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는 난세의 법도가 있고 치세에는 치세의 법도가 있다. 노무현과 같은 민중적 캐릭터는 지금과 같은 난세에 필요한 것이고,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식인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지식인의 몰락은 미국과 같은 ‘깡패국가’의 탄생으로 결과할 뿐이다.
『좃은일보와 '조지부'씨의 관계가 수상하다.. 그림은 본문과 무관, 원판 또디와 관련약간.』 |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무력과 경제력이 아닌 문화력으로 하여 존경받는 나라 곧 ‘김구선생이 꿈꾸었던 나라’를 일구어가기 위하여, 이런 때 지식인의 적극적인 역할하기가 요청된다 하겠다.
필요한 것은 지식과 비지식을 구분하는 안목이다. 민중이 그 안목을 가져야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 지식과 비지식 사이에서 곡예를 벌이는 경계인 송두율을 논하는 것은 그러한 목적에서이다. 주사파처럼 상식적으로 아닌 것은 좀 구분하고 살자는 거다.
송두율, 지식과 몽매 사이에 선 경계인
북한이 해외인사로 정치국 후보위원을
둔 것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된 북한이 최소한의 대외창구를 개설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핵위기 때 카터가 남북을 오가며 중재했듯이, 북한은 김일성의 장례식 과정을
서방에 알려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이며 송두율이 선택된 것이다.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입장에서 위기이자 곧 기회이다. 북한은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살리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공산권 각국은 나름대로 북한에서 활발한 조문외교를 펼쳤다. 그 조문외교의 장이 송두율이 역할할 공간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국정원이나 CIA가 손놓고 놀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북한의 목적은 해외인사를 참관시켜 북한측에 유리한 정보를 자연스레 서방에 알리는데 있으므로, 그 정보가 국정원이나 CIA에 흘러들어갈 것을 염두에 두고 송두율을 초청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러한 역할을 염두에 두고 송두율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위촉했다고 볼 수 있다.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어른이다. 알거 다 아는 어른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 얼마든지 의심과 억측과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지식인이라면 그러한 후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송두율은 거물급 스파이처럼 처신하고 있다. 그의 발언들은 ‘CIA와 윗선에서 다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왜들이래?’하는 느낌을 준다. 이런 식으로는 지식인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의 행태에서 신중함과 사려깊음은 발견할 수 없다. ‘나만 떳떳하면 된다’가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나를 의심케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준법서약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 지식인의 태도이다. 통과의례로 노동당에 입당할 수도 있다는 식이라면 양아치나 다름이 없다. 통과의례가 부족해서 양심수가 40년씩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향이니, 속죄니, 관용이니 다 싱거운 소리들이다. 전향은 간첩이나 하는 것이며, 속죄는 정치인이나 하는 것이며, 관용은 일반인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지식인에게는 전향도, 속죄도,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막말로 송두율이 뭐 잘못한 거 있수? 잘못한게 없는데 사과는 무슨 얼어죽을 사과야?
학자가 자기 양심에 따라 한 일에 실정법을 논하는 것은 의미없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으므로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 그를 처벌할 필요도 없고, 전향시킬 필요도 없다. 단지 그가 지식인인지 아닌지를 가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창원이 경찰청장으로 등극하는 날이 올까?
황장엽이 과거를 참회하기
위해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것은 신창원이 과거를 속죄하기 위하여 경찰청장이
되겠다는 주장과 같다. 죄를 지었으면 잠자코 앉아 자숙을 해야지 죄값을 벌충하겠다며
떠들고 다녀서는 안된다.
닥치고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배반자의 더러운 손으로 해서는 안된다. 북한을 배반했건, 가족을 배반했건, 남한을 배반했건 배반의 무게는 동일하다.
지식이 지식일 수 있는 이유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며 한번 친일파는 영원한 친일파다. 미당 서정주가 독립 후에 과거의 친일행각을 반성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러나 그가 지식인이라면 일제가 망하는 날 할복을 하든지, 아니면 입닥치고 잠자코 있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돌아온 탕자론’을 설파하는 사람도 있다. ‘탕자’는 미성년의 의미다. 어린이의 가출은 용서된다. 어른의 가출은 용서되지 않는다. 탕자는 미성년으로 가출하였고 어른이 되어 철이 들었으므로 돌아온 것이다. 어른의 가출은 가출이 아니라 분가다. 세상에 분가는 있어도 합가는 없다.
사회학은 실천학이다
‘학문은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송두율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은 비판받을만 하지만 그의 학문적
성과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천만에! 학문을 실천과 떼놓고 별개로 보는
시각은 서구의 잣대요 그것도 자연과학에나 해당될 성질의 것이다.
동양에서 학문이 실천과 구분되어진 일은 역사이래 없다. 사회학은 실천학이다. 공자의 입으로 내뱉어진 그 언어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고 그르고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번 내뱉은 말을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밀고 나갈 에너지가 있느냐로 판단하는 것이다.
유가주의가 3천년의 맥을 이어온 것은, 그 언어가 그럴듯해서 우리 조상들이 멍청하게도 그 언어에 잘도 속아넘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바탕에 그만한 에너지가 고여 있었기 때문이며, 그 에너지는 그 언어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 실천에서 얻어진 것이다.
사과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본인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자기고백이 된다. 전향한다는 것은 스파이였다는 자기고백이 된다. 그러므로 사과해서도 안되고, 반성해서도 안되며, 전향해서도 안되고, 처벌해서도 안되고, 추방해서도 안된다.
나는 100년 후에도 미당 서정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1천년 후에도 박정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황장엽과 송두율의 명예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건 다 용서가 되어도 '지식'의 권위에 똥칠한 죄는 용서될 수 없다.
내 꿈은 여전히 ‘김구선생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게 불명예는 곧 죽음과 통한다. 우리는 명예로 처벌할 수 있을 뿐이며,
명예로 심판할 수 있을 뿐이며, 명예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송두율을 처벌할
수 없다. 잃는 것이 큰 만큼 얻는 것도 있어야 한다. 이번 일을 지식과 비지식을
구분하는 안목을 얻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