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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브이즈 의병 심심이님의 작품을 퍼왔소.. 기가 맥히는 작품이오. 』 |
운요호(雲揚號)로 위협해 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우면 곧 일본의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을 몰라서 초지진의 병사들이 대포를 쏘아댄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역사의 필연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 뻔히 알면서 당할 때가 있다.
조중동 프레임이라면 최대의 피해자는 DJ다. 조중동에 이용당하든 말든 무대뽀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바보 노무현이다. 그러고 보니 DJ와 노무현은 참 바보다. 조중동의 함정에 빠진다는거 뻔히 알면서 왜 그랬을까?
지금 노무현 지지율 30퍼센트 선이다. 조중동에 아부했으면 40프로는 건졌을건데 왜 그랬을까?
한나라당이 더 이득을 본다는 사실을 몰라서 DJ가 지역등권론을 편 것은 아니다. 적의 파상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핵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때로는 우리가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는 싸움을 각오해야만 할 때가 있다.
조중동, 대목장 보는가?
바야흐로 선거철이 된 것이다. 수구들에게는
‘수구 프리미엄’이 있다. 그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그 프리미엄을
찾아 먹는다. 그들에게는 선거철이 ‘대목’인 것이다.
김수환을 걸어서 원래 그들 몫이었던 수구프리미엄을 찾아먹는 것에 다름아니다.
김수환으로 걸지 못했다면 또 다른 걸로 걸어서 그 몫을 찾아먹었을 것이다. 어차피 뺏길 표이다. 표는 표대로 뺏길거면서, 조중동이 무서워 해야할 비판을 못한다면 비굴한 거다. 김수환도 잘못이 있다면 예외없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조중동이 그걸 약삭빠르게 이용한다면 어쩔 수 없다. 이용 당하는 거다.
그동안 우리는 늘 당해왔다. ‘국민참여 0415’만 해도 그렇다. 이거 지는 게임이다. 서영석님은 TV토론에 나가서 지고 왔다고 한다. 얻는 표 보다 잃는 표가 더 많다. 그래도 알면서 가는 거다. 총선에 역풍 불더라도, 다음에 대선이 있고 그 다음에 또 총선이 있다.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도 못하고 그 다음에도 못한다. 역풍이 불더라도, 그 때문에 10석을 뺏기더라도 가야할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숙명인거슬.
노무현의 여의도 발언도 그렇다. 그래서 몇 표나 얻었지? 까놓고 이야기하자. 멍청한 발언해서 빌미 잡히고 욕만 태배기로 얻어먹은 거다. 시민혁명 좋아하네! 100만표 잃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씨앗을 뿌려놓고 5년 후, 또 10년 후에 그 열매를 수확하는 거다.
노무현이 요청한 시민혁명은 올 총선이 아니라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선거에서 일어날 것이다. 노무현은 그렇게 이 척박한 대지에다 한 줌의 씨앗을 뿌렸던 거다. 손해 볼거 각오하면서 말이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논객들이 잔머리 굴려서 요건 피하고.. 조건 받아주고.. 이런 식으로 안된다. 황태연식 강단전략가로 안되고 강준만식 책상물림 강단전략으로 안된다. 큰 변화의 시기다. 우리는 바보여야 한다.
노무현은 바보였다. 15년을 얻어터지고 살았다. DJ도 바보였다. 40년을 깨지고 살았다. 바보는 우직함이 무기다.
우직하게 가는 거다. 덫인줄 알면서, 함정인줄 알면서 가는 거다.
네티즌은 물이다. 물처럼 간다. 홍수처럼 밀어붙인다.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인다. 허방이라도 가고 함정이라도 간다.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간다. 풀처럼 눕고 풀처럼 일어난다. 잡초처럼 밟히면서 간다. 안되면 될 때 까지 간다!
건전한(?) 보수세력 비위 안건드리고.. 안전운행 잘 해서 150석 대박내겠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선거라는 것이 그렇게 우리들 입맛대로 호락호락한 것 아니다. ‘수구 프리미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몫을 인정해야 한다.
깨질 땐 깨지더라도 싸울 땐 유감없이 싸우고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것이 맞다.
우리 비굴하지 말자.
100을 찜해놓고 50을 건지는 것이 선거
이겨놓고 싸운다고 했다. 전략은
판을 짜는데 쓴다. 이미 판이 짜여지고 싸움판이 달아올랐다면 전략이고 전술이고
다 필요없다. 오직 용기만이 필요하다. 대가리 깨지는 백병전을 각오해야 한다. 10석을
잃고 스무석을 잃고 그 남은 것을 건지는 거다.
마케터님 말마따나 100을 찜해놓고 50을 건지는 것이 선거다. 나머지 50은 지금 찜해놓고 다음에, 그 다음에 건져도 충분하다.
우리의 진짜 적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정당한 몫 만을 찾아오는 거다. 그 이상 헛된 거품을 기대해서 안된다. 잔머리 굴려서 150석 얻으려다가 하늘이 준 100석도 못 얻는 수 있다.
겸손하게 가자. 우리의 본실력으로 승부하자.
이 싸움의 본질은 권력이라는 코드
옛날에 김두한이나 이정재 같은
무뢰배들이 백골단이니 땃벌떼니 하며 극우세력에 이용된 데는 이유가 있다. 또한
간단하다.
“빨갱이들은 에미 애비도 없는 놈들이다.”
이 말 한마디면 다 넘어간다.
무엇인가? ‘상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회의 밑바닥 중에 가장 밑바닥인 하층민들이 쉽게 극우에 포섭이 된다. 그들은 아무런 기득권도 없다. 그들은 늘 지배계급에 착취당하고 살아왔다. 왜 그들이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서지 않고 가진 자의 편에 서는가?
단지 못배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계몽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본질에서의 이유가 있다.
“빨갱이들은 에미 애비도 없다.”
이 한마디의 말이 함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중동이 김수환을 걸고 자빠지는 것은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반미니 친북이니 하는 것은 구실이고 트집이다. 본질은 따로 있다. 무엇인가? ‘코드’이다. 의사소통수단 말이다.
그들의 작은 기득권은 마초가부장이라는 권위다. 그들의 유일한 자존심은 부모라는 위치, 어른이라는 위치, 한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웃사람이라는 위치, 상놈은 나이가 벼슬, 가부장의 권위다. 그들의 하나 남은 밑천이 달랑 그것 뿐인데 바로 그 곳을 건드린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밑바닥의 하층민들이, 가장 극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한다.
코드가 권력이고 코드가 진보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좌파들이 말하는
식의 계급이 어쩌고.. 분배가 어쩌고.. 하는 물질적인 측면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 많은 부분이 ‘심리’와
‘정서’의 차원이다. 단지 그들이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가진 자의 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코드’가 있다. 곧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 코드는 문화이기도 하고, 풍속이기도 하고, 관행이기도 하고, 습관이기도 하고 정서이기도 하다. 가부장의 권위도 어떤 면에서 하나의 코드이다. 그 코드 만드는데 의외로 많은 정신적 자산이 투입되는 것이다.
이등병 때 고참들에게 두들겨 맞은 병사가 있다. 나는 나중 후임병들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 결심 지켜지는가? 아버지에게 매맞으면서 자란 아들이 나는 아버지 되면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 결심 지켜지는가?
맞으면서 짬밥먹은 병사는 매질이 의사소통 수단이 된다. 맞으면서 자란 아들은 폭력이 의사소통 수단이 된다. 그들이 상병계급장 달았을 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서는 후임병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맞으면서 자란 어른은 자기 자식을 두들겨 패는 방법으로만이 자식과 소통한다.
폭력이 코드이고, 폭력이 의사소통수단인 것이다. 이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상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은 나이가 코드이고 나이가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말이다. 그 코드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커다란 상실이 된다. 바로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다.
김수환, 전여옥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이유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고통을 넘긴다. 그들은 의사소통 수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사회의 주된 변화의 흐름에서 배제되어 왕따가 된 것이다. 아마 그들은 노대통령 당선 이후 실제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거다.
가장 밑바닥의 하층민이 “빨갱이들은 에미 애비도 없다.” 이 한마디에 넘어가서, 곧 의사소통이라는 본질의 한계에 직면하여, 가부장의 권위라는 알량한 기득권을 잃고, 공동체 내의 의사소통그룹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 하여, 기득권층과 야합하는.. 이 본질적인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좌파들 방식의 일방적인 계몽이 아니라 대단히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하다.
부정적코드를 긍정적 코드로 바꿔라
늘 만나는 친구가 있다.
‘야 오늘 날씨 한번 좋다’하고 인사를 하면 ‘짜샤!
오늘 날씨가 뭐가 좋냐? 춥기만 하다’ 꼭 이런 식으로 대꾸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반드시 반대의견을 낸다. 그래야만 대화가
된다.
상대의견을 대놓고 부정하지 않고는 애초에 대화가 안되는 친구가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코드의 문제이다.
한겨레신문이 안팔리는 이유는.. 매사에 부정적인 이 친구처럼 ‘부정적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무언가를 부정하는 방법으로만이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늘 이맛살 찌푸리고 잔소리나 하고 있는데 신문이 팔릴 리가 있나?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희망과 대안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고도의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하다. 사전 환경조성도 필요하다. 무엇인가? 의사소통의 기본 툴을 긍정적 코드로 바꿔줘야 한다는 말이다.
조중동이 잘팔린 이유는 긍정적 코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아아 대한민국” “잘 살아보세” 하는 거 말이다. 조중동의 진짜 위기는 정권교체 이후 그들이 긍정적 코드를 버리고 부정적 코드로 바꾸었다는데 있다.
6년전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그들은 말끝마다.. ‘나라가 망한다’. ‘안보가 걱정이다’. ‘반미가 우려된다’, ‘친북이 걱정된다’..는 식이다. 김영삼이 나라를 말아먹어도 걱정을 안하던 자들이 6년전부터 180도로 변했다.
그들은 늘 미간을 찌푸리고.. 노파심에, 걱정에, 고민에, 우려에, 불안에.. 이러니 “신난다 월드컵”, “한국영화 대박이네”, “서태지 만세” 하는 긍정적 코드의 젊은 세대로부터 왕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명백히 공동체 내 주된 변화의 흐름을 담보하는 의사소통의 라인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 코드’와 ‘부정적 코드’가 있다. 옛날에는 조중동이 긍정적코드를 가졌고 한겨레가 부정적 코드를 가졌다. 지금은 조중동과 한겨레가 부정적이고 온라인만 긍정적코드이다. 딴지일보의 명량딴지정신부터 서프라이즈의 포지티브정신까지.. 또 디시인사이드의 유머포토에 이르기까지 온라인은 긍정적 코드 일색이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한국가요의 팝음악에 대한 승리에.. 인터넷의 얼짱신드롬에.. 젊은 층 특유의 생기발랄한 긍정적 코드이다. 우리의 희망이 여기에 있다. 한겨레의 부정적 코드로 안되고, 좌파들의 부정적 코드로 안되고.. 가짜긍정에 열심이다가 부정적 코드로 돌아선 조중동으로 안된다.
섣달 그믐에 차례를 앞두고 집마당과 뒤안을 깨끗이 청소 하듯이.. 그 모든 부정적 코드를 구석구석 쓸어내고 긍정적 코드로 바꾸어 우리가 판을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빨갱이들은 에미 애비도 없다.” 이 한마디에 넘어가는 밑바닥의 하층민들을 공동체 내 의사소통라인에서 소외시키지 않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좌파들의, 한겨레신문의 방식이 일방향적 계몽주의를 통한 코드독점의 방법으로 하층민들을 공동체 내 의사소통라인에서 배제하므로서 명백히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 하층민들은 자본의 착취보다 공동체 내 의사소통라인에서의 소외를 더 두려워 한 것이다.
긍정적 코드로 조중동을 잡아먹자
전여옥의 비명, 김수환의 잔소리가
다 무엇인가? 조중동의 김수환걸고 자빠지기가 다 무엇인가? “빨갱이들은
에미 애비도 없다.” 그들은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정권교체 후 그들은
사회의 주된 변화의 흐름에서 배제되어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에미 애비'의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주된 변화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왕따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 이미 왕따가 되었다는 고통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전여옥은 울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여옥도 끼워주고.. 날이면 날마다 김수환추기경님께 문안인사도 드리면서.. 그들을 소외되지 않게 따뜻하게 배려해주어야 하는가? 날이면 날마다 자칭 국가원로(?)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직대통령께 문재인수석이 찾아가서 문안인사를 드려야만 하는가?
역사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전여옥들의 소외는 어쩔 수 없다. 김수환의 고독감은 본인이 자초한 것이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다. 포기할건 포기해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는 단학선원이라도 찾아가서 명상수련을 하는 방법으로 고독을 견디는 수 밖에 없다.
구제불능의 그들은 마땅히 배척되고 소외되어야 한다.
모두를 소외시킬 수는 없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긍정적 코드를 생산하고.. 되도록 많은 다수를 이 코드와 분위기에 참여시켜야 한다. 또한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영화 대박이라는 긍정의 분위기, 월드컵 4강이라는 긍정의 분위기, 인터넷강국이라는 긍정의 분위기에 최대 다수를 동참시켜야 한다.
축제를 열어야 한다.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밑바닥 사람들도, 거리의 불량배 아저씨들도, 재래시장 구멍가게 아줌마들도 이 긍정적 코드와 명랑딴지의 분위기에 참여시켜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식으로 “잘 살아보세”, “파병해서 이라크 점령하고 석유 뺏어 부자되세” 하는 맹랑한 허위선전을 해서는 안된다.
긍정적 코드를 생산하고, 의식적으로 훈련시켜 국민의 최대 다수를 소외시키지 않고 이 즐거운 개혁의 분위기에 참여시키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해야 하는 난제 중의 난제인 것이다.
축제를 열어야 한다. 생각하면 세계에서 가장 축제를 안하는 ‘우울한 나라’, ‘근심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선거도 축제이어야 하고.. 개혁도 월드컵이어야 한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이 즐거운, 긍정의, 희망의 분위기로 감염시켜야 한다.
우울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신명나는 개혁을 위하여..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한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방식은 심리전에서 진거다. 그들은 소외의 극복을 내세웠지만 공동체 내 의사소통라인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민중을 소외시켰다.
문제는 유교주의 문화다. 군대의 고참은 폭력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듯이.. 유교주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코드이면서, 의사소통 수단이면서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사람들의 알량한 기득권이다.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밑바닥의 가부장들에게 소외감을 주지 않고.. 의사소통라인에서 배제하지 않고.. 마침내 잘못된 그들의 의사소통방식을 올바른 진보적 의사소통방식으로 훈련시켜 내는데 성공하면서.. 즐거운 개혁의 바람에 동참시키려면 구태의연한 계몽으로 안되고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해야 한다.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 지혜를 모으기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