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찻주전자 “지구와 화성 사이에 찻주전자 하나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찻주전자는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찻주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찻주전자가 존재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옛 경전에 이것이 나와있다는 이유로 이 찻주전자의 존재를 믿으며, 믿지 않는 자를 배척한다면?(엔하위키미러)” 러셀이 기독교를 비판하며 지어낸 이야기다. 무신론자에게 신의 부재를 입증하라고 압박할 것이 아니라, 종교가 먼저 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종교를 패러디한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교’라는 것도 있다. 러셀의 찻주전자는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집행력이 없다. 공허하다. 말은 맞는데 뭔가 핵심을 비켜갔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꿀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방식은 야유와 패러디에 그치고 만다. 정면승부는 못된다. TV토론에서 유시민이 아무리 똑똑한 말을 해도 얼굴에 철판 깔고 덤비는 새누리를 제압하지 못한다. 토론에는 이기고 공감에는 진다. 이유가 있다. 감추어진 저변의 에너지 메커니즘을 살펴야 한다. 종교는 기득권이다. 무신론은 후발주자다. 정치게임으로 보면 후발주자가 신제품의 우수성을 입증해야 한다. 신제품이 구제품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광고하여 알려야 한다. 이는 과학의 논쟁을 정치게임으로 변질시킨 속임수다. 이와 비슷하게 법률적 판단을 정치게임으로 변질시켜, 기득권의 힘으로 억누르는 일은 흔히 있다. ‘종북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 하고 몰아치는 검찰이 그렇다. 후진국에서는 먹히는 수법이다. 진짜는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은 에너지를 타고 간다. 에너지는 작위다. 방아쇠가 있다. 먼저 에너지를 동원하여 방아쇠를 격발하므로써 작위한 쪽에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게임으로 가면 이 규칙이 왜곡된다. 기득권의 작위는 부작위로 간주되는 특혜를 받는다. 정치는 일대일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먼저 그들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지금이 절대왕정 시대라면 왕이 먼저 왕실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게임에서는 저항세력이 먼저 원인제공하여 사건을 유발시킨 걸로 간주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다. 기득권은 일천년 전에 이미 인정을 받았는데 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입증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나온다. 또 기득권을 개혁하자면 비용이 드는데 누가 돈을 대겠느냐고 압박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부작위를 표방하며 에너지 문제를 제기하여 작위를 친다. 이 지점에서 토론은 진실의 규명이라는 애초의 의도를 잃고 집단의 힘대결로 변질된다. 반면 교학사 교과서 소동은 그들이 먼저 작위한 점에서 실패다. 보수는 소극적으로 방어하며 개혁에게 비용을 추궁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이 먼저 작위하여 비용문제를 발생시켰으므로 4대강과 마찬가지로 교과서 소동은 실패다.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다중의 귀차니즘을 극복하게 하는 심리적 비용까지 감안해야 한다. 방어쪽에서 물리적 절차를 끌어대면 성공이고, 반대로 공격쪽에서 물리적 절차를 끌어대면 실패다. 러셀은 실수하였다. 밑바닥의 에너지 메커니즘을 간파하지 못했다. 찻주전자 하나로 종교집단에 타격을 가했다고 믿겠지만, 교활한 정치게임의 수렁에 휘말려서 헤어나지 못한다. 일대일 토론은 일 대 다수의 패싸움으로 변질된다. 러셀의 방법은 실패한다. 왜인가? 기독교 모형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러셀은 종교기득권이 생산성있는 하나의 사유의 모형이라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밑바닥에 묵직한 것이 매달려 있어서 오뚜기처럼 원위치 되고 만다. 상부구조가 있다. 연동되어 있다. 사유의 모형이 있다. 모형을 갈아엎는 비용이 청구된다. 정치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의 엮임에 의한 비용이 발생된다. 기득권은 정치적 기동으로 방어한다. 집단의 구성원 모두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면 포기하라는 식으로 압박한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 표면의 사실관계 규명보다 이면의 에너지 메커니즘으로 승부해야 한다. 구제품은 신제품으로만 밀어낼 수 있다. ‘구제품이 옳다는 증거를 대봐.’ 하는 식으로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러셀의 무신론은 신제품이 아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종교인들이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다면 기능이 있다. 물적 생산력이 있다. 에너지는 에너지로 쳐야 한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종교적 위안을 필요로 하는 대중들에게 과학은 어떻게 위안을 줄 것인가? 논쟁은 정답이 아니다. 대체재가 되는 새로운 모형의 제시가 정답이다. 진짜 문제는 기독교의 창세기모형이나 불교의 순환모형이 아니라, 과학의 입자모형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과학의 입자모형을 모든 사유의 원형으로 쓰고 있다. 사유는 복제된다. 사유를 찍어내는 원본이 중요하다. 도량형의 표준인 원기原器가 아침저녁으로 변한다면 곤란하다. 바른 사유의 원기를 갖추어야 한다. 틀린 모형은 맞는 모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구제품은 신제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새누리당이 틀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의미없다. 우리가 작위하여 괜찮은 대선후보를 내세우는 방법으로 대중의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야 한다. 저쪽이 틀렸다는 수동적 고발로 부족하고, 우리쪽이 옳다는 자랑으로 선제대응해야 한다. 에너지를 투입하여 작위해야 한다. 방아쇠를 격발해야 한다. 아무리 흐린 구정물이라 해도 새물이 밀고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버티고 있다. ‘넌 구정물이니까 이제 그만 사라져줘. 지겨워.’ 하는 부탁은 수용되지 않는다. 애걸하지 말고 힘으로 밀어내라. 올바른 사유의 모형을 제시하라. 러셀은 찻주전자로 종교를 쳤다. 그러나 배후에 가려진 사유의 모형에 막혀서 실패했다. 필자는 완전성모형으로 과학의 입자모형을 친다. 생산성으로 승부한다. 더 많은 생각을 찍어내는 사유의 모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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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습니다.
저것이 맞다의 반대말은 저것이 틀렸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 도덕일뿐..
저것이 맞다의 반대말은 이것이 맞다 입니다.
대체재의 제안이 해결책 과학입니다.
자게에 올린 제 글은
종교의 틀린 방향성을 조롱하고
도덕의 공허함을 비난하고자 쓴 글입니다.
이제는 인문에 과학을 도입하여
종교와 도덕을 바로 세워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1.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있다는 가정은 무의미한 것..
2.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없다는 가정도 무의미한 것..
3.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또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논쟁이 성립하지도 않을거고
4. 봤다는 놈이 있고,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봤다는 놈은 미친 놈..
5. 봤는데 없다는 놈이 있고,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이 놈도 미친 놈..
고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는 문제는, 무의미하거나, 헛소리거나..
5, 6번에서 그 미친놈이 외계인이라면 증명할수 없을리가 없을 거고..ㅋㅋㅋㅋ
이런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언어학적인 견지에서 결론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죠.
국어사전이든 백과사전이든 '있다'는 단어의 뜻은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있다는게 뭔지 모르면서 '있다없다' 논하는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뭔지 모르면서, 신이 있다없다 논하는건 의미가 없다는 거죠.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천국이나 내세나 지옥이나 천사나 귀신이나 유령이나
외계인이나 사후세계나 이런건 다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제가 낱낱이 설명했는데
지금 다시 길게 말하긴 그렇고 'A면 B다'의 논리구조를 적용하면 그렇게 됩니다.
홍길동도 있고 홍길동 부인의 남편도 있고
이렇게 홍길동을 둘로 셋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거죠.
홍길동은 홍길동 아닌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거죠.
이 논리규칙을 계속 추궁해 들어가면
대략 합의될 수 있는 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대신 종교는 낱낱이 다 무너집니다.
종교는 '신은 있지만 신은 없다'는 이중논리를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신이 있는 이유는 가족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이행할 목적이고
(신이라는 개념은 원래 가족의 시조가 죽었을 때도
가족이 흩어지거나 서로 전쟁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아이디어.)
종교의 신이 없는 이유는 신이 인간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대표적인게 제사.. 이 규칙을 현실사회에 구현한 것이
"왕은 존재하나 군림하지 않는다."
"왕은 있지만 왕이 왕질하지 않는다."
잘 살펴보면 모든 종교의 신이 이 규칙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순수한 추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무신론자에게는 무신론자의 신이 있더라는 거죠.
임의대로 신을 지어내면 곤란한 거죠.
예컨대 평행우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우주 밖에 또다른 우주가 있든 없든 우리 우주와 만나지 않으면 없는 겁니다.
존재의 단위를 상호작용의 단위로 봐야 합니다.
이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차례로 하나씩 소거시켜 가면 답이 나온다는 거죠.
예컨대 사후세계가 있다치고 현실세계와 직접 연결되지 않으면 없는 겁니다.
사후에 내가 어느 천국에 태어나든 지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내가 죽고 난 다음 지옥에서 개고생을 한다면
그 웃긴 놈이 고생하는 거지 지금 나와 아무 상관없죠.
천국에 간 사후의 나든 지옥에 간 사후의 나든 내가 아닙니다.
외계의 어떤 별의 어떤 외계인이 이름이 나와 같든 말든
거기서 개고생하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이런 문제를 엄격하게 따질 배짱이 있어야 어른의 대화가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