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중일미독인가? 세계에 수백 개의 나라가 있지만 제대로 하는 나라는 한중일미독 다섯 뿐이다. 유태인들을 끼워줄 수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선민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선민의식이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가 중요하다. 역사의 근본은 의사결정구조다. 의사결정구조는 상호작용의 원리에 맞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지독하게 말 안 듣늗다. 하여간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다. 안 되는 나라가 안 되는 이유는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것이다. 수십 개의 정당이 난립해 탄핵을 주고받는 브라질을 난맥상을 보면 알 수 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나 러시아의 푸틴이 득세하는 것도 그러하다. 독재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서 포기한 거다. 민주주의가 먹히지 않는다. 이념은 사라지고 다들 유력가문에 투표하는 판이다. 독재 밖에 방법이 없구나 이렇게 된다. 인간이란게 원래 그렇다. 지독하게 말 안 듣는다. 국가와 정부와 공무원을 적으로 여긴다. 많은 경우는 민중의 적이 맞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독재를 하지 않고도 인간들이 말을 듣게 만드는게 기술이다. 지정학적 구조가 맞아떨어지면 저절로 말을 듣게 된다. 둘 사이에 끼어 있으면 이 둘을 싸움붙여놓고 중간에서 이득을 취해야 하겠구나 하고 이심전심으로 통해서 말 듣는다. 지도자가 나서지 않아도 눈치로 안다.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의 길목을 차지하고 재미를 본 오스만 제국이 그렇다. 이스탄불이 길목이다. 여기를 장악하는 자가 천하를 먹겠구나 하고 다들 눈치를 까는 것이며 그 경우 말을 잘 듣게 된다. 대부분 성공한 나라들은 지정학적 이득을 누렸다. 그런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 길목이 변한다. 항해술이 발달하니 다들 직거래를 하는 판이라 중개무역은 소용이 없고 이스탄불은 쓸쓸해진다. 지정학적 이득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대결을 통해서만 의사결정하는 존재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이다. 방법은 없는가? 있다. 상호작용구조를 정교하게 디자인하면 된다. 그게 유교다. 주자가 중화와 만이로 가른 것도 나름 고민해서 아이디어를 짜낸 디자인이다. 유교는 한 마디로 외교다. 꼭 외국과 대결해야 외교인 것은 아니다. 일본처럼 수백개의 소국으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는 것도 외교다. 춘추시대는 수천개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자는 바로 그런 시대의 작동원리를 간파한 것이다. 유럽 역시 수십개의 소국으로 쪼개져서 외교하다가 흥했다. 조선은 청이 평정하는 바람에 외교대상이 사라져서 망했다. 일본은 다이묘들이 각자 왕노릇을 했기에 서로 외교해서 흥했다.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외교해야 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망한다. 그것은 유교가 가르치는 중용도 아니고 외교가 추구하는 균형도 아니다. 외교의 본질은 균형이다. 합종책이든 연횡책이든 균형이 답이다. 근세 유럽사가 특히 그러하다. 어느 한 나라가 득세하면 다른 나라들이 연합군을 조직하고 집단으로 다구리를 놓는게 유럽사다. 뒤로 가면 항상 영국이 주동해서 러시아를 다구리 놓지만 프랑스와 독일과 스웨덴도 한 번씩 다구리를 당했다. 영국만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외교의 본질은 균형이며 패권을 저지하는 것이다. 왜 한중일독미만 되는가? 한중일은 유교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중용 곧 균형인데 그 균형이 무너진 것은 종교화로 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로 보면 제사를 지내도 남자와 여자가 대등하게 했고 중국이니까 요리는 당연히 남자가 했다. 남자만 절하고 여자가 요리하는 제사는 변두리 나라에 와서 변질된 것이다. 타락해도 근본은 남아있는 법이니 좀 아는 사람은 있다. 유교가 예절이며 예절이 외교이며 외교감각을 키우는 것, 곧 균형감각을 키우는게 유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다. 가부장을 섬기는건 종교화된 것이며 타락한 것이며 그러한 관습은 공자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던 중국 풍속이다. 균형감각을 얻어야 인간들이 말을 듣는다. 말 들어라고 지시한대서 말 듣는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돌아가는 구조 안에서 균형이 작동하는 지점을 본 사람이 말을 듣는다. 남녀가 사귀어도 뭔가 균형이 딱 맞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내가 요걸 양보하면 상대가 저걸 양보하겠지 하고 뭔가 균형을 포착한 사람이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을 자연스럽게 도출하는 훈련이 유교다.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나 독일의 경우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이 역시 어떤 균형을 보여준 것이다. 청교도사상이 강조하는 것이 근면성실인데 근면하라고 해서 근면하는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균형지점을 포착했기 때문에 산초가 돈 키호테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그 균형이 없다면 미쳤다고 산초가 돈 키호테 쫄따구를 하겠는가? 광해군이 왜 나쁜가? 인간들 원래 말 안 듣는다. 임금이 혼자 결정하면 당연히 신하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조선왕조 500년의 약속이다. 미쳤다고 말 듣냐? 그래서 명분이 필요하고 대의가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균형지점이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들어라.’고 하면 이쪽도 상대방의 약점을 잡으려고 한다. 왜 한국인이 노무현 말을 듣냐? 미쳤냐? 바보냐? 노무현의 약점을 잡은 것이다. 노무현은 대의명분을 주장하니까 노무현이 이상하게 가면 대의명분으로 조지자. 전 국민이 노무현의 약점을 잡고 한 방에 보낼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균형이다. 대의명분은 스스로 자기 목에 칼을 걸고 자기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며 이것이 부담이 되었기에 항우는 대의명분을 버리고 의제를 죽였다. 의제를 세워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군대를 일으켜놓고 그 대의명분이 자기 목을 찌른다는 사실을 알자 대의명분을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죽었다. 조조 역시 동탁으로부터 한나라 왕실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걸고 제후군에 가담했다. 명분으로 떴는데 명분을 버렸으니 죽는 거다. 상호작용은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쥐는 것이며 명분이란 상호작용을 위해 자기 목숨을 상대방 손에 맡기는 것이다. 돈 키호테도 그런 짓을 했기에 산초가 따라간 것이다. 속아서가 아니다. 이명박근혜가 나쁜 이유는 그러한 균형을 넘었기 때문이다. 조조짓을 한 것이다. 임금도 균형을 깨면 죽는다. 그것이 공자의 약속이다. 대의명분을 잃으면 당연히 신하가 임금을 배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이 민주주의 근본이다. 맹자가 역성혁명을 주장한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대의명분에 따라 서로의 약점을 쥐는 것이며 어기면 죽는다. 광해군 짓을 하면 당연히 말을 안 듣는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가 망한다. 조조짓을 하는데 사마의가 없겠는가? 그리고 당연히 망했다.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다. 무엇보다 인간을 이해했어야 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칼끝을 겨누는게 유교다. 신하가 명분없이 무조건 임금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박근혜 개소리는 전혀 유교가 아니다. 왜 조선은 임진년에 명을 치겠다는 왜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나? 길을 열어주는게 실리외교다. 그 순간 조선은 망하는 거다. 내부에서 끝없이 반란이 일어나 자멸한다. 대부분 망하는 공식은 같다. 실리 추구하다 내란이 일어나 망하는 거다. 임진년에 왜에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실리외교이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실리외교다. 광해군은 그 짓을 했다. 명분없는 짓을 하면 죽는다. 왜?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존재다. 물론 유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쓰레기도 있다. 퇴계의 존왕유교와 율곡의 이념유교가 다른 것이다. 퇴계의 차별유교와 율곡의 평등유교가 다른 것이다. 임금에게 아부하는 유교와 임금을 제압하는 유교가 다른 것이다. 임금을 제압하는 유교에서 아부하는 유교로 변질되었음은 물론이다. 임금의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다. 원래 중국에 수천명의 임금이 있었다. 면장 정도만 되어도 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왕노릇 했다. 임금들 간에 경쟁시켜서 균형을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시황 때문에 모든 꿈이 사라진 것이다. 임금을 제압하는 것이 유교의 본질이다. 만국의 선비여 연대하라 이것이 유교의 본질이다. 진시황이 임금을 없애니 임금을 보좌하는 선비도 존재감이 사라졌다. 선비라는 이름이 남았을 뿐 선비의 본질은 희미해졌다. 임금을 조져야 선비다. 단 균형을 잃고 폭주하거나 방향을 잃고 역주행하면 안 된다. 노무현 때는 선비가 없어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 오마이 등은 오만해져서 역주행 한 것이다. 예송논쟁 이후로 한국인들은 전 국민이 정치덕후가 되어버렸다. 어느 나라 국민도 이처럼 정치에 몰입되지 않는다. 그 구조 안에서 균형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 균형은 깃털 하나가 내려앉아도 저울이 기울어지는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5000만이 모두 최후에 내려앉아 방향을 트는 깃털이 되려한다.
균형을 본 자는 자신이 최후에 나서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고 흥분하게 됩니다. 그것이 역사 진보의 동력원입니다. 유교는 외교이며 외교는 균형입니다. 그렇지 않은 유교는 모두 임금의 뜻에 따라 조작된 가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