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식 살인 진실은 밝혀져봐야 아는 것이고, 그 전까지는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필자가 주문하는건 이런 류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런 사건이 여러 건 일어났다면 그 중의 상당수는 확률적으로 이렇다는 상식적 판단이다. 때로는 낡은 상식을 새로운 상식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당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내가 실무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국정원이 어떤 조직인지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네 선에서 책임져.’ 도마뱀 꼬리자르기다. 근래에만 세 번이나 자살시도가 있었다. 출세욕에 눈이 먼 직원이라면 ‘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예산만 만들어 주세요.’ 이렇게 된다. 일 저질렀다. 윗사람 눈에 들었다. 호남출신이라 견제받는 터에 승진은 따논 당상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해킹팀이 해킹된 팀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이 등장해 주시는 거다. 적은 누구인가? 야당? 아니다. 조직 상층부다. 각서를 받고 권한을 쥐어준 자가 나의 적이다. 살려면? 보험에 들어야 한다. 야당보험과 언론보험이 있다. 이번 사건이라면 야당보험이 살 길이다. 언론은 국정원 힘으로 막을 수 있으니까. 야당으로 정보를 빼돌리면? 야당도 꼼짝못한다. 국정원 직원과 내통한게 공당의 자랑은 아니므로. 야당협조로 내 살 길 찾고, 책임은 윗선으로 넘길 수 있다. 야당이 넌지시 '우리가 이미 정보를 갖고 있다'는 암시만 해주면 국정원은 꼼짝 못한다. 예산을 준 자가 책임자다. 그렇다면? 내가 국정원장이라면 적절한 대응은? 사건이 터졌을 때 먼저 야당이나 언론과 내통할 위험이 있는 실무자에게 24시간 체제로 감시붙여야 한다. 그렇게 안 해도 직무유기다. 국정원은 자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은? 직원의 자살과정을 국정원은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보지 않았다면 역시 국정원장이 짤려야 한다. 국가적 비상사태가 일어나고 직원이 자살을 하는데도, 조직의 수장이 넋 빼고 있었다고? 아마 유서를 직접 대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옆에서 유서내용을 불러주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찢어버리고 문장을 고쳤을지도 모른다. 유서내용은 3인칭 시점이 아닌가 싶다. ‘원장님, 차장님, 국장님께’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데도 내용은 원장이나 차장, 국장에게 보고하는 어투가 아니다. 정말로 그들 윗대가리들에게 남기는 말이라면? 자기들만 아는 전문용어를 등장시켜야 한다. 내용은 대통령 보라고 쓴 거 같다. 바보도 알아먹을 만치 쉽고 평이한 문장이다.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전문용어를 쓰기 마련이다. 노가다 십장을 해도 일반인이 모르는 노가다 은어를 쓰는 판에. 전문용어를 써줘야 신뢰를 얻는다. 결론을 말하자. ‘네 선에서 책임져라.’고 압박했다. 미리 각서를 받았을 수도 있다. 국정원은 그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대한 시점에 5시에서 10시까지 직원의 동선을 놓쳤다. 상황 터지면 24시간체제로 감시하는게 영화에 나오는 상식이다. 감시를 안 했다면 역시 원장은 짤려야한다. 만약 그 직원이 살려고 야당에 정보를 팔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그건 더 큰 잘못이다. 부하를 보호하지 못하는 리더는 자격이 없다. 과연 그 현장에 다른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없을까? 번개탄은 새벽 5시에 어디서 구매했을까? 수상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수사종료선언 하지 마라. 의혹배가다. 농약할머니 범인 맞다? 물론 진실은 밝혀져봐야 아는 것이다. 필자의 주문은 상식의 업그레이드다. 우리의 상식이 이래야 한다는 거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 많은데 무죄추정의 원칙은 일반론일 뿐, 특별히 이 사건과 관련지어 할 이야기는 아니다. 여든 넘은 고령의 피해자를 해칠 사람은 우리 사회에 잘 없다. 보나마나 사소한 원한관계를 가진 이웃이 범인이다. 물론 확률적 판단이다. 단돈 1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가족이다. 이 사건의 경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저지르기에는 범행 진행과정이 복잡하다. 고립된 시골이라서 모르는 외부인이 진입하기에는 심리적 장벽이 있다. 그렇다면 범인은 가까운 사람이며, 사소한 원한일 수 밖에 없는데 특히 가족은 자기동일시가 되므로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예처럼 '가족은 나, 나를 해치면 자해, 자해는 무죄'..이런 식의 엉뚱한 논리 혹은 심리가 있다. 친한 이웃이라도 비슷한 심리가 작동한다. 친구 = 나, 나를 해치면 자해, 자해 = 무죄. '가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는 관점은 반대로 '가족이니까 오히려 그럴 수 있다'로 바뀐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최고인 이유는 노인자살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자살률이 높으면 타살률도 함께 높아진다. 고립된 공간에 노인만 모여있는 사실 자체가 불행이다. 젊은 사람이 없는 사회는 지옥이다. 그 공간은 활력을 잃었다. 젊은 사람이 화제거리를 던져주면 며느리 흉 보는 재미에, 혹은 손주들 재롱 보는 재미에 이웃간의 사소한 원한은 잊어버릴 텐데, 흉 볼 며느리는 서울에 가 있고, 재롱부릴 손주는 당연히 없고, 이웃 간의 작은 원한은 쌓여만 간다. 그 공간은 점차 무거워진다. 죽음의 그림자다. 구조론적으로 보면 원인은 항상 바깥에 있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자해하는 이유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자극의 부재는 내부자극의 존재로 역전된다. 너무 고요하면 자기 심장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이치와 같다. 형제끼리 싸운다면 형제가 미운게 아니라 사실은 친구가 없는 거다. 활력을 주는 외부의 새 친구가 없다면 내부의 형제와 싸울 이유는 조직되어 있는 거다.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 가서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노인은 많다. '경로당 음료수 절대 안 마시는 사람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을 용의자가 피해자를 두고 '사이다 먹고 체 했다.'고 태연하게 둘러댄 사실이 의심스럽다. 누군가 농약을 탔을 가능성을 의심하는게 정상이다. 2012년부터 생산이 중단된 농약이라 하지만 시골사람은 여러가지 목적으로 집에 한 병 씩은 보관해 둔다. 수사해보면 범인이 잡힐 것이고, 우리가 미리 범인을 예단할 필요는 없지만 충분히 그럴 개연성은 있다는 말이다. 시골이라는 공간이 그렇다. 다들 마시는데 혼자 빼느라고 안 마실 확률은 1/5 쯤 된다. 다들 쓰러졌는데 이를 뻔히 지켜보면서 신고하지 않을 확률은 1/3쯤 된다. 함께 마시고 쓰러질 피해자에게 누명씌울 확률은 1/10 이하다. 범인이 아닐 확률은 1/100 쯤이다. 누명을 씌우려면 그 장소에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게 맞다. ‘김봉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같은 영화가 괜히 만들어지랴? 격리, 고립된 사회는 죽은 사회다. 북한도 싫고, 조선족도 싫고, 일본도 싫고 다 싫은 사회는 죽어가는 사회다. 남북간에 통하지 않은데 노소간에 잘 통하겠는가? 북한이 싫다고 외칠 때 실은 ‘젊은이가 싫다.’고 외친 것이다. 결과는 쓸쓸한 자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건, 그 사람과 친하고 싶은데 내가 먼저 다가갈 수는 없는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거죠. 내가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가 미녀에게 싸대기 맞은 추남 많습니다. 세상에는 자력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때는 외부에서 도와주면 해결됩니다. 중매를 해주든가 중재를 해주든가 외부에서 개입하여 도와줘야 합니다. |
조수석에 번개탄을 피우면 유독가스가 나와서 일산화탄소에 중독되기 전에
콜록콜록 기침하게 되므로 못 버팁니다. 바닥에 단열재라도 깔고 놔둬야죠.
고통없이 죽겠다는 목적과 맞지 않습니다. 상당히 의심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