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세계의 사이코패스를 조심하라! 다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사이코패스 개념이 흑인이나 유태인 혹은 집시나 장애인, 이교도와 같은 차별의 언어와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된다면 위험하다. 자기 자신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식이면 곤란하다. 범죄는 다 외국인이 저지른다든가 혹은 흑인이나 집시, 이교도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식의 과거 서구 여러나라에 있었던 편견들.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차별과 편견’이라는 안전한 동굴 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비겁하다. 지성이 결여된 태도이다. 솔개를 만난 병아리가 낙엽더미에 머리만 쳐박는 식이라면 어리석다. 자신은 외국인도, 흑인도, 집시도, 유태인도 아니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므로 괜찮다는 식이면 좋지 않다. 눈을 감고 회피한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태의 본질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코 패스는 단순한 유전적 결함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이코패스는 주변에 많다. 그들 중에서 흉악범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 문제는 ‘사이코패스의 논리’다. 그들은 사회일반의 상식과는 다른 그들만의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왜? 그들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약자의 고통이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는 증세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미를 발로 밟아 죽인다. 개미의 고통이 자신에게 전해져 오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용산 철거민의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는 철면피들이 바로 사이코패스다. 그들은 약자의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비뚤어진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 잘못된 상식이 문제의 근원이다. 이라크에서, 북한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전쟁과 기아와 환경파괴로 죽어가는 생명들의 고통이 온몸으로 전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바로 사이코패스다. 당신은 충분히 느끼고 있는가? 그 고통을! 사이코패스의 논리를 격파함으로써 언제든 흉악범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는 우리 사회의 숨은 사이코패스들을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사형제도 부활을 주장하는 그 핏발선 고함소리가 바로 사이코패스의 논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의자에게 복수하겠다는 식의 발언들이 바로 사이코패스의 입장임을 왜 모르는가?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다. 사이코패스를 비난하면서 그들을 닮아가면 안 된다. 복수와 복수의 악순환이 난무하는 세계야 말로 사이코패스의 천국이 아니던가. 왜 포기하는가? 왜 사이코패스의 논리에 굴복하는가? 왜 비겁하게 도망가려고만 드는가?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저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상대방을 물리력으로 억압해놓고, 상대방이 복종하지 않을 때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하기 때문이다. ‘약자는 당연히 강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이코패스의 상식(?)을 어긴데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갑자기 입에 거품물고 눈알 돌아간다. 이성을 잃는다. 미친듯이 폭력을 행사한다. 보통사람은 약자의 고통이 충분히 경험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자제력을 발휘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한다. 왜? 경험한 바 없으니까. 또 하나는 ‘자신은 잡히지 않는다’는 이상심리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회의 강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약자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감이 없다. 경마장을 찾는 도박꾼들이 자신을 행운아로 믿듯이 그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믿는다. 강자의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과거 조직폭력배 두목들의 자서전이 서점가에 유행한 적이 있었다. 월간지 인터뷰도 한동안 성행했다. 모두들 ‘반성한다. 참회한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은 뻔뻔하게 잘도 하더라만 진심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는 자는 그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죄값은 징역살이로 치렀으니 이제 되었고, 앞으로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고 안이하게 믿고들 있었다. 과연 된건가? 죄값을 치르면 다되나? 징역만 살고 나오면 그렇게 떳떳한가? 천만에! 만약에 말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죄값이 셈으로 치르는 것이라면 거액의 돈을 물어주면 살인도 괜찮은가? 분명히 말한다. 죄에 셈은 없다. 조폭두목이 천년을 징역살이 해도 그 죄의 무게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피해자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어떤 경우도 피해는 복구되지 않는다. 원상회복은 없다. 상처로 남아있고 악몽으로 남아있다. 교도소의 존재는 다른 의미다. 죄를 지어도 자신이 해꼬지한 만큼 징역살이로 되갚으면 된다는 식의 복수논리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반사회성이라는 죄의 본질을 모른다.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사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죄가 추궁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반면 사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도주하면 작은 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본질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자신이 가장 강한 줄 알았는데 국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반성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이유도 간단하다. 하느님이 가장 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거다. 똘마니가 두목에게 충성한다는 격으로 교회를 섬기고 국가의 법에 복종할 뿐 ‘힘에는 힘’이라는 조폭의 논리 자체는 포기하지 않더라. 교회의 똘마니, 국가의 똘마니로 소속을 바꾸었지만 정체성은 그대로였다. 범죄의 본질은 반사회성이다. 반사회성을 버리지 않는 한 진정성은 인정될 수 없다. 그들의 복수논리,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반사회성의 증거다. 이 점을 범죄자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잡히지 않을줄 알았고, 자신이 가장 강한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사실만 겨우 납득했을 뿐이다. 그들은 강자의 논리로 무장하고 사회에 틈입한다. 강자의 논리 그 자체가 흉기다. 강자의 논리가 도처에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들은 강자에게 굴복하고 약자를 괴롭힌다. 약자의 고통은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감각하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언제든 굴복할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은 교화되었다고 착각한다. 틀렸다. 죄값을 치르면 다되는게 아니고, 강자에 굴복하면 다 되는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편, 진보의 편, 역사의 편, 진리의 편, 신의 편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 너와 나를 구분하고,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차별과 편견이라는 담장을 쌓고, 그 심리적 안전장치 뒤로 숨는 비겁이 바로 반사회성이며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두목들은 한결같이 반성과 사죄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배신자나 라이벌 조직에 대한 적의는 살아있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자를 응징해주는 행동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법망을 피해 처벌되지 않은 범죄를 궁리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제압은 한계가 있다. 마음으로 심복시켜야 진짜다. 논리에서 이겨야 진짜다. 그들이 차별과 편견, 오만과 몽상이라는 안전한 심리적 방어막 뒤에 숨어서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마음에 안들면 무턱대고 빨갱이, 이교도, 외국인, 흑인, 유태인, 여자, 장애인으로 낙인찍고 몰아붙이는 심리의 이면에는 ‘그래서? 네가 어쩔건데’,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안전하다. 처벌받지 않는다’ 안도감이 깔려있다. 그 비겁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그들은 사이코패스의 논리에 굴복한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죄에 셈은 없다. 천년을 징역살이 해도 죄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너와 나를 가르고, 강자와 약자를 가르고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하는 그 자체로 죄다.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죄다. 범죄자를 교화하는 것은 죄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기를 치른 자들을 방면하는 것은 그들이 선량한 시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우위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다. 죄값을 치르면 그만이라는 그들의 복수논리를 해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일관되게 도덕적 우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강자의 논리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우리는 일관되게 도덕적 우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
" 강자의 논리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정말 가슴에 와닿는 말입니다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