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문제를 해결한다 진리는 리(理), 리는 결, 결은 길, 길은 도(道). 수학은 백만번째 결을 찾고 구조론은 첫 번째 결을 찾는다. 인간의 문제는 대개 첫 번째와 두 번째 결을 알려준 다음 세 번째 결을 찾으라는 식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결을 아는 상태에서 세 번째 결을 찾기는 쉽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백지상태에서 첫 번째 결을 찾기가 어렵다. 결은 나이테다. 첫 번째 나이테 찾기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칙을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소통하려면 언어를 정해야 한다. 외계인과의 만남이라면 어떨까? 그들에게 입과 귀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자연에는 이미 결이 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이 결이 있고 얼마간 자연은 길이 들어 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다. 존재 그 자체의 결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존(存)과 재(在)다. 존은 명목이고 재는 기능이다. 그렇다. 하나의 존재는 일이며, 일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에너지를 내부에서 처리한다. 여기서 외부에서의 에너지 유입과 내부에서의 처리라는 두 관점이 존재한다. 그것이 첫 번째 결이다. 그것은 존과 재의 구분에서 비롯하여 명목과 기능, 질서와 무질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결로 전개한다. 통짜덩어리 인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칭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통일하며 둘 사이에서 에너지 투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내부에서 에너지 흐름을 제어한다. 첫 번째 결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필자의 각별한 관심분야다. 이번에 방영된다는 MBC 아마존의 눈물 시리즈도 기대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그 어떤 과학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학문이며 지식이다. 인문학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예술을 모르는 사람, 깨달음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소통불능이다. 국어, 역사, 미학, 논리학, 인류학이야말로 중등교육의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 레비 스트로스 ‘야생의 사고’를 읽다가 이 양반이 구조주의 철학을 선도한 학자라는 보고에 눈이 간다. 필자는 ‘구조주의’와는 담을 쌓았다. 구조론과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쾌하지가 않다. 이 양반의 보고는 우리가 흔히 ‘미개하다’고 표현하는 ‘야만의 세계’도 그 내부를 살펴보면 그 안에 잘 짜여진 질서가 있고, 정교한 분류체계가 발달해 있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이다. 원주민들이 현대의 식물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방대한 분류데이터를 확보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세계 도처의 원주민들이 그런 복잡한 학문을 왜 했는가이다. 먹고 살려고? 아니다.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가 모든 지식의 출발점이다. 그 내부에는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일정한 분류툴이 존재하며 그 분류툴을 적용하여 끝까지 전개한 즉 복잡하고 세밀한 학문이 만들어졌다. 이 점은 근대화 된 서구문명 사회나 원시사회나 다를바 없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원시사회는 폭력과 야만이 지배하는 무질서한 사회가 아니라 독특한 내부질서가 있는 사회인 거다. 아메리카의 인디언도 아프리카의 피그미도 알래스카의 이뉴이트도 호주의 티위오리진도 예외없이 백인 과학자가 깜짝 놀랄만큼 방대한 지식체계를 ‘아무 이유없이’ 구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릴없이 빈둥대는 원주민과 대화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수백종의 식물이름을 외고 있었으며 작은 풀잎 하나도 일정한 체계에 기초하여 수십가지로 분류해 놓았더라는 식이다. 식물박사였던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적인 탐구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어떤 원시사회도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로부터 출발하여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지식툴 하나는 장만해두고 있었던 거다. 세계는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지식툴과 그 지식툴에 따른 내재적인 질서로 구축된 무수한 사회들의 수평적인 공존으로 이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여기서 레비 스트로스가 제시하는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 그리고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분류체계가 구조론이 말하는 바와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그러나 확실한 차이가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구조는 ‘내부구조’다. 구조론은 내부구조와 외부구조를 통일한 통짜덩어리 인식을 주장한다. 그 덩어리 안에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구조 위에 구조가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서 질과 입자는 상부구조, 힘과 운동은 하부구조를 이룬다. 둘은 패턴이 닮았다. 그러나 상부구조는 외부에서의 에너지 유도가 있고 하부구조에는 그것이 없다. 문제는 60년대에 레비 스트로스가 샤르트르와 논쟁한 이후 프랑스 철학계가 급속하게 구조주의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데 있다. 말하자면 실존주의가 패배하고 구조주의가 승리했다는 거다. 구조주의는 어느 면에서 실존주의와 대척점에 선다. 왜? 필자가 강조하려는 점은 이 부분이다. 존재의 ‘명목과 기능’으로 보면 실존주의는 명목의 탐구에 기울어 있고 구조주의는 기능을 탐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구조는 내부구조이고 내부구조는 하부구조이며 하부구조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이 상부구조의 명목찾기에서 하부구조의 기능분석으로 급전환이다. 여기서 존재이 첫 번째 결 곧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로 되돌아가보자. 구조주의가 말하는 다양성과 공존은 노자의 무질서와 같은 패턴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공자의 질서다. ● 존재의 명목과 기능 대략 이런 패턴으로 볼 수 있다. 왼쪽이 명목을 추구하는 흐름이고 오른쪽이 기능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명목은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통합하려 한다. 그래야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기능은 다양한 가족의 공존으로 보고 인위적인 통합을 반대한다. 명목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원주민 문화를 폭력적으로 파괴한다. 기독교가 선교의 미명으로 도처에서 자행한 만행이 그러하다. 기능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모기나 빈대도 자연에서는 나름대로 기능이 있다는 식으로 북한도 내부질서가 있더라는 송두율의 내재적인 접근에 따라 북한과 이란도 미국의 전횡을 막는 기능은 있다는 식이 된다. 이는 인류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될 위험이 있다. 박정희든 김일성이든 독재는 어떤 경우에도 반인간, 반문명의 야만이다. 어쨌든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과 레비 스트로스의 원주민문화 존중이 유사하다. 송두율이 북한을 원주민 취급한다는 역설도 성립한다. 어느 쪽이 맞고 틀렸나를 떠나 근대와 전근대를 막론하고 인류가 고민하고 마찰해온 대부분의 문제가 이 범주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이 명목을 추구하는데 비해 일본은 기능을 추구한다. 한국이 합리주의라면 일본은 실용주의다. 그런데 원래 독일이 명목을 추구하는 합리주의고 프랑스가 구조주의 철학이 강조하는 기능주의다. 얼마전 독일인 미수다 출연자 베라 씨가 저서에서 한국을 어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거 지극히 독일적인 사고다. 합리주의란 원래 이치에 맞는지 안맞는지 기어코 따지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독일인 베라씨가 프랑스 철학을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해서는 안될 몰지성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말의 내용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프랑스라면 똘레랑스를 앞세워야 한다. 물론 브리지드 바르도는 프랑스인이지만 똘레랑스를 전혀 발휘하지 않고 한국의 개고기식을 비난하고 있다. 또한 몰지성적 태도이다. ‘한국사람은 개고기 먹도록 놔둬.’ 이게 구조주의 입장이다. 물론 필자는 합리주의자이므로 ‘한국인은 개먹어도 괜찮아’에 동의하지 않는다. 먹는거 가지고 시비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인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이끌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요는 주류 질서를 주장하는 독일식 합리주의 입장과 주변부 질서를 주장하는 프랑스식 다원주의 입장이 대립해 있다는 거다. 구조론의 통짜덩어리 인식은 양자를 입체구조 안에서 통일하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축과 대칭의 수평적 논리만으로는 이 커다란 덩어리를 통째로 담아낼 수 없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평면적 대칭구조 말고 입체적인 덩어리 형태의 진짜 구조주의가 필요하다. 일원적인 주류질서와 다원적인 주변부 질서 중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배척할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에너지 유도의 우선순위를 정할 문제이다. 에너지 그 자체의 흐름이 순서를 정한다. 어쨌든 채식주의자인 베라 씨의 ‘한국도 유럽처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프랑스적이지만 그걸로 윽박지르는 태도는 지극히 독일인다운 사고다. 그 점에서 그는 지성이 없다. 철학이 없다. 프랑스나 중국은 나라가 크고 중심을 차지하다보니 별의 별 외국인이 다 들어와 있어서 대륙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다. 유럽의 변방 독일이나 아시아의 변방 한국은 다르다. 나라가 작으니 의사소통, 의사결집 속도가 빨라서 문제해결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을 반영하는 합리주의 태도를 가졌다. 말하자면 한국인이 성향에서 독일적이고 일본인이 프랑스적 성향인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인의 일본문화 심취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과도하게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나 작은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이 이유있다. ‘고려공사 삼일’이라는 속담이 있는데서 보듯이 작은 도시국가나 반도국가에서 정보전달, 의사소통, 의사결집, 의사결정의 속도가 빨라서 일원론을 앞세우는 합리주의로 가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반대로 영국이나 일본과 같은 섬은 지나친 의견일치가 위기를 불러오는 경향이 있다. 섬이라서 패자가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섬나라는 완전한 의견통일을 미루고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다. 일본이라면 대략 관동과 관서로 나누어져 있다. 일본식 실용주의나 영국의 경험론이 통하는 데가 있다. 섬 안에서의 투쟁은 무한투쟁이 되어서 한쪽이 완전히 말살되어야 끝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륙은 2차대전에서 프랑스의 금방항복, 명나라의 청나라에 대한 굴복, 초전에 300만이 포로로 잡히고도 버티는 러시아의 만만디 작전에서 보듯이 느긋하게 기다리며 패를 보는 경향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