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의 트랜스젠더 소동 여대는 봉건시대에 여성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들 때문에 생긴 것인데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있다면 끔찍한 일이다. 여대의 존재 자체가 여성차별이다. ‘여자를 공부시켜서 뭐하냐?’는 봉건논리에 ‘여대를 가야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봉건논리로 맞서다가 생겨난 것이 여대다. 여성 인재를 양성한다지만 여자만 상대하다가 갑자기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까? 남자도 남중, 남고, 군대를 나와서 여자를 모른다. 곤란해진 남자는 여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수법을 쓴다. 상대하지 못하니까 배제하는 것이다. 여자 상사가 여자 직원을 승진시켜야 진짜 평등이 실현된다.
여대의 긍정적 기능도 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여대는 낡은 봉건습속이 맞다. 여중과 여고와 여대와 군대가 있는 한 양성평등의 길은 멀기만 하다. 남중, 남고, 군대로 10년을 갈라놓고 서로를 이해하기를 바란다는게 말이나 돼? 숙명여대에서 트러블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트랜스젠더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면 많은 관리를 해야 한다. 여자는 중성적인 옷을 입어도 괜찮지만 트랜스젠더는 그렇지 않다. 가슴에 보형물을 삽입하고 매일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리하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하리수는 아니므로 많은 혼란이 일어난다. 유리한 것을 취하고 불리한 것을 거부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남자가 먼저 변해야 하지만 여자가 더 많이 변해야 한다. 이는 모든 약자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흑인이 변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등은 없다. 백인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아내고 만다. 강남 기득권들이 자기만의 성을 쌓듯이. 땅값을 올리는 목적은 빈자가 강남에 거주하지 못하게 장벽을 치려는 것이다. 인도가 카스트를 폐지했지만 형식적 차별이 폐지되었을 뿐이다. 엘리트 사회는 차별이 없지만 밑으로 갈수록 차별한다. 형식적 평등은 엘리트 소수자에게 유리하다. 여성을 피해자 프레임에 묶어두는 것은 반 페미니즘이다. 양성평등은 가해자 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문제다. 원래 부족사회는 여자족, 남자족이 있고 여전히 그 습속이 남아있는 거다. 원시의 본능으로 본다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생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진다. 여성을 우대하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승리해 왔다. 차별하는 이유는 그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왜 지역주의가 생겨났을까? 정치적 음모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타락한 정치가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패배한다. 양성평등은 적응하기까지 여자, 남자 모두에게 불리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5퍼센트에게 유리하다. 모든 평등이 그렇다.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치어리더를 없애고, 모터쇼에 여성 도우미를 없애고, 대기업에 여성 고위직을 늘리면 누구에게 유리한가? 엘리트 여성에게 유리하다. 진정한 평등은 엘리트에게 유리한 것이며 그런 사회가 언제나 이긴다. 엘리트가 우대받는 집단이 인류 모두의 엘리트로 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인류 전체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모두에게 유리하게 된다. 인간이 결국 변화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 또한 마찬가지다. 본질은 이기느냐 지느냐다. 주도권을 잡으려면 이겨야 한다. 올바르지 않으면 진다. 미국은 이미 이겼으므로 더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 그래서 트럼프를 찍는다. 우리는 아직 이기지 못했으므로 올바름으로 가서 이겨야 한다. 그 과정은 당연히 힘들다. 이것을 적응과정에 힘들어하는 나머지 95퍼센트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백인은 흑인을 차별하고 아시아인은 서로를 차별한다. 피해자는 아시아다. 아시아인이 차별당하는 이유는 한중일이 서로 싸워대기 때문이다. 아시아가 단결하여 공자문명이 예수문명을 이길 때 차별을 극복한다. 인간은 원래 차별하는 동물이다. 인정해야 한다. 보이게 차별받느냐, 몰래 뒤로 차별받느냐의 차이뿐이다. 차별을 거부하는 그룹이 계속 이겨가는 것이 역사다. 역사가 본래 그러하므로 인간은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노자의 가르침대로 무위자연하면 자연스럽게 차별하게 된다. 인위적으로 차별주의를 극복해서 일본과 중국을 이기고 서구를 이겨야 한다. 평등을 받아들이려면 경쟁자를 이길 마음을 먹어야 한다. 남자옷을 입고 남자의 외모를 하고 있어도 본인이 여자라고 주장하면 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본인이 남자라고 주장하면 남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중과 여고, 여대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게 화내지 말고 그런 것을 만들어놓은 사회를 비판하라. 화가 난다고 화를 내면 안 된다. 그게 하지마라는 자기소개가 된다. 화가 난다면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변화에 적응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여중, 여고, 여대를 다녔기 때문에 환경변화에 적응이 안되어 무의식적으로 트랜스젠더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섭다고 말하면 안 된다. 당신이 사회에 관심이 없어서 무서운 것이다.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을 반성하라. 필자는 그런 것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왜냐하면 칼럼을 써야 하니깐. 글을 쓰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니깐. 알면 조금도 무섭지 않다. 모르면 무의식이 훈계한다. ‘좀 배워랴. 이 녀석아.’ 그럴 때 무서운 거다. 무서움은 세상을 공부하라는 뇌의 명령이다. 무서우면 무서워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 화가 나면 화내지 말고 타인과 교류하라. 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라는 뇌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혁은 엘리트에게 유리하다. 세월이 흐르면 적응되어 모두에게 유리해진다. 조선이 독립하면 독립정부의 장관이 될 엘리트에게 유리하다. 이름 없는 민초라면 의미가 없다. 국적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상관없다. 가난한 조선에 세금 뜯기느니 부유한 일본에 뜯기는게 더 낫다. 독립군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그랬다. 해방되자 3초 만에 태도를 바꿨지만. 민초들도 자기 아들은 장관이 되어야 하므로 결국은 독립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긴 호흡으로 보면 개혁이 모두에게 유리하다. 개혁의 본질은 인적자원의 총동원이다. 남자만 동원하고 귀족만 동원하는 사회보다 남녀노소 빈자부자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총동원하는 사회가 이긴다. 인간은 변화에 적응하는 동물이지만 적응하기까지는 괴롭다. 이거 인정해야 한다. 엘리트는 그런 변화에 이미 적응해 있다. 만약 이런 것에 적응이 안 되면 나는 엘리트가 아니구나 하고 반성하자. 우리는 개혁에 반대하는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더 큰 목표를 제시해야 민초들이 따라온다. 평등하기 위한 평등이라고 하면 모두가 반발한다. 공자문명이 예수문명을 이기고 세계사를 선도하는 큰 그림을 그려야 대중이 납득하고 따라온다. 왜? 이기고 싶으니까. 그 안에 역할이 있으니까. 발굴해야 하는 에너지는 거기에 있다. 역할을 주지 않고 그냥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폭력이다. 역사의 법칙은 에너지 유도가 먼저다. |
"우리는 개혁에 반대하는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더 큰 목표를 제시해야 민초들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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