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칼럼글 리플을 새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진화론과 관련된 필자의 예견은 근간 유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많은 부분이 입증되었습니다. 필자는 구조론에 입각하여 오래전부터 많은 사실을 예견해왔고 유심히지켜보아왔습니다. 예컨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설명을 들 수 있습니다. 런던의 오염지대에서 주변환경이 온통 검게 변함에 따라 검은나방이 많이 살아남고 흰나방이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시험에 잘 나오니까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뻥입니다. 원래 검은 나방은 검은 지역으로 옮겨가고 흰 나방은 흰 지역으로 옮겨갑니다. 나방이 옮겨간 것이지 다윈 적자선택 개념과는 무관합니다. 간접적인 방증으로 제시할 수 있으나 직접증거는 되지 못하며 본질에서 오류입니다.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축을 치지 못하는 작용은 역효과입니다. 역설의 법칙을 간과한 거죠. 과학자들의 판단력은 어린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 교과서를 믿지 안았고 지금도 믿지 않으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간 학계의 성과에 의해 차례로 검증되어가고 있습니다. 구조론이 답입니다. 역설의 법칙(작용이 축을 치지 못하면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만 이해해도 오류를 절반으로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역설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일단 바보짓입니다. ### 어떤 이론이든 이론이 되려면 이론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공식이 제시되어야 한다. 공식은 방정식 형태로 되어 있다. 강론게시판 인류학 글에서 ‘축과 대칭’ 형태로 성립하는 질서 개념이 그것이다. 질서란 전체를 한 줄에 꿰는 것이다. 권총에 비유하자. 방아쇠에서 총구까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일직선으로 나타낼 수 있다. 자동차라면 주유구에서 바퀴까지 전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시계라면 태엽에서 바늘까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직결로 이어진 것이 질서다. 축과 대칭은 시계의 부품 중에 핵심인 제어다. 기어의 진행과 멈춤을 동시에 결정하는 갈퀴가 있다. 볼펜이라면 글자를 쓰는 손과 씌어진 글자를 동시에 통제하는 볼이 있다. 대칭되는 두 요소를 하나가 동시에 결정한다. 자동차 엔진이라면 가솔린과 피스톤을 동시에 결정하는 실린더가 있다. 수학으로 설명하면 좌표 X Y가 만나는 꼭지점에 축 P(x.y)가 있어서 그 축 P를 움직이면 X와 Y의 값이 동시에 변한다. 다윈의 진화론에는 그것이 없다. 이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론 자체는 이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생존경쟁, 적자생존, 자연도태 따위 너절한 단어들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충격을 주는 소설의 묘사다. 과학은 과학이지 문학이 아니다. 진화론이라는 이론은 있어도 '다윈의 진화론'은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예컨대 윤리, 도덕 이런건 이론이 아니다. 그냥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일 뿐이다. 그냥 하나의 추상개념일 뿐이다. 이론화 과정을 거쳐야 윤리론, 도덕론 하는 이론이 된다. 그 안에는 ‘특정 조건에서 이게 이렇게 될 때 저건 저렇게 된다’는 규칙성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에는 그것이 없다. 이론없는 이론이란 총알없는 총이거나 화살없는 활이거나 칼날없는 칼이겠다. 중학교 2학년때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 배운 것으로 기억하는데 깜짝 놀랐다. “읔! 이론에 이론이 없네? 이럴수가. 축은 어디로 가고 대칭은 어디로 갔지?” 그 어느 구석에도 이론의 핵심이라 할 '일의적 동시결정 원리'가 없더라. 일의적 으로 동시결정이 안 되면 그 어떤 주장도 광수생각일 뿐이다. 일의적 동시결정 구조는 콤파스처럼 되어 있다. 콤파스는 축 P(x.y)가 있어서 두 다리 X와 Y를 지배한다. 진화론의 핵심축은 유전정보다. DNA다. 근데 이건 다윈이 말한게 아니다. 갈라파고스 섬의 관찰들은 방증일 뿐 직접증거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생명체가 진화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생존경쟁, 적자선택, 자연도태 이런 말 할 필요없고 핵심축인 유전자 하나만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이론이라면 시장이 축이고 수요와 공급이 콤파스의 두 다리다. 효율성이라는 에너지가 그 축을 지배하며 두 다리를 동시에 제어한다. 유전자 안에서 그 축과 에너지와 두 다리를 찾아야 한다. 물론 시장안에도 생존경쟁이 있고 적자선택이 있고 자연도태가 있다. 지금 아이폰과 옴니아가 생존경쟁을 해서 아이폰이 적자선택되고 옴니아가 자연도태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건 시장원리가 아니고 딴 이야기다. 그렇다면 시장원리란 무엇일까? 소비자의 니드가 수요고 기업의 생산력이 공급이다. 시장의 효율성이 양자를 한 손에 틀어쥐고 동시에 결정한다. 한국소비자의 저급한 수요와 미국소비자의 고급한 수요를 비교하면 당연히 미국소비자의 수요가 승. 삼성의 미비한 생산력과 글로벌화 된 애플의 막강한 생산력을 비교하면 당연히 애플이 승. 본질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원리인데 수요는 인간의 미학적 욕망이 결정한다. 더 좋은 것, 더 근사한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은 창의성에서 나온다. 확일화된 한국인들은 그 욕망이 약하다. ● 한국인 욕망 - 남이 가진 물건을 나도 가지고 싶다. 자 누가 이겼지? 승부는 여기에서 난 것이다. 욕망의 질이 낮은 사회는 욕망의 질이 높은 사회에 백전백패한다. 더 우수한 수요, 더 고급한 니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한국은 패배할 뿐이다. 남이 가진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해서는 남이 가질 때 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2등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가난했던 한국이 지금까지 발전해온 것도 그 욕망의 높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2등욕망은 2등까지가 한계다. 일본도 2등까지는 잘 왔다. 1등이 되려면 깨달음에 기초한 미학을 공부해서 욕망을 높여야 한다. 깨달음이야 말로 이상과 미학을 동시에 통제하는 콤파스다. 이러한 시장원리의 본질을 생존경쟁, 자연도태, 적자생존 개념이 설명할 수 있는가? 없다. 욕망의 진보와 생산력의 진보라는 대칭되는 두 진보의 에너지를 일의적 동시결정원리로 통제해야 한다. 양자를 동시에 통제하는 축은 문명의 진보, 시장의 확대 그 자체다. 글로벌화된 미국시장의 가속적인 팽창성이 소비의 욕망과 저축된 생산력이라는 대칭되는 두 진보를 동시에 이끌어낸 것이다. 쇠고기가 먹고 싶다. 그래서 소를 먹었다. 그래서 소가 없다. 더 이상 쇠고기를 생산할 수 없다. 모순이다. 수요와 공급, 니드와 생산력은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대칭관계다. 시장이라는 대칭축이 개입해서 먼저 소를 키우고 다음 쇠고기를 먹는다는 형태로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질서를 부여한다. 질서에서 축이 나오고 축이 대칭을 통제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진화론을 이론화 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개념 안에서 이러한 진보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유전자는 더 효율적으로 배치될 수 있다. 인간이나 초파리나 유전자 숫자는 비슷하므로, 숫자의 문제는 아니다. 유전자 니드의 성장과 유전자 복제력의 성장이 있으며 양자를 동시에 통제하는 축 역할의 구조가 유전정보 안에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그걸 설명하지 못하면 진화론은 이론적으로 미완성이다. 런던 뒷골목에서 건들거리던 비렁뱅이 서너명이 오전부터 술빨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야 너희들 들어나 봤냐? 신대륙 말이야.' '뭐라고?' 이들의 상상력이 꽃 피고 야심이 꿈틀거린다. ‘신대륙에 가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것도 해야지.’ 상상력의 진보와 생산력의 진보를 동시에 끌어낸 것은 신대륙이라는 무대의 무한 확장성이다. 신대륙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는 찰나 땅이 없어서 못한다. 신대륙은 계속 커져야 한다. 그들은 인디언을 계속 죽이고 맥시코를 침략하고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지금도 세계 곳곳을 침략하고 있다. 신대륙 없었다면 얘네들은 계속 런던 뒷골목에서 술빨고 있다가 엎어져 죽었을 것인데 신대륙이라는 출구가 뚫려서 미국으로 진출한 결과 진보를 이룬 것이다. 인터넷 신대륙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이상)과 생산력(현실)이라는 대칭된 양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콤파스가 된다. 상상할수록 욕망할수록 오히려 생산력이 증가하는 지점에서 그 축은 탄생한다. 한국의 입시위주 교육처럼 상상력은 부정하고 생산력만 강조하다가는 딱 엎어진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생산력이다. 욕망의 질이 상품의 질을 결정한다. 깨달음은 욕망을 고급화 한다. 진보는 에너지에서 나오고, 에너지는 효율성에서 나오고, 효율성은 짝짓기에서 나오고, 짝짓기는 두 짝의 대칭성에서 나오고, 그 실행은 축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 축은 질서다. 어떤 사회든 이게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보고했듯이 어떤 원시적인 사회에도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가 있다. 어떤 엉터리 질서도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엉터리 질서를 추구한 결과 뻘짓을 한다. 문신이나 신체변형이다. 조폭의 문신,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입술접시, 미얀마 카렌족의 목늘이기, 일본 사무라이와 청나라 여진족의 변발, 중국의 전족들, 아랍의 할례들은 그러한 이유로 고안된 질서다. 모든 사회에는 기본적인 작동원리가 있으며 원시사회에서는 주로 신체변형을 통하여 그러한 질서의 추구가 나타난다. 축과 대칭을 만들어 공동체 내부를 제어한다. 욕망과 생산성 사이를 중개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자본과 지식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자본은 욕망과 생산성 사이를 중개하여 공동체 내부에 질서를 부여한다. 지식 역시 지식 자체의 욕망이 있고 생산성이 있다. 스포츠나 패션 또한 그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은 승부를 보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지식을 생산한다. ‘공은 지단이 잘 차지.’ ‘아냐. 호나우딩요를 모르는군.’ 하는 식이다. 패션이 계속 바뀌는 것은 인간의 지식욕 때문이다. 지식욕은 단순히 교과서적 지식을 늘려가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끊임없이 비교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고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나가려는 욕구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구체적인 액션을 요청하는 살아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패션의 유행으로 나타난다. 어디든 찾아보면 질서(평가기준)가 있고 축과 대칭의 구조가 숨어 있어서 잘 작동하고 있다. ∑ |
==> 가솔린과 실린더를 동시에 결정하는 피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