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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372 vote 1 2014.01.13 (15:17:51)

    구조론은 다 맞는 이야기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부분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사회는 필요로 한다. 시스템의 근간은 놔두고, 일회용으로 써먹을 아이디어가 대박이 난다. 다 바꾸려 하면 더 안 바뀐다.


    그래도 스티브 잡스는 다 바꾸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20년이나 묵은 아이디어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20년간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스티브 잡스가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그것도 잡스나 되니까 한 거다. 피터지게 해서 겨우 해낸 거다. 다른 사람이 한다고 나서면 모두가 비웃을 일이다. 사실 이건희가 해봤다. 옴니아 나왔다. 비웃음 샀다. 수준에 맞게 카피나 하시지.


    옳은 이야기일수록, 스케일이 클수록, 시스템을 건드릴수록 실현가능성은 더 낮다. 그럴수록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그럴수록 더 크게 가야 한다. 더 확실하게 시스템의 핵심을 정확히 찔러야 한다.


    역사의 수수께끼가 있다. 2차대전때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상당부분 유태인의 협조 속에, 유태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나치는 유태인을 시켜 오늘 학살할 명단을 고르게 했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러셀의 무신론으로 돌아가보자. 믿음에 대한 비판은 실패한다. 정치적 기동 때문이다. 그들은 집단에 판단을 위임한다. 그들은 믿기로 판단한 게 아니라, 판단하지 않기로 판단한 거다.


    구조론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가면 나도 갈래.’ 하는 사람 많다. 틀린 판단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 이전에 스마트폰 아이디어는 20년간 계속 실패했다. 남들보다 앞서간 사람은 당연히 망했다.


    이건희처럼 얍삽하게 뒤따라가는 사람이 성공한다. 왜 유태인은 잘못된 판단을 했을까? 동학의 항쟁은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이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왜 글자 아는 지식인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까?


    일본만 해도 명치시대의 주요인물들은 새파란 애송이 젊은이였다. 20대 젊은이들이 지사가 되어 세상을 바꾸었다. 유교주의 조선은 노인이 대접을 받았다. 노인도 안 나서는데 젊은이가 나서겠는가?


    노인이 나서지 않을 때 젊은이가 나서야 하고, 지식인이 나서지 않을 때 농민이 나서야 한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그거 해봤자 안된다구.’ 하고 포기할 때 무모하게 덤벼야 그나마 약간의 확률이 있다.


    스마트폰은 원래 안 되는 것이다. 20년간 계속 안 되었다. 아는 사람일수록 소극적으로 된다. 유태인이 그랬다. 그들은 부자들이었다. 부자는 빈자와 무엇이 다른가? 부자의 세계는 노인이 존경받는다.


    한국의 건희노인, 몽구노인부터 미국의 워렌 버핏노인까지 세계의 부자들은 다 노인들이다. 유태인은 부자고, 부자는 노인이 존경받고, 노인은 무모한 도박을 하지 않으며, 확실하고 안전한 길만 간다.


    당시 유태인 입장에서 확실하고 안전한 길은 없었다. 무모한 모험을 해야 했다. 유태인이 일제히 봉기했다면 역시 많은 사망자가 나왔겠지만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확실한 길 찾다가 길을 못 찾았다.


    다시 100년 전 조선으로 돌아가보자. 외세가 침략해 오는데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하지? 70살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해외여행하고 외국문물 배우고 외국어공부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겠는가?


    한국의 지식인도 그렇다. 지식세계 역시 노인이 존경받는다. 노인이 구조론과 같은 원대한 계획을 세우겠는가? 노인이 판을 완전히 갈아엎어 버리자고 나서겠는가? 노인을 존경하면 답은 없다.


    유태인은 돈이 많은게 병이었다. 한국의 지식집단은 아는게 병이다. 스티브 잡스와 같이 열정에 넘치는 무모한 젊은이가 필요하다. 지식으로 하는게 아니고 감으로 하고, 에너지로 하는 거다.


    유태인의 소극적 순응은 나만 살고보자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나치에 협조하면 자기 한 목숨은 살려줄 것으로 믿고 유태인이 유태인을 죽인건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침착하고 지적이고, 세련되었다. 그들은 나치의 지시를 따라 줄을 똑바로 맞추고 서서 차분하게 자기 죽을 차례를 기다리며 고상하고 우아하게 죽어갔다. 패닉에 빠져 데굴데굴 구르며 난동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부자였고 부자답게 노인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이왕 죽음이 결정되어 있다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게 맞다고 본 것이다. 한국의 똑똑한 지식인들처럼 말이다. 그것은 바른 결정이 아니었다.


    체계가 있고 질서가 잘 잡힌 사회일수록 상부구조에 판단을 떠넘긴다. 변화에 대한 경직성은 커진다. 유태인은 나이 많은 부자에게 판단을 떠넘겼고 조선은 나이 많은 양반에게 판단을 떠넘겼다. 실패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까뮈

2014.01.13 (22:23:06)

읽고 보니 그렇군요.유태인들은 아우슈비치 수용소로 조용히 끌려가고 매일 동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수용소에서 반란도 안 일으키고...하늘나라로 가는 티켓들고 순서 지키듯이.


미국 영화에선 수용소 미군들이 별라별 작전을 피며 도망가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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