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하나가 모두와 맞설 수 있는 것
집 단은 멍청해 질 때가 있다. 집단지성이 있지만, 집단실성도 있다. 낯선 상황에 처 할 때가 그 때다. 전대미문의 상황을 만나면 집단은 반드시 악수를 행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본다. 험한 꼴을 당해 봐야 방향을 바꾼다. 말이 안 통한다. 합리는 힘을 쓰지 못하고, 공포가 집단지성을 얼려 버린다. 예술은 그 때를 천지를 울리는 "비명 소리"다. 집단을 실성 상태에서 깨우는 사자후다.
예술가란 인류 전체와 맞서도록 부름받은 사람
예술가란 예민한 사람이다. 민감한 사람이다. 집단의 실성 상태를 견딜 비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라이다. 집단이 실성하면,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다. 입이 있으니 비명을 지를 뿐이다. 그 비명소리를 폭발시킬 도구을 얻지 못하면, 죽어가면서도 비명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술 도구란 낱개 인간이 인류 전체와 맞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도구
예 술가는 손보다 말이 빠른 사람이다. 칼보다 글이 강한 사람이다. 활보다 책이 많은 사람이다. 총보다 컴을 잘 다루는 사람이다. 포보다 폰을 잘 쓰는 사람이다. "결을 따르는 말을 엮어" 손찌검을 이겼다. "이치에 맞는 글을 엮어" 칼을 이겼다. "기승전결이 있는 책을 엮어" 활을 이겼다. "존엄콘텐츠를 컴으로 역어" 총을 이겼다. "문화콘텐츠를 폰으로 역어" 포를 이겨 줄 때다.
영화는 김기덕을 만나 예술의 도구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림과 시와 소설 등은 글을 폭발시키는 증폭 도구다. 하나가 완성한 것을 모두에게 들리도록 한다. 예술의 도구다. 영화는 하나가 완성할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폭력과 자본에 종속되었다. 하나의 낱개 인간은 영화로 예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영화가 김기덕의 "아리랑"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기덕은 그의 가장 강력한 안티 집단인 대한민국 안에서 홀로 영화 "아리랑"을 엮었다. 영화로 천지를 울리는 "비명소리"를 내 질렀다. 영화는 여전히 예술의 도구일 수 있음을 세상 앞에 증명했다.
김기덕은 영화 "아리랑"으로 일을 냈다. 홀로 갈 때까지 가 주었다. 장막을 걷고 숨통을 터 주었다.
김기덕이 영화 아리랑으로 해낸 일이다.
타의로, 어쩌다가 한 영화를 두 번 본 적은 있지만,
자의로, (돈 내고 다운받아) 세번 보았다.
첫번째는 혼자, 두번째는 세 사람이 같이, 세번째는 술과 둘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