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당염립본왕회도인데 6세기 초반의 양직공도를 모작하였다고 한다. 양나라 무제 때가 배경이다.
신라 진흥왕 때다.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던 시절이 아니다. 진흥왕이 북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막
중국과 교통로를 확보하려던 시점이다.
당시 신라의 낙후한 항해술로는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없어서 고구려 해안을 따라갔기 때문에 고구려의
방해로 교통이 매우 힘들었던 시절이다.
당나라 태종이라고 설명된 예가 많다. 노국황제라고도 하는데 정확한건 더 조사해봐야 알거고. 임금은 당시
의 당나라때 임금을 그리고 사신도만 과거의 것을 베껴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부터 중국은 짝퉁이 많음.
중국의 역사기록 중에서 주변국과 관계된 사항은 옛날 것을 그냥 베꼈기 때문에 엉터리가 많다.
고구려 사신.. 나이가 많다. 사신의 복식으로 볼 수 있다.
백제사신 중년 아저씨다. 귀족의 모습이다.
신라사신? 사신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냥 신라인이다. 우선 복식이 사신의 복식이 아니다. 서민의 복장이다.
결정적으로 허리에 띠가 없다. 귀족이 아니라는 표시다. 모자를 묶는 끈도 없다. 모자가 아니다. 얼굴을 잘
살펴보면 여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염도 없다. 옷도 검소하다. 머리를 풀어 헤쳤다. 신라청년을 그린 것이다.
왜국사신? .. 왜가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을까? 이런 꼴로? 천만에. 중국의 길거리에서 발견한 왜인을 그린 것이
틀림없다.
인도사신? .. 명백한 여자다. 가슴이 그려져 있다. 거리에서 발견한 인도여인을 그려넣었다.
카자흐스탄 사신? .. 여자다.. 얼굴로 보아 할머니인데 수염이 없다. 여자사신을 보냈을까? 그냥 일반인.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72&docId=1639177&mobile&categoryId=1362
양 무제(武帝)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각국에서 조공을 온 정황을 기록하기 위해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주재
하던 소역이 형주에 온 외국인의 용모·풍속을 관찰하고, 경사인 건강(建康)에만 온 사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사람
을 보내 조사시켜 편찬한 것이다. 양 무제의 재위연대(502-541)와 소역이 형주자사로 재임한 시기(526-539)를 고려
하면 양직공도의 제작시기는 530년대 후반경이 아닐까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결론적으로 일부는 양나라 수도인 건강에 머무르던 사신을 그렸고 나머지는 형주에 온 외국인을 관찰하여 대충
그려넣은 것이다. 백제, 고구려는 국가에서 파견된 사신을 그렸고 신라, 왜, 인도, 카자흐스탄은 그냥 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각국 사신이 한꺼번에 몰아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공이 있을 때 사신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도 없다. 고구려와
백제는 왕래가 많았을 것이고 신라. 왜는 공식적인 왕래가 드물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개인적으로
와서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있었을 수 있다.
신라사신이 화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화랑은 예쁘다는 편견은 드라마를 봐서 생긴 고정관념이다.
화랑이면 미성년자인데 미성년자를 사신으로 보내겠는가?
왜가 미개했지만 국왕이 보낸 사신이 저 정도는 아니다. 일반 왜의 모습이다. 당시 왜는 여러 소국이 난립했는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왜국은 문명화 되어 있었다. 일본이 성립하기 전 왜라고 부르는 토박이 왜인은 일본 남부지역
구주 일대이며 이 그림은 토박이 왜의 모습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은 아니다.
신라인은 모자끈이 없고 넓은 허리띠도 없소.(남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텐데.)
저 시대에는 옷고름이 없었을텐데 어떻게 묶었는지 알 수 없소.
신선암 신라인
삼국시대 복식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는 곳 링크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삼국시대 복식 [조효순 교수님]
http://m.cafe.daum.net/hanbokstudio/4wdH/16?docid=3202396306&q=%EC%82%BC%EA%B5%AD%EC%8B%9C%EB%8C%80%20%EB%B3%B5%EC%8B%9D%3F&re=1
이리 본다면...위의 그림에 있는 신라인의 신분 등급은 10~11 등급이네요.
-.-
아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전에도 사신을 보냈군요. (고침)
사새공복제도는 골품제에 기반한 것이라서 5두품은 청색공복을 입었는데...주로 청색사용일듯.... 하지만 위의 그림이 사신복장의 공복인지는 모르겠네요. 다만 신라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는 나라라서 복식의 표시는중요했을듯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
근데 백제 고구려와 비교해서 저고리 길이가 너무 짧소.
무릎이 드러나 있는데 두루마기와 같은 포는 아니라고 보오.
포라면 대가 밑으로 처져있을텐데
대가 보이지 않는다는건 폭이 좁은 대를 썼다는 뜻.
귀족은 아니고 그냥 청년일 것 같소.
귀족이라면 앞으로 구부러진 스머프 모자를 썼을텐데.
복두라는 형태는 통인신라 시작무렵이라고 하니...복두는 아닌 것 같고... 모르겠네요.ㅋㅋ
신발은 저런형태가 맞는것 같고...
전체적으로 보아서 평민은 아니고..
귀족자제나 5두품 청년정도 된다고 기준이 맞는것 같네요. 사신이라면 깃털을 꽂았을 것 같으니까요.
신라도 통일신라 복식자료는 많아도 신라시대 복식은 많이 없는듯 해요.^^
양직공도 모사본 다른 것도 있네요.
채색안된 모사본이 더 사신복장 같다는...
양직공도는 소역이 539년에 완성했다고 하고 법흥왕은 540년에 죽었고 진흥왕은 7세로 즉위 했고...
신라는 법흥왕때까지는 소국이어서 백제에 의지하여 사신을 보낸 기록은 법흥왕 8년과 15년(?)이고 이때 신라인구 대략 120만 백제 3500만 이었다고 하고...신라는 진흥왕의 친정이 시작되고 나서 영토확장에 들어감.
양무제 때면...신라는 법흥왕이나 진흥왕때...이때는 당나라 복식이 신라에 들어오지 않아서 삼국고유복식 착용하던 시기... 그러나 포는 삼국(두루마기 형태의 긴 옷)시대 모두 입었다고 하나 주로 귀족층...
위의 그림을 보면 유와고의 차림이라 보이고... 법흥왕이나 진흥왕때라면 이런 복식도 어느정도는 타당하다고 보이나...
백제 사신이 고위에 상(상..치마..예복용도)을 걸친 것 같이 보여서...상대적으로 신라복색이 수수하다고 보여지는데... 이때의 신라가 복식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열악했는지, 아니면 사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됨.
근데 참... 그림이 좀 이상함... 체형이나 골격형태는 청년의 자세이고, 얼굴 형태는 여자 같아 보이나...늘어진 턱선과 목선을 보면 나이든 사람 같아 보여...아리송함....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