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아제님의 글에 댓글달다가...문득 마음의 구조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소.
마음을 다쳐야 마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에서... 이 말을 의심해보자면...
마음을 다치면 존엄이고 뭐고 다 내 팽개쳐져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 인간의 행동이라고 보이고, 대부분 마음을 다치고 나서 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만, 마음을 다치고 나서 마음에 관심을 가지면 오히려 마음에 대한 탐구라기 보다는 절망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진정한 마음의 탐구는 마음을 다치지 않고 존엄 그 자체에서 큰 마음으로 접근하여 풀어가는 것이 제대로 마음 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오만은...?
예를 들어 부처가 마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마음을 다쳐서가 아니라(물론 괴로워서 이지만..다쳤다고 보기에는 좀...) 큰 연민의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마음을 해결하려 하다보니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볼 수 있는데...
마음을 다쳐야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외부자극)와 마음을 다쳐서가 아니고 자신의 정신세계 그 자체에서 존엄을 보아야 마음을 제대로 알게된다...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그리고 동렬님께서 마음의 구조를 쓰게되신 동기가 궁금하고, 마음의 구조를 구조론 자체에서 파악하신 것인지, 혹은 경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많이 다치다 보니 마음에 대해 꿰뚫을 수 있게 되신 것인지, 아니면 마음 그 자체를 존엄에서 접근해서 풀어내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까요?
그리고 마음이 다치는 이유는 존엄에서 접근하지 않고 하부구조만을 마음이라 인식하기 때문이고, 하부구조만이 자신의 자아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에 집착하다보니 상부구조를 보지 못해서 그런 오류가 일어난다라고 생각되지만... 외부자극은 필요한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마음이 존엄한 상태에 있어도 외부자극에 대하여 분노할 수도 있는데... 똑같은 상황이고 분노해야 할 상황이라면, 감정에서 분노하는 것과 존엄에서 분노하는 것이 차이가 있는지와 있다면 어떻게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차이가 있다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렇군요.
때때로 문득문득 마음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많아져서..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기억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았지요.
왜 아프냐..별로 잘한게 없었다는 것이...
그때는 아무렇지 (혹은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던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왜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햇을까? 결정을 했을까? 사소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런 사소한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때때로 인생의 길이 달라져 가게 되었구나도 느끼고...
그리고 분노를 크게 느낀 것은 세상이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다는 것..도대체 나는 무슨 세상을 보고 살았길래...다시 본 세상이 그렇게 아프게 여겨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마음 다칠일이 적어질 줄 알았던 것도 착각이었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마음은 너무 아프고 아프다는 것을 알게되니..... 문득 존엄과 마음 다침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궁금해졌네요.
한편으로 존엄과 마음다침은 정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 생각했기에 더 모순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네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첨부하자면...
큰 충격도 그럴 것이나 작고 사소하다 여겨지는 일들에서도 ... 반드시 신을 만나지 못해도^^;..더 크게 마음이 올라서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것들의 하나가 풀려버리면 연쇄적으로 막힌 것은 사라져서 풀려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작은 것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크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 무엇인가에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그것이 해결이 안되면 마음의 병이 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의도는 되갚아 주거나 자신을 스스로 가둬버리는 형태로 가기에 생각 역시 그렇게 진행이 된다고 생각되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생각에서 도출되어 나온 것은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감정으로 풀게 될 수밖에 없어서 악순환은 되풀이되고, 통제가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혹은 사회(공동체)가 개인들의 존엄을 다치게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둘이 모두 협조하는 형국이라면 개인은 질식하게 됩니다. 개인이 질식하는 사회 역시 병들어 가게 됩니다.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어 버리기에...정화(?)를 외치게 됩니다. 개혁이나 혁신 등등...
그러나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자신 스스로의 존엄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해도 곧 마음은 해방입니다. 스스로 억압하고 구속한 상태(노예상태)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존엄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해도 자신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을 동시에 존중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왜 아픈지를 모르기를 때문에 그 아픔을 가져다 준 타인과 사회(외부자극)에 대해서 바르게 대응을 못하게 됩니다. 자학, 회피, 원망, 화풀이, 분노, 미움 등등의 것으로만 풀어 버리려 하기 때문에 자신은 더 마음이 다치게 됩니다. 스스로의 존엄은 더 훼손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스스로 존엄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고, 존중받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면 대응책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음이 아픈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유를 얻은 것과 같고, 의식은 제 자리를 찾아 갈 것이나..이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되며 ..그래서 강한 개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나 아닌 타인들이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짓밟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는 것 역시 아픕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엄이 같이 짓밟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더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더 직접적으로 나의 존엄이 짓밟힌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하니까요.
왠지 동렬님 답글을 받고나서... 울컥하여 눈물이 나는데 옆에서 뭔일이냐고 할까봐...찔끔찔끔 흘려 말리고..에휴..^^;
그냥 눈물이 나지만... 아마도 좋은 의미라고 여겨집니다. 이리 쓰고나니 이미 배 떠났구나..뭔일 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전략)존엄 그 자체에서 큰 마음으로 접근하여 풀어가는 것이 제대로 마음 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오만은...?
◎ 원문의 맥락을 무시한 부질없는 시비로 봄.. 아란도님의 견해와 ‘마음을 다쳐야 마음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 전혀 대립되지 않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오.
이건 사실여부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표현의 문제이오. ‘자유’라는 단어가 한국에 없을 때도 자유는 있었지만, 누군가 자유라고 이름붙여주어야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오.
마음을 다쳐야 ..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단지 영판 모르는 하수들에게 설명하기 위함이요. 하수들은 도무지 공감하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으니까. 실연당해보지 않은 풋내기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해봐야 입만 아플 뿐.
..>마음을 다쳐야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외부자극)와 마음을 다쳐서가 아니고 자신의 정신세계 자체에서 존엄을 보아야 마음을 제대로 알게된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 둘은 같은 이야기요. 존엄을 보면 필연 마음을 다치오. 존엄을 보지 못한 명바귀는 죽을때까지 마음을 안 다치고 낄낄거리며 속편하게 잘먹고 잘 살다가 갈 것이오. 악어가 마음 다칠 일 있겠소? 반면 존엄을 본 권정생 선생은 북한 어린이가 걱정되어 밤잠을 못 이루다가 수명이 단축되었소.
마음을 다치는 것은 존엄을 다치는 것이며, 존엄을 발견한 자만 존엄을 다치오. 환경을 발견한 자는 사대강이 고통일 것이며, 환경을 발견못한 자는 사대강에 아무런 느낌도 없소.
마음을 다친다는 말은 .. 고통을 겪고, 슬퍼하고, 찌질하고, 울고불고 이런게 아니오. 내 마음 안에 다른 것이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게 마음을 다치는 것이오. 사랑의 크기와 마음을 다치는 크기는 정비례하오. 물론 하수들이나 찌질이들이 마음을 다치는 것은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본질은 같소.
존엄을 본 자는 신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것이며, 유마힐이 밝혔듯이 중생의 병이 나의 병이 될 것이며, 진리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것이고 그것을 보지 못한 자는 아무 느낌도 없이 헬렐레하며 잘 살 것이오.
구조론을 연구하려면 구조분석을 해야하는데 제일 쉬운 것은 언어와 마음이오.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고 돈이 안 드니까. 언어분석이 가장 먼저고(초딩 3때)>마음(중 2때)>구조(고 2때)로 가게 된 것이오. 마음을 분석하게 된 것은 순전히 프로이드의 꿈 해몽이 개구라로 여겨졌기 때문이오. 그때는 학계에서 프로이드의 꿈 해몽을 인정하는걸로 착각했소. 이걸 격파하면 엄청난 성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