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구조론은 한 마디로 문제의 해결이다. 문제해결의 요체는 포지션의 우위를 점하는 데 있다. 상위포지션을 차지하고 하위포지션을 치는 것이다. 이에 구조론은 기본적인 다섯 개의 포지션을 제시한다. 포지션은 대칭성 원리에 기초한다. 만유의 근본은 대칭성이다. 음양의 대칭, 남녀의 대칭, 진보와 보수의 대칭 뿐 아니라 모든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에 대칭구조가 숨어 있다. 존재를 밑바닥에서 규율하는 법칙은 인과율이다. 원인과 결과의 대칭에서 일의 시작과 끝의 대칭 그리고 시간의 과거와 미래, 공간의 작용과 반작용, 물질의 질과 량 사이의 대칭으로 폭넓게 전개한다. 상하, 전후, 좌우, 고저, 장단, 원근, 대소, 광협, 심천, 흥망, 강약, 청탁, 장유, 길흉, 명암, 호오, 개폐, 진퇴, 성패, 유무, 애증, 은원, 손익, 종횡 끝이 없다.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기본이 대칭이다. 대칭은 존재 그 자체의 본바탕이다. 세상은 무수한 대칭들의 거대한 집적구조다. 건물이 벽돌의 집적이라면 존재는 대칭구조의 집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 대칭을 인간이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문제의 해결은 바로 대칭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기기라도 대칭을 이루는 명암, 강약, 대소, 농담을 조절하는 제어장치가 기본이다. 반도체라도 대칭을 이루는 0과 1의 제어가 기본이 된다. 보통은 마주보고 대칭된 두 날개 중 한 쪽 날을 차지하고 반대쪽 날개를 친다. 강에 붙어서 약을 치고, 대에 빌붙어 소를 치고, 양에 빌붙어 음을 친다. 역사이래 인류는 그 짓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밸런스원리에 의해 복원되고 만다. 대중의 균형감각에 의해 다시 교착된다. 서구가 동양을 치고, 보수가 진보를 치고, 마초가 페미를 치고, 강자가 약자를 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구조론은 포지션 우위를 점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대칭의 두 날개 곧 진보나 보수, 여자나 남자, 부자나 빈자, 서구나 동양 중의 한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축을 장악하는 것이다. 모든 대칭구조에는 반드시 상위 포지션이 있다. 상부구조가 있다. 대칭축이 있다. 두 바퀴를 동시에 지배하는 굴대가 있다. 에너지가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고 그 에너지를 조절하는 스위치가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파도가 선박을 기울게 해도 바다가 다시 배를 복원시키듯이 밸런스원리에 의해 원위치 되기 때문이다. 정답은 무엇인가?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항상 외부에서 들어오므로 반드시 에너지의 출구와 입구가 있다. 하나의 존재, 하나의 사건에서 에너지의 출입구는 항상 하나여야 한다. 그 에너지의 출입부분이 구조체의 상부구조다. 상부구조에는 스위치가 있어서 대칭되는 진보와 보수, 이상과 현실, 강자와 약자, 주류와 비주류를 동시에 통제한다. 요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항상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진행하는 일방향성을 가진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가듯이 에너지는 입력에서 출력으로만 진행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결단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을 적용하여 상부구조에서 에너지의 출입구를 장악하고 하부구조와 이어지는 축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대칭된 두 날개로 내려가는 에너지를 제어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요체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강으로 약을 치고, 부로 빈을 치고, 진보로 보수를 치고, 무로 문을 치고, 주류로 비주류를 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1회성의 해결일 뿐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치면 일시적으로는 잠잠해지지만 밸런스가 무너져서 팀이 깨지고, 조직은 와해되고, 가족은 흩어지고, 국가는 분열되고, 시스템은 붕괴되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을 치는 식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의 대칭성을 다치지 않으면서 에너지 조절을 통하여 제어해야 한다. 이때 상부구조 1이 대칭된 하부구조 2를 통제하므로 에너지의 효율성이 담보되어 조직은 발전하고 국가는 통합되고 팀은 재건되고 가족은 결집하고 시스템은 진보하고 생명은 성장한다. 문제는 신체감관에 의존하는 인간의 인식체계가 외부에서 에너지를 유도하여 내부의 스위치를 조작하는 상부구조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하도록 세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한다.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아래로 에너지를 찔끔찔끔 딱 죽지 않을만큼 흘려주는 지배집단에 이용당한다. 인간의 인식이 이원론적인 대칭구조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깨뜨려야 한다. 인간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기본이 대칭성이다. 거기서 공사(公私), 진가(眞假), 가감(加減), 완급(緩急), 굴신(屈伸), 문답(問答), 시비(是非), 난이(難易), 등락(登落)의 대칭을 발견하면 아는체 한다. 인간의 지적 행위는 대략 이를 포착하고 평가하되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형태이다. 그러한 대칭성 집착이 이분법적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 선형사고, 흑백논리적 사고를 낳는다. 모든 둘로 나누고 색깔 칠하여 구분하고 차별하며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이원론은 오류다. 선에서 입체로 발전해야 한다. 입체적 사고, 비선형적 사고, 통합적 사고를 얻어야 한다. 구조론이 주장하는 통짜덩어리 인식, 깨달음의 세계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한 줄에 꿰어보는 열린 시야가 필요하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연결하는 에너지 흐름도를 꿰뚫어보는 것이다. 입체적 사고에 기초한 통짜덩어리 인식이 깨달음을 낳고 깨달음이 소통을 낳고 소통이 짝짓기를 낳고, 짝짓기가 창의를 낳고, 창의는 포지션의 우위를 유도한다. 포지션의 우위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계를 통제하는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럴 때 지속가능한 구조가 세팅된다. 시스템의 선순환을 이루어 생명의 성장, 조직의 확장, 시스템의 진보, 문명의 발전, 역사의 진보를 유도할 수 있다. 돌아가는 판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한 눈에 읽어내는 눈,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야,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장악하는 선점.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스위치를 조작하여 하부구조를 제어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방법으로 무수한 짝짓기를 끌어내어 창의하기다. 매일 새롭게 낳아내기다. 개인의 창의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천하를 이롭게 하는 위대한 낳음의 자궁을 건설하는데 참여함이 대승의 정신이다. 그것은 이상주의라는 자궁이다. 신의 완전성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 이상주의를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전개하는 것이 미학의 완성이다.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초대받아 온 이유에 답하는 것이다.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세상을 바꾸는 대승의 기획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내 안에서 낳아냄으로써 가능하다. ∑ |
구조론적 사고를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낮은 인식체계가 발목을 잡는 지점이 있소. 내 안에 만연한 신체감관 위주의 의식수준이 구조론적 사고발달을 방해하기 때문이오. 이 지점까지 오면 타협은 불가능하오. 즉, 다시 신체감관 수준으로 주저앉느냐, 상부구조로 상승하느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뿐.
몸으로 고립되는 경직된 환경(보수)과 삶으로 소통되는 유연한 환경(진보)은 대칭으로 존재하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압도할 수 없다는거요. 사람들은 몸이냐 삶이냐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데, 이렇게 형성된 서로 다른 두 개의 삶이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하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어느 순간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일단 선택한 뒤에는 그 선택에 적합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게되오. 그에 어울리는 사상, 친구, 취향, 직업 등등 모든 환경이 한 방향으로 세팅되는거요. 여기까지 진행되었다면 돌이키기는 거의 불가능하오.
유일한 출구가 깨달음이오. 깨달음은 몸의 감관적 인식체계와 그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환경의 연결고리(한마디로 하부구조 카르텔)을 발견함으로써, 상부구조로 상승하는 것이오. 그러나 일시적인 인식의 변화는 곧 타성에 굴복하게 되고, 계속적인 굴복이 퇴행으로 이어지게되오. 퇴행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실패를 타파해야 하는데, 나홀로 마음수행만으로는 안되고 환경 전체를 바꾸어야하오. 환경을 바꾸려면, 삶의 바다에 띄울 창의의 배와 그 배에 함께 오를 동지가 필요하오. 창의에 의한 에너지 조달 이외에는 퇴행을 막을 방법이 없소.
결국 개입을 통해서 데이터가 쌓이고 에너지를 접해야지만,
자기의 세계가 확장할 수 있고, 세상과 나 사이에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나의 틀이 확장되어야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내 안에 고립되지 않는 것.
그것이 완전한 자유이고, 지향점이라는 것.
상부구조에 대한 인식은 대략 눈치나 직관 형태로 존재하므로 쉽게 언어화 되지 못하오. 언어화 되지 못하면 보편화 되지 못하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것이며, 철학자가 하는 일은 그것을 언어화, 개념화 하는 것이오. 칸트가 '이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자 겨우 서구사회가 기독교의 지배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소. 아주 조금 말이오.
아랍은 그 단어를 안배웠는지 여전히 종교의 질곡 아래 있고. 상부구조에 대한 고민은 종교에 맡겨버리고 아예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소. 고민해서 답을 찾았다 해도 그 답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건 아니기 때문이오. 상부구조가 제시하는 답은 인류단위로 규모가 커서 엄두가 안 나니까 고매하신 학자들에게 맡겨놓고 나는 교회나 찾고.
중요한 것은 사건이 항상 하부구조에서 일어난다는 점이오. 상부구조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소. 하부구조에서 일어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점점 커져서 아이싸움이 어른싸움 되니까 뒤늦게 상부구조를 고민하게 되오. 상부구조에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말은 근본적인 해결을 의미하며 작은 사건은 하부구조에서 해결되오.
문제가 생기면 약자를 줘패면 되오. 범죄인은 사형시키면 되고, 여성과 아이와 노약자는 구타하면 되고, 종업원은 쥐어짜면 되고, 맹박이는 삽질하면 되고, 중소기업은 파산시키면 되고, 지방은 굶어죽게 냅두면 되고, 북한은 망하도록 놔두면 되고, 조선은 침략하면 되고, 원주민은 살해하면 되고, 이등병은 군화발로 쪼인트 까면 되고.
그러다가 IMF터지면 회사 문닫으면 되고, 나라 망하면 미국 이민가면 되고, 자본주의 생존경쟁 어차피 약자는 다 죽는 법칙, 한국은 약소국이라 당연히 죽고, 죽으면 큰나라 미국에 빌붙으면 되고, 그래서 다 될 것 같은데 이라크 박살내고, 아프간 박살내고, 북한과 이란 고립시키고 그래도 안 되니까 인간이 철학을 하게 되는 것.
자기 분야에서는 누구나 상부구조를 인식하오. 목수는 집짓는 일에서만, 도둑은 훔치는 일에서만, 정치인은 패거리 짓에서만 상부구조를 인식하오. 그걸 언어화, 보편화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핵심에서는 각자가 경험한 만큼만 전달되오. 절대로 언어화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소. 구조론은 많은 부분을 언어화 하지만 남는 부분이 있소.
완전한 해결은 어렵고, 그래도 감은 끌어올릴 수 있는데,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며, 예술이 그 감의 발달을 돕지만 예술을 모르는 바보아저씨들도 아이폰을 한번 써보면 이건희에 대한 존경심이 풍선이 바람 꺼지듯 푸쉬쉬 사그라드는 체험은 할 것이오. 더 높은 세계는 어디에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오.
절대로 언어화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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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신체감관에 의존하는 인간의 인식체계가 외부에서 에너지를 유도하여 내부의 스위치를 조작하는 상부구조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하도록 세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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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인식체계가 원래 상부구조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기 보단, 상부구조의 존재를 포착하는 수준의 인식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게끔 사회/문화/경제/정치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세팅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즉, 나는원래 인간의 인식 체계가 <이상적인 환경> 하에선 자연스럽게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보오.
사실, 아이들 조차도 이원론적인 대칭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오. 이원론적인 대칭구조에서 한 쪽 편을 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리석은 해결책이라는 건 어린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오. 그러나 그러한 직관은 곧 파묻히게 되오. 분명 어떤 통짜 덩어리 인식이 어린시절부터 기능하며, 그것을 다만 제대로 된 언어로 풀어내지 못할 뿐, 인간의 의식이 신체감관에만 의존하게끔 세팅된 것은 아니라 보오. 다만 이러한 통짜 덩어리 인식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사그라 들지만 말이오.
우리 안에는 이미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인식체계가 존재하며, 비록 인식체계가 신체감관에 의존하긴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을 거치면서 점차 신체감관에 대한 의존을 넘어선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고, 나아가 상부구조를 포착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오.
결론적으로, 정상적인 성인의 인지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면 충분히 상부구조의 파악이 가능하다고 보오. 우리가 구조론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이 그 증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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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한다.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아래로 에너지를 찔끔찔끔 딱 죽지 않을만큼 흘려주는 지배집단에 이용당한다. 인간의 인식이 이원론적인 대칭구조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깨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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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핵심은 현 체제가 에너지를 그야말로 생명유지장치 수준만큼만 제공한다는 점이며 전반적인 세팅을 이원론적 대칭구조를 유지하게끔 해 놓았다는 점이오. 이걸 깨뜨리는 작업이 바로 대승의 기획이 될 것이오.
그 동안 초대장을 받고도 뻘줌하여 문가에서 서성이며 주인장의 얼굴 한 번 보려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대승의 배로 초대하는 것이 앞으로 2010년 구조론 식구들이 할 일이 아닐까 하오.
암튼, 한 해를 마무리짓는 시점에, 초대장을 받았으니, 2010년은 초대장을 들고 승선해야겠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