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 것일까? 뾰족한 한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우주는 빅뱅이라는 ‘특이점’에서 촉발되었다. 그 각별한 지점을 찾아야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
춘향과 몽룡은 단오날 광한루 앞에서 만났다. 바로 그 지점이 바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뾰족한 지점이다. 그 지점은 작은 하나의 점이면서 동시에 만인이 지켜보는 가장 큰 무대이기도 하다. 천자문은 ‘천지현황’으로 시작된다. 하늘이 땅보다 크다고 해서 맨 앞에 왔다. 큰 무대가 된다. 창세기라도 하늘이 먼저 열리고 뒤이어 땅이 드러난다. 거기서 아담과 이브 바로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가장 작은 한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무대이면서, 또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어야 한다. 지구촌 60억 인류가 ‘있기’ 전에 조상이 먼저 ‘있다’. 아브라함이 ‘있고’ 그 전에 아담과 이브가 ‘있다’. 연이은 ‘있다’에 주목하기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야기는 ‘있음’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어야만’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도둑이 있어야 절도사건이 일어난다. 아무도 없으면 사건도 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개 돈이다. 그 돈이 있어야 한다. 화폐제도가 없다면? 종이지폐도 없고 엽전도 없고 조개껍데기 화폐도 없다면?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과연 그럴까? 아담과 이브의 있음으로 하여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성서는 아담과 이브가 조우하기 전 에덴동산의 소식을 곁들이고 있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주막집을 만났다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무꾼이 선녀를 만나도 그러하고 도깨비를 만나도 그러하다. 선녀가 있고 도깨비가 있어야 한다. ‘있다’가 중요하다. 사건은 ‘~~하다’ 형태로 일어나지만 ‘있다’는 언제나 ‘하다’에 앞선다. 그 ‘있다’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도 화폐 역할을 하는 무언가 있다. 수요와 공급은 있었다. ‘니드’가 있고 생산력이 있었고 교환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만유의 첫 번째 결은 너와 나의 만남 자체다. 그것은 위대한 마주침이다.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만난다. 춘향은 몽룡을 만났고 나무꾼은 선녀를 만났다. 소설이라면 발단에 해당된다. 첫 번째 결은 자연과 나, 세상과 나, 우주와 나의 근원적인 대칭성이다. 그것이 보편원리다. 출발점이다. 문제는 인류가 그 출발점을 충분히 탐색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출발점에 무엇이 있는가? 출발점은 역사학에 의해서 탐구된다. 그러나 누구도 시조 아담 선생을 인터뷰하지는 못했다. 누가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담 씨와 이브 씨를 인터뷰하고 오겠는가? 그 일을 한 사람이 인류학자들이다. 인류학은 자연과 대면한 인간의 첫 번째 포즈를 알려준다.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작용하는 카오스 영역에 대한 정보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그곳은 혼돈의 암흑세상이 아니더라고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도,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도, 알래스카 이뉴이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가 있었으며 그 사유를 전개시켜 축과 대칭의 법칙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것도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확고한 이데올로기를 가졌으며 자연의 대칭원리에서 질서를 찾았고, 이를 전개시켜 현대의 식물학자가 놀라자빠질 정도의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네 가지 이름으로 분류한다. 봉래산과 풍악산과 개골산이 추가된다. 그 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가랑잎을 아침가랑잎과 저녁가랑잎을 구분한다. 무려 열가지 이상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이슬 묻은 가랑잎과 이슬이 마른 가랑잎은 전혀 다르단다. 아프리카 어느 한 종족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든 동남아든 모든 부족민 세계가 그러하다. 왜? 실용적인 목적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하릴없이 빈둥대는 나바호 인디언과도 대화해보니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왜? ‘지식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에 의하면 인간 사유의 출발점은 ‘질서와 무질서’의 결이다. 그 내부에 질서를 생산하는 축과 대칭의 원리가 있다. 대칭은 또다른 대칭을 낳는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무한전개시켜 방대한 규모의 쓸데없는 지식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지식은 공동체 내부의 혹은 결혼하고, 혹은 사귀고, 혹은 적대하는 작동원리와 긴밀하게 닿아있다. 고대 중국의 어떤 과학자(한나라때의 장형, 張衡?)가 거리를 재는 수레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 수레는 끌고가기만 하면 1리마다 스스로 종을 치고 10리마다 스스로 북을 쳤다고 한다. 그들은 신이 나서 하루에 무려 이백리나 되는 거리를 돌고 왔다고 한다. 지식 자체의 관성이 있다. 십진법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라면 신이 나서 단숨에 백만개까지 세어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일만까지 세어본 사람이 있을까? 인간이 툴을 만들면 반드시 그것을 사용한다. 현대의 문명인과 원시의 부족민은 지식툴을 다르게 사용했을 뿐 본질은 같다.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축과 대칭의 법칙이 있다. 대칭은 만남이다. 나무꾼이 길을 가다가 벼랑을 만났거나 선녀를 만났거나 도깨비를 만났다면 이야기 시작이다. 남산의 흙은 그냥 산의 일부일 뿐이다.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개체가 아니다. 만났을 때 이름이 붙여져서 흙이 된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네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김춘수. 그 흙이 구워져서 도자기로 변신하기도 하고 꽃 한송이 품어안은 꽃병이 되기도 한다. 존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짝지어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만남을 성립시키는 것은 질서와 무질서의 결, 내부에서 작동하는 것은 축과 대칭의 법칙, 그것이 지식의 툴이 된다.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어 무한전개되면 부족민의 방대한 지식이 탄생된다. 빅뱅은 특이점에서 만나 내부의 결을 무한히 전개시켜 거대한 우주를 낳았고 춘향과 몽룡은 광한루에서 만나 내부에 깃든 사랑의 축과 대칭을 전개시켜 춘향전의 방대한 스토리를 낳았다. 사건은 ‘하다’로 전개하고, 존재의 ‘있다’로 촉발된다. 그 이전에 위대한 만남, 근원의 대칭성 ‘이다’가 있어 이다≫있다≫하다로 세팅된다. ‘이다’의 결에서 ‘있다’의 축을 건너 ‘하다’의 대칭으로 전개한다. 이 하나의 원리에 빅뱅을 태우면 곧 우주가 되고, 춘향을 태우면 곧 춘향전이 되고, 야노마미 인디언을 태우면 그들의 방대한 식물학 지식이 되고, 아담과 이브를 태우면 60억 인구로 불어난다. ● 이다(질서의 성립) 인간은 초기조건 ‘이다’를 탐색하지 않았다. 카오스의 바다를 여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수(數)의 개념을 정의하지도 않고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아서 커다란 혼란에 빠져버린다. 먼저 정의하고 다음 분류하고, 비교하고, 연산하고, 측정하여 공식을 완성하는 일 사이클에서 가장 앞선 부분은 정의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다’가 된다. 여기서 우선순위에 주목해야 한다. ● 수학공식의 결 : 정의≫분류≫비교≫연산≫측정 첫 번째 결은 무엇인가? 수학이라면 정의가 첫번째다. 정수나 자연수로 구분하는 분류는 그 다음이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앞에 세웠다. 그러나 어눌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웃기다. 샤르트르는 ‘실존’을 앞세웠다. 칸트는 ‘이성’을 내세웠다. 헤겔은 ‘변증법’을 구사했고 니체는 한참을 되짚어와서 신을 죽이고 왔다. 동양에는 주역의 건괘(乾卦)를 나타내는 원형이정 개념이 있다. 칸트 이전은 종교의 시대였다. 종교인들은 신의 존재를 모든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것이 철학에 방해되었다. 그러니 니체가 신을 도발할만 하다. 칸트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려 했다. 주역이라면 하늘의 질서인 원형이정에서 사계절의 법칙인 춘하추동을 유도하고 이를 다시 인간에 대입시켜 인의예지를 유도한다. 원형이정(이다)≫춘하추동 4계절의 질서(있다)≫인의예지(하다) 칸트는 하느님의 신성(이다)에서 이성(있다)을 유도하고 다시 이를 사회의 윤리와 도덕에 대입시킨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럴듯한 근거를 대야한다. ‘이성’이라는 황금관을 만들어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애매모호함을 구체화시켰다. 인간에게는 사회가 있고 그 사회의 결은 윤리와 도덕이며 그 윤리와 도덕의 정당성은 신에게서 빌어온다. 신이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황금관을 선물하여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게 한 것이다. 개와 소는 아니고 오직 인간에게만. 말하자면 이성은 인간 마음 속에 깃든 신의 어떤 속성이겠다. 인간에게 신의 어떤 엑기스가 있으니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으렸다. 그것이 무어냐? 이성이다. 누가 속아넘어가랴? 갈수록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심해진다. 대타들이 나와야 했다. 헤겔은 변증법을 출발점으로, 샤르트르는 실존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대신 인간의 삶을 출발점으로 삼다가 뭔가 약하다 싶으니 신(神) 비슷한 느낌의 초인 개념을 고안하였다. 구조주의 철학은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내부구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구조주의 철학이 말하는 구조가 구조론에서는 하부구조다. 그 이전에 상부구조가 있다. 완전성이 앞서고 통짜덩어리가 앞선다. 원인은 결과에 앞서고, 시작은 끝에 앞서고, 입력은 출력에 앞서고, 전체는 부분에 앞선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다. 만유를 근원에서 규율하는 첫 번째 결은 어디인가? 그것은 위대한 만남이다. 만유의 대칭성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하다’에 앞서는 ‘있다’, ‘있다’보다 앞서는 ‘이다’의 세계다. 이어야 있고 있어야 한다. 등가원리이어야 화폐가 있고 마침내 거래를 한다. ● 이다 - 수요(니드)와 공급(생산력)의 대칭원리, 등가원리 *** ‘하다’는 다시 같다, 옳다, 맞다로 나누어진다. 이다≫있다≫같다≫옳다≫맞다의 5단계로 나누어진다. ∑ |
오타, 오자는 찾으면 계속 나올지도.
네발독수리타법을 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타가 나옵니다. 독수리 타법을 쓰면 구조론적인 이유로 견비통에 안 걸
립니다. 언어진화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맞춤법도 신경 안쓰지요. 언어를 틀에 맞춰넣으면 안 됩니다. 역동성을 잃어요.
약간 느슨하게 놔둬야 한다는게 노자 선생의 가르침. 짜장면은 자장면이 아니고 깐풍기는 간붕기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창조원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여기> 즉 현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창조원리는 창세기 때의 이야기인가.
또는 하늘나라의 이야기인가.
아니다..온통 지금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걸 다시 말하면
우주는 지금도 창조中...어떤 식으로?
창조원리에 의해서.
그 창조원리가 <..이다> 이다..
세상은 존재와 그 기능(하다)으로 구성된다.
<있다>와 <하다>..
즉 세상은 be 동사와 have(do)동사의 양날개로 구성된다.
존재와 기능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다.
명사와 동사다.
그러나 그 전에 창조원리가 있다.
이게 축이다.
<이다.>는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축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원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일반용어로는 무~지 헷갈리오.
이다->구-이다
be->g-be
날->구-날
축->구-축
연산->구-연산
포지셔닝->구-포지셔닝
하부구조->구-하부구조
.....
....
뭐 대충 이런식으로 뭔가 구조론에서 사용되는 거시기와 일반용으로 사용되는 거시기의 차이를
표기할 때 차이를 두는 방법을 강구해얄 것 같소.
축 1에 날 2라는 말도 많이 헷갈렸소.
축 하나에 날 둘이라는 표현이 좀 더 나을 것 같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