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당이 출산주도성장이라는 해괴한 구호를 내놓았다. 생명의 존엄성 영역을 두고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하위수단으로 여기다니 무개념에 몰상식의 극치다. 좁은 국토에 비해 아직도 한국의 인구는 많다. 남북통일을 대비한다면 인구문제가 급한 문제는 아니다. 북한 인구를 흡수하면 노동력을 확보해서 한숨 돌릴 수 있다. 미래사회는 인간이 죽지 않는다. AI시대라 노동이 힘들지 않다. 80살까지 일해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 급하게 억지 출산을 강요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다. 애를 하나씩 낳아서는 어차피 답이 없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되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아기를 낳지 않는 것도 여성의 권리다. 어차피 전체 여성의 1/3은 정부가 무슨 수를 써도 아기도 안 낳고 결혼도 안 한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결혼과 자녀부양을 기피한다. 왜냐하면 안 해도 되는데 왜 해? 본인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강제할 수 없다. 생존환경이 달라졌다. 과거에 아기를 많이 가졌던 것은 첫째, 농경사회에서 자녀의 노동력을 착취할 목적이었다. 현대사회에 와서 자녀의 노동력을 착취할 이유가 없는게 본질이다. 둘째, 과거에는 가문의 세력을 늘려 경쟁하는 상대가문을 제압할 의도가 있었다. 지금은 봉건적인 가문대결이나 원수가문 간의 복수극이 사라져서 세력을 불릴 필요가 없다. 과거에는 가문의 세가 약하면 괄시받았다. 지금도 집성촌은 각성받이를 차별한다. 경북 문경에 신씨마을이나 예천에 황씨마을이나 영주에 박씨 집성촌이라면 이장이나 부녀회장을 절대 각성받이나 귀촌귀농인에게 주지 않는다. 마을에서 다수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피해를 받는다. 성씨가 같은 집안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야 당당하게 대접받고 사는 것이다. 봉건 향촌사회는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부 무개념 한국인들이 성소수자나 혹은 조선족이나 다문화를 괄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세력이 약하다고 믿고 공격행동을 하는 것이며 이는 원시의 본능이라 하겠다. 과거 집성촌에서 각성받이 왕따시키던 버릇이 나온 것이다. 교육받은 문명인이라면 그런 원시의 생존본능을 이성으로 극복해야 한다. 봉건사회는 가문의 세력이 최상의 가치였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불행한 것은 국가 탓이 아니라 가문의 세력이 약한 탓이었다. 보나마나 조상의 무덤자리를 잘못 써서 후손이 발복하지 못하니 조상 무덤을 어디로 이장하느냐가 조선후기 민중의 큰 관심사였다. 관가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소송이 무덤자리와 관련한 것이었다. 지금은 가문의 세력을 불려야 할 이유가 없다.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어깨에 힘주는 사회가 아니다. 결혼과 출산의 본질가치가 상당히 소멸했다. 현대사회에서 아기를 갖지 않는 것이 본인에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결혼과 출산을 국가에서 강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답은 출산할 의사가 있는 나머지 2/3에서 찾아봐야 한다. 두 번째 1/3은 가정을 유지할 목적으로 아기를 한 명만 낳는 경우다. 남편이 전문직이라서 맞벌이를 안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혹은 자영업을 하면서 육아와 경제활동을 겸할 수 있거나 혹은 공무원이라서 경력단절에 신경쓰지 않거나 등의 이유로 부부생활에 구심점이 되는 아기를 한 명만 낳고 싶은 경우다. 아기가 없다면 백퍼센트 부부관계는 깨진다고 봐야 한다. 단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다. 왜냐하면 이해상충으로 남편과 아내의 대립구도가 벌어질 때 아기가 있어야 남편의 공세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본능적인 이유로 여성은 대개 자기보다 뛰어난 남편감을 원한다. 좋은 유전자를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당연한 결정이다. 길거리에 금과 은이 떨어져 있다면 누구라도 금으로 먼저 손이 간다. 금을 놔두고 은을 취하는 바보는 없다. 여성이 자기보다 뛰어난 남성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다. 그러나 남성은 다르다. 원래 인간은 모계사회라서 자녀는 여자 것이지 남자 것이 아니다. 봉건사회에 와서 가문 간의 세력대결이 벌어지자 세력경쟁에서 승리할 목적으로 남자아이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남아선호는 일시적 현상일 뿐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성은 자기보다 뛰어난 여성과 결혼할 이유가 없다. 남성은 부족주의 본능에 따라 여성을 자기가 거느리는 부족 구성원쯤으로 여긴다.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으로 보면 결혼은 여성 입장에서 땅바닥에 떨어진 황금을 주워가지는 것이며 남성은 도원결의를 해서 동료나 혹은 부하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어떻게든 의사결정의 우위에 서려고 하며 여성이 이에 맞대응을 하려면 첫째, 집을 가져야 하고, 둘째, 아기를 가져야 한다. 보통 남자는 겉돌게 된다. 여자가 집을 자기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면 남자는 집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포장마차를 전전하며 퇴근거부 행동을 하는데 이 늙은 꼰대들 때문에 젊은 남편은 퇴근도 못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결혼한 여성에게 아기가 필요한 이유는 가정 내의 의사결정에서 포지셔닝의 우위를 장악하기 위한 거다. 집과 아기가 없으면 남자를 통제할 수단이 없게 된다. 집도 중요하다. 가사를 완벽하게 분담하면 남편을 통제할 수단 한 가지를 잃는다. 남자가 집안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여성이 곤란해지는 경우가 많다. 주도권을 쥐려면 여성이 살림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남편은 양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해야 한다. 물론 현대사회의 교육받은 문명인이라면 부부간에 주도권 경쟁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가사를 분담하는게 맞다. 결론적으로 가정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아기를 필요로 하는 경우 아기를 한 명만 가져서 인구가 감소한다. 이들을 지원해봤자 효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인구를 늘리려면 정부는 나머지 1/3에 집중해야 한다. 아기를 적어도 3명 이상은 낳겠다는 경우다. 가정을 작은 부족사회로 만들고 부족 안에서 자체 권력을 생성하려는 경우다. 원래 아이를 좋아해서 경제적인 뒷받침이 된다면 얼마든지 아이를 낳겠다는 경우다. 이 경우는 아기가 커서 아기를 키우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진다. 첫째가 둘째를 키우고 둘째가 셋째를 키우는 거다. 정부는 여기에 기대할 수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어차피 아기를 안 낳거나 낳아도 하나밖에 키우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다. 아기를 셋 이상 키우는 가정에 지원을 몰빵해야 한다. 결국 이 방향으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안 낳겠다는 사람 낳게 하기보다 낳겠다는 사람 더 낳게 하기가 쉽다. 미래사회는 인간의 의사결정 총량은 증가하고 노동은 감소한다. 할 일은 많은데 남자가 굵은 팔뚝으로 힘들게 할 일은 없다. 물류센터 아저씨와 제빵회사 노동자만 힘든데 그것도 로봇으로 대체된다. 하루 4시간 이하 단시간 노동이 많아진다. 단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3자녀 이상을 책임지는 여성을 공무원으로 대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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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가 필요한지 알아서 지원해줄 듯~~
최근에 읽은 글 중 가장 공감가는 내용입니다.
버리는 카드와 될 카드는 구분해야겠지요.
안되는 곳에 의미없이 돈 쓸 이유도 없고.
아이 셋 이상 낳는 부부는 국가에서 특별예우 차원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출산과 육아는 상당부분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현대 기성종교가 역할을 하는 이유는 출산과 육아가 대표적이죠.
여자들이 특히나 약해서 종교에 매이는게 아니라, 출산과 육아로 연결되어있는거죠.
대표적으로 주일학교. 진작 망했을 개신교가 살아남은 이유죠.
동렬님 말씀대로, 안낳겠다는 사람들 잡을수는 없는거고,
낳겠다는 (적어도 3이상) 군집을 지원해주는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출산과 육아는 더이상 이상한 기성종교에 맞기지 말고,
국가가 개입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7-80년대의 사회주의식 말고,
스마트한 메뉴얼화가 필요합니다.
새나개에서 보듯이 현장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심리적 혹은 인류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양육에 임해야하는거죠.
예전에 자기 아이들과 편먹고 남편을 왕따시키는 아짐을 본 적이 있는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이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