서 선택한다. 위험한 사랑으로 출세할 것인가 아니면 기성질서에 순응해서 출세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출세의 야망을 깔고가는 것이다. 내담자가 동물적인 섹스에만 탐닉하는 것은 신분상승의 욕구가 없는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호르몬이 나와주면 섹스를 하는 거다.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사회적인 신분상승의 야망이 있기 때문이다. 꼭 출세하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야망이 아니라도 인간에게는 많은 계획이 있고 꿈이 있다. 해보고 싶은 것이 매우 많다. 해보고 싶은 게 원래 없다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산에도 가보고 싶고, 바다에도 가보고 싶고, 외국에도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기 싱거우니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다. 인생이 긴 여행이라면 여행길에 파트너가 필요하다. 매번 파트너를 바꾸면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원래 아무런 인생의 계획이 없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여름산이 궁금하지 않고, 가을바다가 궁금하지 않고, 사랑의 다음 단계가 궁금하지 않으면? 섹스로 끝나는 거다. 그런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거창한 야망과 드높은 이상은 이에 걸맞는 높은 자존감에서 나와주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존감이 낮고 지능이 떨어지거나 혹은 취향이 단조롭다. 예컨대 재즈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재즈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이야기해줄 것이 너무 많아서 관계를 끊지 못한다. 아직 뱉어내지 못한 내 안의 말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 것이다. 누구든 나한테 말 걸면 구조론 강의를 3년은 들어야 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아야 관계가 지속된다. 사랑은 야망이다.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망이 없는 거다. 정신이 거세된 즉 혼이 죽은 사람이다. 강신주가 강조하는 몸의 연주도 필자가 말하는 사랑의 여러 가지 계획 중의 하나에 속하겠으나 그거 초딩 수준이다. 강신주 주장은 오늘은 파트너와 무릎베개를 해보고 내일은 다른 체위로 응응응을 해보고 하는 식이다. 유치하긴. 그게 나쁜건 아닌데 사랑의 백분의 일 정도 비중이다. 사랑은 적과 흑의 대결이다. 우병우 같은 출세주의자는 흑을 선택한다. 마크롱 같은 운명주의자는 적을 선택한다. 사랑이냐 출세냐가 아니라 운명이냐 노력이냐다. 우병우는 무진장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문재인은 노력하지 않았다. 출세할 생각이 없어서 네팔로 튀고 부탄에 숨었는데 운명에 발목을 잡혔다. 노력과 운명의 대결에서 운명의 길을 걷는 게 사랑이다. 그러나 실패한다. 용케 마크롱은 대통령이 되었다. 보통은 쥴리앙처럼 죽는다. 노무현이 죽은 것도 운명이고 문재인이 당선된 것도 운명이다. 사랑은 그 운명에 도전하기다. 마크롱이 고딩 때 교사였던 부인 브리짓 트로뉴를 사귀었던 것은 프랑스를 타격하려는 야망 때문이다. 사랑의 크기는 야망의 크기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인 출세의 야망인 것은 아니다. 집단의 중심을 치려는 무의식의 명령이다. 마크롱이 나중 대통령 되려고 선생님과 연애했겠는가 말이다. 담대하게 무의식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신적인 귀족의 것이며 그런 대담한 야심이 없는 소시민은 그저 섹스에나 탐닉할 뿐이다. TV드라마는 그 야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오늘도 TV에는 사랑타령이 넘치지만 그게 야망을 판매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이 자본주의 시스템과 잘 어울리는 상품이긴 하다. 야망이 없는 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 자기 안에 넘치는 이야기가 없다면 사랑할 자격이 없다. 꿈이 없다면 사랑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신분상승의 열망이다. 우병우처럼 기성질서에 순응하여 출세하거나 혹은 마크롱처럼 기성질서를 타격하여 출세하거나다.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우병우가 되는 것이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마크롱이 된다. 사랑은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짝 미소만 지어줘도 한 달간 행복해진다. 왜? 내 안에 쌓아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몸이 아니라 뇌로 하는 것이다. 10대 사춘기 시절부터 무수히 생각한 것들이 내 안에 축적되어 있다가 한순간 반응하는 것이다. 섹스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그런 반응이 없다. 미소를 지어줘도 3분 만에 잊어버린다. 손끝만 닿아도 한 달간 전율해야 사랑이라 할 만하다. 이불킥이라는 말이 있지만, 눈만 한 번 찡긋해도 한 달간 밤잠을 못 이루며 이불을 차게 된다. 평소에 생각해둔 게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반응이 없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러한 반응이 약하다.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신체접촉으로 어디를 터치해야 반응이랴? 꿈을 공유하는 동지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내 안의 꿈이 반응하는 것이다. 예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운명이라서 사랑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배척된다. 돈이 없으면 백화점 문 앞에서 밀려나고, 공부가 없으면 명문대 교문에서 밀려난다.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릴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고 꿈을 공유한 동지임을 확인해 준다면 목숨을 걸 수가 있다. 그럴 때 평소에 쌓아둔 내 안의 이야기가 끝없이 쏟아져서 세라자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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