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한다는 것의 의미 인간의 불행은 몸의 괴로움이나 마음의 불안이 아니라 삶의 비참에 있다. 비참이란 무엇인가? 노예가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환경에 예속되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비참이다.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불안은 일시적이다. 반면 삶의 비참은 숙명적이다. 인생을 통째로 옥죄이며 지배한다. 왜냐하면 삶의 비참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원초적 한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몸의 쾌락이나 맘의 평안이 아니라 삶의 구원을 찾을 일이다. 구원은 오직 상승에 의해 얻어진다. 노예가 사슬을 끊고 탈주하듯이, 함정에 빠진 사람이 도움의 손길에 힘입어 빠져나오듯이. 어떻게 상승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위로 쌓아올리는 방법과 밑으로 쪼개는 방법이다. 동양이라면 한사코 위로 쌓아올리려고만 한다. 사람을 끌어모아 인맥을 만들고 조직을 결성한다. 높은 대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간다. 인위적으로 자신을 높은 자리로 끌어올린다. 다단계 조직 비슷하다. 이 경우 에너지가 없으므로 사기가 되기 쉽다. 에너지는 항상 외부에서 조달된다. 큰 나라에 사대하고 앞선나라 것을 모방하고 외국에서 들여온다. 외부로 나가는 길목은 좁다. 너도 나도 외부 에너지원에 줄을 대려고 하므로 인원을 제한하기 위하여 라이선스를 발급한다. 라이선스를 얻기 위하여, 라이선스를 발급하는 관료가 되기 위하여 공부만 죽자고 한다. 불쌍하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닐뿐더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도 아니다. 근본 에너지원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의 출입로를 장악하고 있는 외부의 선발주자에게 의존하고 예속당하여 착취당한다. 이 방법으로 노력하면 꼴찌에서 2등까지는 갈 수 있으나 일등은 불능이다. 서구는 주로 발밑을 판다. 잘게 쪼갠다. 분석하고 해체한다. 먼저 온 사람이 둘로 쪼개서 얻고 남는 것을 버리면 다음에 온 사람이 그 버린 것을 주워 다시 넷으로 쪼개고 또다시 여덟 조각으로 쪼갠다. 위로 쌓는 동양과 밑으로 쪼개는 서구 중에서 어느쪽이 옳은가? 중요한 것은 에너지다. 위로 쌓아올리는 한국의 방법은 에너지가 없으므로 일시적인 성공을 얻으나 근본적으로 실패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서 동양은 양에서 시작하여 질로 상승한다. 양을 모아 운동을, 운동을 모아 힘을, 힘을 모아 입자를, 입자를 모아 질을 조직한다. 상부구조를 찾아간다. 에너지의 진행방향인 ‘질≫양’을 거스르는 진행이므로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하므로 그 에너지의 입구가 좁아서 스트레스가 극도로 높아진다. 아귀다툼 벌인다. 물고 뜯고 싸운다. 서구는 질에서 시작한다. 질을 쪼갠다. 쪼개면 에너지가 쏟아져 나온다. 아주 세밀하게 쪼개어 들어간다. 질을 쪼개서 입자, 입자를 쪼개서 힘, 힘을 쪼개서 운동, 운동을 쪼개서 양을 찾아낸다. 에너지의 진행방향과 같으므로 진보가 있다. 중요한건 창의다. 창의는 남의 선 줄 뒤에 가서 서지 않고 자신의 줄을 만드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서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기다. 짝짓기로 가능하다. 짝짓기는 소통에 의해 가능하다. 소통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요는 짝을 지을 수 있는가이다. 누구든 미인의 짝이 되고자 하지만 거절당한다. 초대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한다. 창의함으로써 포지션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고, 대접받을 수 있다. 개인의 몸≫맘≫삶으로의 전개는 사회라는 더 큰 몸의 상부구조를 건설하는 결과로 된다. 그것이 건설되어야 좋은 포지션을 차지한다. 닫힌계 안에서 포지션 경쟁은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아귀다툼일 뿐이다.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다. 열린 구조가 아니면 안 된다. 창의로 가능하다. 위로 쌓든 밑을 파든 짝짓기로 가능하다. ### 상승 혹은 구원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신통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 거꾸로 삶에서의 상승체험, 존재의 구원경험을 종교에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몸의 쾌락, 마음의 평안, 수준의 상승 뿐이다. 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은 상승 뿐이다. 상승한다는 것은 대접받는다는 것이다. 포지션의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가능하다. 질≫입자≫힘≫운동≫량으로 전개하는 구조 가운데서 에너지의 출입구인 질의 관문을 장악함으로써 가능하다. 내가 질을 움켜쥐고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입자를 들고 소수문하여 방문한다. 손님이 찾아오고 초청장이 날아든다. 나를 위한 무대가 꾸려진다. 에너지의 출입구는 창의에 있다. 짝짓기로써 창의는 가능하다. 소통함으로써 짝짓기는 가능하다. 깨달음으로써 소통은 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관계'다. 관계는 짝을 짓는다. 그러므로 레벨이 있다. 걸어서 출근하던 사람이 자동차를 구입하면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 라면은 정식으로, 여관은 호텔로, 시장은 백화점으로 바꾼다. 짝짓기는 곧 세팅이다. 세트 단위로 제공되고 있어서 임의로 고를 수 없다. 시장이나 슈퍼에는 주차장이 없으므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기준에 맞추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바뀐다. 문제해결 방식도 바뀐다. ‘서비스비용 안 내고 돈 아끼자’는 실용노선에서, ‘어차피 내는 비용이니까 서비스나 알차게 받자’는 명목노선으로 갈아타게 된다. 하인들이 실용을 추구하는 것은 실용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고, 신사들이 명목을 추구하는 것은 역시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높은 포지션에 있으면 실용보다 명목이 이익이다. 가격에 팁이 포함되어 있어서 어차피 나가는 돈이니 목에 힘이나 주고 폼이라도 잡아야 한다. 이성을 사귀어도 같은 문제에 부닥친다. 의견충돌이 있으면 지출을 늘리는 형태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한 사람은 영화가 보고 싶고, 한 사람은 피자가 먹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문제해결의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지갑을 여는 것이다. 모두 만족시키려면 2배 아니라 네 배의 비용이 든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의 문제다. 어떤 사람이 실용을 추구한다면 명목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건 옳지 않아!’ 하고 반론하는게 아니라 ‘그래! 너는 천상 하인이군’하고 인정한다. 어떤 사람이 명목을 추구하면 실용주의자가 ‘그건 옳지 않아.’ 하고 반론을 펴는게 아니라 ‘그래! 당신은 신사군’ 하고 알아보게 된다. 상승의 의미는 몸과 마음의 이로움을 꾀하는 실용을 벗어남이다. 명목과 실용의 차이는 무엇인가? 실용은 하부구조를 쥐어짜서 직접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명목은 가만 있어도 밑에서 간접으로 가져다 바친다. 하부구조에서 취한 이익이 상부구조에 배당된다. 명목을 장악한 사람이 무리하게 실용을 추구하면 자신에게 예속된 하부구조가 떨어져 나간다. 질을 차지한 사람이 입자와 힘과 운동을 겸하려 하면 입자나 힘을 장악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목을 가진 신사는 굳이 번거롭게 실용을 추구하다 고립되는 리스크의 증대를 감수할 필요가 없고, 실용을 가진 하인은 명목을 추구해봤자 어차피 허세일 뿐 찾아오는 손님은 없다. 인간은 몸과 마음의 이로움을 추구하지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뭔가 의미를 남기는 명목을 추구하게 된다. 무엇인가? 개인의 몸≫맘≫삶의 전개가 다시 사회의 몸으로 세팅된다. 개인이 몸에서 맘을 거쳐 삶으로 발전함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사회라는 더 높은 세계의 자궁을 건설하는 즉 더 높은 단계의 몸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승이다. 대접받는 높은 포지션은 그 안에 있다. 하나의 존재가 ‘명목≫기능’으로 세팅된다면, 명목이 자궁이고 기능이 피어나는 꽃이다. 그 꽃은 다음 단계에서 세상이라는 새로운 자궁을 건설한다. 더 높은 단계의 명목을 추구하게 된다. 밀알이 자신을 죽여 봄의 새싹을 만들듯이 자신의 몸 내부에 잠재한 가능성을 끌어내어 삶으로 꽃피운 결과로 사회라는 더 높은 단계의 몸을 건설하고 그 사회의 몸 안에서 높은 포지션이 된다. ● 1사이클 : 개인의 몸에서 삶으로 -≫ 2사이클 : 세상의 몸에서 삶으로. 세상의 자궁에서 피는 꽃은 다음 세대의 결실이 되겠지만 인간은 그것을 추구한다. 그 방법으로 친구를 얻고 대접을 받는다. 자식이 결혼하여 부모가 됨으로써 부모라는 높은 포지션으로 올라섬과 같다. 그것이 상승이다. 어차피 죽어서 무로 돌아가는 인생에서 그것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다. 부자가 벌어서 저축할수록 죽을 때 손실은 커진다. 적절히 유산을 사용함으로써 대접받는 길을 선택한다. 개인차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몸의 쾌락과 마음의 평안은 한번쯤 체험해보는 정도의 의미 뿐이다. 그 결론은 허무다. 아무리 대단한 쾌락이라도 한번 체험해보는 이상의 의미는 없다. 번지점프를 백번한다고 해서 쾌락이 백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점프순간의 쾌감보다는 그것을 떠벌이고 자랑하다 친구를 사귀게 되는 짝짓기의 부가가치가 더 크기 때문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몸의 문제도, 평안을 추구하는 마음의 문제도 결국 상승을 추구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면 저절로 해소되게 되어 있다. 결국 타인으로부터 ‘어떻게 대접받는가’가 중요하다. 몸을 쾌락하게 하는 것은 돈이다. 대개 돈으로 친구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다. 대개 지식으로 친구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세 번째를 위한 징검다리다. 그렇다면 둘러가지 말고 바로갈 일이다. 바로 깨달음으로 가고, 깨달음으로 소통을, 소통으로 짝짓기를, 짝짓기로 창의를, 창의로 포지션의 우위를, 포지션의 우위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 상승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