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주의로 밀어보자.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우리가 패배한 이유는 물론 지역주의 망령에 따른 기울어진 축구장 때문이지만 이는 불가항력적인 조건이니 논외로 하고 볼 때,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이념의 종언’에 있다. 반대로 그 전 몇 차례의 선거에서 우리가 승리한 이유도 역시 이념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는 우리에게 지도자가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은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경제가 성장한 지금 이념적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큰 인물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지식인은 권위를 잃어버렸다. 지구온난화문제, 환경문제, 생태주의 이런 걸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만 역효과만 있다.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에 빠져 있는데 천성산 도롱뇽이 더 이상 이목을 끌지 못한다. 이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과거의 사회주의는 21세기의 이념이 될 수 없다. 인류에게 정신적 가치는 개인에게 있어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이다. 집단의 목표는 역시 집단의 ‘존엄, 자유, 평등, 박애, 정의’ 밖에 없다. 정치는 집단의 의사결정이므로, 이념은 집단의 가치를 추구하며 집단의 가치는 ‘존엄, 자유, 평등, 박애, 정의’다. 결국 이념의 답은 존엄에 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존엄, 자유, 평등, 박애,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다섯 개의 가치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존엄을 현실에서 구체화 하면 자유가 되고, 자유를 구체화 하면 평등이 되고, 나아가 박애와 정의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은 쉽게 접수가 되는데 박애는 또 무엇인가? 기독교 영향인가? 필자의 진단으로는 이 셋이 별도의 가치가 아니라 한 줄에 꿰어 사건의 기승전결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사건이 촉발되는 기 단계는 자유인데 승과 전과 결로 계속 진도를 나가면 절로 평등과 박애가 되는 것이다. 자유는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의 제멋대로 돈벌이할 자유다. 그러자 뿔난 농민들은 모두 왕당파에 붙었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부르주아는 농민을 설득하려 하지만 농민에게는 지도자가 없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와 농민의 공동전선은 불가능하다. 농민은 의사결정을 위한 지렛대를 얻으려 하고 그 경우 반사적으로 왕당파에 붙게 된다. 왕은 한명이기 때문에 의사결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도 마찬가지다. 조직되지 않은 하층민은 무조건 왕의 편에 선다. 새누리당 찍는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계몽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다. 협상할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다. 그거 인위적으로 안 만들어진다. 지금 야당도 지도력의 부재 현상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농민들을 동원하려면 한명씩 붙잡고 계몽할 것이 아니라 먼저 농민지도자를 양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이념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온 개념이 평등이라고 본다. 노동자 농민만으로 부족하다. 여성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고, 외국인도 있고, 별의별 인간군상들이 존재하여 있다. 이들을 규합하려면 박애까지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유, 평등, 박애는 부르주아 계급만으로 안 되니까 더 많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서, 이에 필요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그 지도자가 들어올릴 깃발을 만들어 준 거다. 지도자가 들어올릴 깃발 바로 그것이 이념이다. 지도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되는게 아니고 이익을 줘야 한다. 부르주아들은 자유의 쟁취로 확실히 이익을 얻었다. 장사꾼이었던 그들은 왕의 각종 규제를 피하고 세금을 깎았다. 그러나 이익은 농민이나 그 외의 다양한 세력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거다. 말이 쉽지 잘 안 된다. 역시 구조의 문제다. 이념은 존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가짜다. 자유, 평등, 박애는 존엄을 구체화 한 것이며 정의는 애프터서비스다. 자유, 평등, 박애까지 해도 역시 불우한 사람은 존재할 수 밖에 없는게 사회이므로 정의로 구제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미국 흑인들이 정의를 부르짖는데서 보듯이 공정한 경쟁만으로 부족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소극적 공정은 실패한다. 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하면 머리 좋은 자들이 편먹고 교묘하게 그 제도를 우롱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 눈 먼 제도가 잔머리의 대가인 인간집단을 이기겠는가? 그렇다면 ‘정의의 신’이 필요한 거다. 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저질러진 사건을 공정하게 판결하는 것으로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선제대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한 정의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잘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까지 합리적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을 공정하게 경쟁시키는 것은 절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백인이 편 먹고 흑인을 엿먹이는건 쉽다. 흑인들이 경찰시험에 탈락해서 그 도시에는 백인경찰만 존재하니까. 기계적 평등으로 부족하고 그 이상의 '공격적 정의'가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백인 하층민들이 역차별이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정의는 우주 안에 있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신’을 호출해야 한다. 그것은 존엄, 자유, 평등, 박애, 정의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사건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존엄이다. 무엇인가? 지금 현재 상태에는 절대 정답이 없다. 미래를 끌어들이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미래를 끌어들이는 방법은 사건의 기승전결 프레임 안에서 기에 서는 것이다. 그것이 '대한국주의'다. 하부구조에는 답이 없으므로 상부구조로 올라선다. 제로섬 게임으로는 발전이 없으므로 열린사회로 간다. 세계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제한된 지역 안에는 절대 답이 없으며 세계로 나아가야 진정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모택동이 일거에 중국을 뒤집어 엎을 수 있었던 비결은 중국을 바꾸겠다고 하지 않고 세계를 다 바꾸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을 바꾸는 걸로는 중국인의 흥미를 끌 수 없다. 세계를 바꾼다고 해야 중국 하나라도 바뀌게 된다. 당시 중국은 향당을 중심으로 가문집단이 무장하고 내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중국을 바꾸려면 수백년간 해오던 가문간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 그 경우 모든 가문이 적대가문에 대해 가진 복수권리를 잃는다. 이는 심리적으로 큰 손실이 된다. 태평천국의 난도 가문세력의 발호 때문에 혼란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된 것이다. 이웃 현의 장씨가문이 거병하기 전에 우리 양씨가문이 먼저 거병하여 쳐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경쟁이 되었다. 장개석 군대의 만행도 군벌들이 이 기회에 적대가문을 쓸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원래 봉건사회는 모든 가문과 가문이 잠재적인 내전상태로 되어 있다. 모든 인디언 부족은 이웃부족과 잠재적 전쟁상태다. 쿠르드족도 부족간 내전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아랍과 아프리카의 혼란상은 모두 그러한 이유가 있다. 모든 부족집단은 이웃부족에 대해 '복수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권리의 상실은 심리적인 재산손실이다. 대체재가 필요한 것이다. 장개석은 국공내전을 주장했고 모택동은 대체재로 항일전쟁을 주장했다. 여기서 결판이 났다. 내전에서 외전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는 모든 제국의 황제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일본 역시 전쟁을 일으켜 외부로 관심을 돌리는 방법으로, 일본 내부에서의 갈등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존엄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대체재다. 인간은 존엄을 원하며 그것은 내부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전쟁 외에 존엄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쟁을 한 것이다. 이념은 인간이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존엄을 얻게 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더 큰 인류 단위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가 일정부분 그 일을 했다. 그들은 존엄을 얻기 위해, 큰 성당이나 사찰을 지었다. 영국인은 존엄을 얻기 위해 스콧을 남극에 보내고, 힐러리를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올려보냈다. 미국인은 한 술 더 뜬답시고 달에 암스트롱을 보냈다. 중국인도 뒤늦게 달에 사람을 보내려 하고 있다. 결론은 인류의 대표성을 부여하는 높은 단위의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사결정에 나서야 한다. 에베레스트를 밟은 힐러리는 인류의 대표자다. 그런 대표성을 확인할 때 인간은 존엄을 느낀다. 강정호야 개인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이지만, 한국을 대표하여 간 것이라 느끼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대한국주의가 필요하다. 대한국주의라는 표현은 오해를 부를 수 있지만 오해해도 좋다. 왜 대한국주의인가? 새누리와 야당이 모두 소한국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대大는 크다는 뜻인데 영토가 크거나 경제규모가 큰 뿐만 아니라,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다. 큰 일이 일어나야 대표성이 주어진다. 교착된 현실을 타개하려면 대체재가 필요한 것이며, 대체재는 상부구조에서 획득되며, 상부구조로 올라서는 방법은 대표성의 획득 밖에 없다. 여야에 만연한 소한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지엽말단주의, 쇄말주의 극복해야 한다.
* 새누리의 소한국주의 - 작은 정부, 작은 복지, 강소국 전략 등 새누리가 작은 한국을 주장하는 이유는 큰 기업을 앞세우기 낯간지러워서이다. 그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업에 영혼을 팔아먹은 쓰레기들이며, 작은 정부 주장은 국가를 기업 통제권 안에 가두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야당이 작은 한국을 주장하는 것은 멍청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아이디어가 지방선거에는 도움이 된다. 일본공산당 주특기 풀뿌리운동 있다. 풀뿌리운동, 환경운동, 생태주의 따위가 지방선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선전략은 되지 못한다. 존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왜? 대표성이 없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좋으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대표성을 느끼는 방법은 TV에 나오는 것인데, 환경운동 해서 TV에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류현진은 TV에 맨날 나온다. 차라리 류현진 응원에서 대표성을 느낀다. 환경운동을 민주적으로 하고, 매번 선거와 집회를 하며, 그때마다 앞자리를 챙겨준다고 해도, 발언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다지 존엄을 느끼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TV에 안 나온다. 귀찮을 뿐이다. 결국 새누리나 야당이나 모두 '작은 한국'에 매몰되어 있으며 새누리는 기업에 나라 팔아먹었고, 야당은 TV에 나올 듯 잘 안 나와서 망한 거다. 대표성 부재로 존엄의 실패다. 어떤 사람이 환경보호를 위해 나무 위에서 3년간 내려오지 않았다고 대표성이 부여되나? 손흥민의 한 골에 더 열광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12월에 전쟁난다고 호들갑 떤 홍혜선은 TV에 나오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대표성을 느껴보자는 거다. 종편에서 한 번 다루어 줬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그러한 대표성의 문제가 21세기 한국의 현실이 되었다는 거다. 한국이 TV에 나오기 시작했다. 싸이의 21억8천만뷰가 그렇다. 한류가 그렇다. 어쨌든 외국의 어느 거리에도 LG와 삼성의 간판이 있다. 현기차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많이 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은 16강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한국은 이미 심리적으로 16강에 들었다는 거다. 1인당 PPP로는 EU평균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올해 이미 따라잡았는지도 모른다.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rankorder/2004rank.html?countryname=Korea,%20South&countrycode=ks®ionCode=eas&rank=42#ks 2013년에 EU평균 34500, 한국 33200이다. 3년 안에 구매력지수로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설도 있다. 내실로 보면 아직 까맣게 멀었지만 기세로 보면 그렇다. 구조론으로는 가속도가 더 중요하다. 산유국이나 자원대국을 제외하고, 또 홍콩과 같은 도시국가는 배제하고 볼 때 국가모델 측면에서 한국보다 확실히 앞서있는 나라는 독일 하나 밖에 없다. 세상이 변했다. 사정이 바뀌었으므로 거기에 걸맞게 우리의 전략도 수정해야 한다. 진보가 해야할 일은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80년대 찌질이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을 키우는 대한국주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를 격동시켜놓을 큰 희망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념은 오직 존엄 뿐이며 존엄은 오직 대표성 뿐이며 대표성은 상부구조에서 역할 뿐이다. 인간은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 존엄을 느낀다. 그런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쇼는 많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K팝스타 따위도 일종의 그런게 아니겠는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을 때 우리가 느낀 것도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존엄이 아니겠는가? 한국 안에서의 결정은 의미없다. 그 경우는 반드시 교착된다. 반대파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역효과다. 부자증세 이런건 감추어야 할 발톱이다. 반대파에게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계기를 주는 점에서 반대파에게 존엄을 몰아주는 실책이 된다. 서민복지 이런건 역시 비용에 비해 효과가 좋지 않다. 시혜를 받는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을 줘야 존엄을 느낀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유권자들에게 한국인만의 특권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특권을 준다. 모든 한국인은 교통수단을 공짜로 탈 수 있다든가 그런게 있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에게 참전용사 이상의 특권을 주어야 한다. 필자가 대선 전에 휘발유 반값을 주장했는데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질 리야 없지만 기름값이 폭락하는 현실을 보면 방향은 옳았다. 해외파병 정도는 간단히 해야 하고, FTA도 확 해버려야 한다. 존엄의 의미다. 대한국주의는 내부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정부역할을 크게 하는 것이다.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 반일, 반북, 반미, 반중, 반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해행위다. 이는 약자의 전략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강자의 전략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나라와 친해야 한다. 친러, 친중, 친미, 친일, 친북이어야 한다. 무언가를 반대한다는 것은 비겁한 거다. 결론적으로 대한국주의는 이념으로 돌아서는 것, 존엄을 이념으로 삼는 것, 상부구조의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존엄을 얻는 것, 이를 위해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 한국이 인류의 대표자로 나서는 것. 모든 나라와 친하는 것, 모든 한국인에게 교통비,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 등 기초부분에서 특권을 주는 것,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 문화와 예술로 한 번 밀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무엇을 얻는가?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된다. 길은 두 갈래다. 큰 길과 작은 길이 있다. 큰 길로 가면 큰 지도자를 낳고, 작은 길로 가면 작은 지도자를 낳는다. 지방선거는 무상급식 등의 작은 길로 가서 우리가 이겼다. 대선을 이기려면 그 전략을 버려야 한다. 무상급식은 당연히 해야하지만 그것은 대선전략이 될 수 없다. 한국인이 원하는건 특권이다. * 존엄의 본질은 집단 안에서의 심리적 신분상승이며, 우리가 줄 수 있는 신분은 세계시민신분 뿐이다. 그 특권은 외국과 비교할 때의 특권이라야 한다. 내부에서의 특권은 위화감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외부를 바라보도록 국민의 관심사를 밖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의 역할, 국가의 역할, 외교의 비중을 크게 하는 대한국주의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생태주의 같은 찌질한 것으로는 시장이나 군수가 되는게 한계다. 대통령이 되려면 밖에서 절대로 답을 찾아야 한다. P.S. 우리가 선거에 진 것은 지도력의 부재 때문이고, 지도력의 부재는 이념의 죽음 때문이고, 이념의 죽음은 '민주화이념'이 먹히던 투쟁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고, 민주화 투쟁의 본질은 심리적 신분상승이며, 신분은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노예는 빠져!, 여자는 빠져!' 하는 식으로 약자나 소수자를 의사결정그룹에서 배제하는 것이 보수이며, 집접선거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된 민주화 이후, 이 시대에 더 높은 단위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려면, 세계단위의 의사결정에 가담하는 것 뿐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시민권의 발급 뿐이다. 그렇다면 '세계시민권'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인의 신분이 바뀐게 중요합니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으로 되면 자세를 바꿔야 하고 크보에서 뛰다가 메이저리그로 가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한국이 열등반에서 우등반으로 올라선 것은 현실입니다. 현실에 맞게 사고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손자병법으로 이겨왔지만 정상에는 그 상대방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는 오자병법으로 바꿔줘야 합니다. 상대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약하고 자기 계획을 내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집권계획은 무엇입니까? 왜 집권하려고 하죠? 의식이 족하면 예절을 안다고 국제무대에 올라서려면 매너가 있는 진보가 집권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일, 반북, 반중, 반미, 반러가 매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신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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