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은 대칭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대칭을 찾게 된다. 뇌가 그렇게 작동한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도구라면 칼이다. 이쪽을 쥐고 저쪽을 바라본다. 손잡이를 쥐고 칼날을 휘두른다. 창을 쥐고 곰을 바라본다. 활을 쥐고 사슴을 겨냥한다. 대칭시키는 것이다. 언어도 대칭이다. 주어와 동사 대칭을 기본으로 다시 동사와 목적어의 대칭을 찾는 식이다. 주어와 목적어의 대칭을 고리로 목적어와 동사의 대칭을 찾는 식으로 하나씩 연결해 가는 것이다. 대칭을 위주로 연결에 연결을 더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온통 대칭이다. 선을 쥐고 악을 통제한다. 정의를 쥐고 반칙을 통제한다. 머리를 쥐고 꼬리를 지배한다. 강자와 약자, 밝음과 어둠, 원인과 결과, 영웅과 악당이 대칭된다. 뭐든 대칭되어 있다. 인간이 개념을 도구처럼 쓰기 때문이다. 도구가 그대로 대칭이기 때문이다. 도구는 인간과 대상을 연결한다. 연결이 대칭이다. 언어도 인간과 존재를 연결한다. 칼자루를 쥐고 칼날을 휘두르듯이 한 가지 개념을 알아내면 그것을 고리로 대칭을 판단하여 반대개념을 찾는 식으로 지식을 넓혀간다. 문제는 안으로 대칭인가 밖으로 대칭인가 방향의 문제다.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밖에서 답을 찾는다. 초딩이 일기를 쓴다면 무심코 외부의 선생님과 대칭시킨다. 오늘은 장난을 치다가 그릇을 깨뜨리고 할머니께 야단을 맞았어. 다음부터는 장난을 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선생님이 내 일기를 읽어본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이다. 일기가 아니라 보고서가 되어버린다. 왜 반성하고 다짐하지? 일기를 통해 선생님께 말을 건다. 왜 내 일기를 쓰는데 타인인 선생님을 호출하지? 그럼 일기를 왜 쓰느냐고? 선생님이 나를 감시하니까 쓰는 거다. 이는 무의식이다. 매일 뭔가를 깨뜨리고 반성해야 한다. 곤란하다. 남과 대칭시키지 말고 내부에서 돌아가는 자체 질서를 찾아야 한다. 나무와 참새 사이의 질서, 구름과 햇볕 사이의 질서, 고양이와 개 사이의 질서, 호박과 감자 사이의 질서를 찾아보자. 선생님을 배제하고, 나를 배제하고, 사건 자체에서 서로 간의 숨은 대화를 끌어내야 한다. 그럴 때 여름방학 한 달 치 일기를 하루에 몰아 쓸 수 있다. 쉽잖아.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내재된 질서에서 대칭을 찾아야 한다. 내부에 대칭이 숨어 있다. 자연의 질서가 있고 사건의 질서가 있다. 인간의 언어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타자와 대칭하고 관측자인 나와 대칭시킨다. 대칭을 세우면 상대성이다. 상대성은 믿을 수 없다. 그 경우 연결이 끊어진다. 던진 공이 되돌아온다. 다음 단계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을 돈다. 아웅다웅하며 교착되어 결론을 내지 못한다. 절대성을 찾아야 한다. 상대성은 거짓이다. 절대성은 대칭의 축이 있다. 축은 대칭된 둘이 겹치는 부분이다. 외부와 대칭시키면 그 겹치는 부분이 잘 포착되지 않는다. 너와 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뭐지? 그것을 찾지 못하면 사랑은 실패다. 공유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부에서 그것을 찾기는 쉽다. 가족 내부에서 서로 겹치는 부분은? 뻔히 보인다. 그것은 공유다. 생활비를 공유하고 거실을 공유하고 식탁을 공유한다. 외부인과 겹치는 부분은? 모르겠다. 그것을 알아내야 통제할 수 있다. 절대성으로 도약할 수 있다. 던진 공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않고 계속 굴러가며 바이럴 마케팅으로 전파되어 천만 관객 몰아올 수 있다. 상대성은 틀렸다. 대칭되는 대상이 바뀌면 다른 결과가 나오므로 그 정보는 의미가 없다. 내부적으로 돌아가는 자체 질서에 답이 있다. 내부적으로는 항상 겹치는게 있기 때문이다. 절대성이 작동하고 있다. 어느 분야든 그 바닥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질서다. 검사와 경찰의 서열이다. 닫힌계 안에서 작동하는 그 세계의 자체동력이 있다. 외부인은 잘 모르는 그런 것이 있다. 거기에는 축이 있다. 경찰과 검찰,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축이다. 그 축을 움직이면 곧 통제된다.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진짜배기 지식이다. 내부의 숨은 균형자를 찾아내기다. 대칭된 둘 사이에 겹쳐 있는 축을 파악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핸들링할 수 있다. 곰 세 마리가 있다면 그중에 한 마리는 엄마곰이다. 엄마곰을 잡으면 새끼곰은 따라온다. 축은 엄마곰이다. 아빠곰은 거기 없다. 상대성과 절대성의 차이다. 상대성은 축이 없으므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한다. 밖에서 겉돌며 괜히 집적거리게 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봤지만 말을 걸지는 못하고 주변에서 얼쩡대며 배회하는 격이다. 통제수단이 없다. 인간의 지식이란 대부분 이런 식이겠다. 어떻게 하지? 칼날이 있는데 손잡이가 없다. 어떻게 하지? 일단 집적대 본다. 건드려서 반응을 끌어내고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다음 계획을 수립하자. 보기 좋게 실패한다.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화나게 한다. 이런 식이다. 관심 있는 대상 내부의 자체질서를 찾아야 핸들링이 되는 거다. 한편으로 지식인과 기득권은 외부를 닫아걸고 오직 내부만 보려고 하는 병폐가 있다. 대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권력의지 때문이다. 외부에 대칭을 세우면 확대지향하고 내부에 대칭을 세우면 축소지향이 된다. 지식인과 기득권의 가둬놓고 조지려 하는 권력의지가 문제 된다. 근대주의가 촌놈이 처음 세계를 발견하고 확대지향이라면 탈근대는 한계를 절감하고 되돌아온 축소지향이다. 젊은이는 뻗어가려 하므로 확대지향이고 노인은 가봤자 별수 없네 하고 축소지향이다. 올바른 사유의 방법은 가장 큰 범위에 계를 먼저 정하고 점차 좁혀가는 거다. 천하관의 획득이 먼저다. 문명 단위의 사유를 얻어야 한다. 범위를 좁히고 거기서 한 번 더 좁히고, 다시 한번 더 좁히며 한 방향으로 계속 갈 수 있다.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시작하므로 낭패다. 닫아걸면 에너지 조달이 끊기고 문을 열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 딜레마가 있다. 문을 열면 외국으로 튀고 닫아걸면 경제가 말라 죽는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가장 큰 범위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그물을 좁혀오면 걱정이 없다. 보통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시작하므로 그물을 던지면 큰 바다로 고기가 도망가고 작살을 던지면 겨우 한 마리만 잡혀 온다. 강자들은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 기득권이나 가부장이나 지식인이나 엘리트나 권력자나 마찬가지다. 힘 있는 사람은 외부를 닫아걸고 내부만 바라본다. 반면 민중은 언제라도 외부를 바라본다. 밑바닥에 있는 자는 자기보다 아래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는 언제나 바깥을 본다. 아기에게는 안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부장은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처럼 과잉보호하며 가족 내부만 바라본다. 외국을 바라보며 비난하는 밑바닥의 민중이나 그것을 국가주의, 민족주의로 비난하며 내부만 관심 갖도록 하는 좌파 지식인이나 비뚤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에너지는 밖에서 오므로 반드시 바깥에서 시작해야 한다. 민중은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밖을 쳐다보며 갈구하는 것이다. 정작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 바깥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화를 낸다. 왜 일본은 혐한하고 한국은 반일할까? 화나기 때문이다. 왜 민중은 화날까? 원래 민중은 화가 난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가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바깥을 연결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뚤어진 국가주의,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일단 민중이 바깥을 바라보는 사실 자체는 정상이다. 바깥에 답이 있으므로 바깥을 바라보는 거다. 지식인은 에너지가 있으므로 밖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외국에 가봤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다. 외국과 연결할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에너지가 자신에게만 있고 민중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에너지를 틀어쥐고 민중을 조롱할 뿐 조금도 나눠주지 않는다. 민중을 비난하여 그들의 부아를 돋군다. 자기가 틀어쥔 에너지의 가치를 극대화 시켜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못된 심보다. 가장 큰 범위에서 시작하여 한 방향으로 계속 좁혀가는 일원론의 사고를 얻어야 한다. 그럴 때 둘의 겹침에서 대상을 통제하는 절대성의 축이 획득된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관측자로 두어 대칭시키거나 혹은 타인과 책임 떠넘기기 핑퐁하며 대칭시키거나 혹은 자신을 감시하는 누군가를 의식하며 외부대칭 하면 실패다. 그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 대칭되나 겉돌게 된다. 지렛대를 꽂아 넣지 못한다. 자체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난 짜장면이 좋아.’ 하면서 자신과 대칭시킨다. 짜장은 짬뽕과 비교해야 한다. 그것이 자체질서다. 짜장에는 뭐가 어울리고 짬뽕에는 뭐가 걸맞다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축의 발견이다. 그래야 통제될 수 있고 연역될 수 있다. 다음 단계로 진행하며 구조가 복제될 수 있다. 아이디어는 무한히 뻗어나간다. 어울리는 조합은 무한하니까. 너와 나의 대화에서, 짜장과 짬뽕의 대화로 그리고 다시 짜장 안에서 면과 단무지의 대칭으로, 다시 면 안에서 면발와 춘장의 대칭으로 범위를 좁혀가야 답을 찾는다. 이렇듯 자체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대칭의 겹침에서 대상을 통제하는 축을 획득하기다. 보통은 대칭을 찾지만 축이 포착되지 않으니 상대성의 한계에 부딪혀 겉돌게 된다. 칼은 있는데 손잡이가 없다. 여자 사람은 있는데 말을 걸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다. 선의 대칭은 악이다. 악은 밉다. 분노한다. 흥분한다. 저 새끼 나쁜 새끼야. 고얀! 괘씸한. 쳐죽일. 여기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냥 흥분한 거다. 아무런 논리가 없다. 씩씩대고 있다. 막연히 '맞어맞어.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하면서 추임새만 넣게 된다. 사유가 막혀버리는 것이다. 선과 악을 통제하는 사회성이라는 축이 존재한다. 사회성은 선과 악이 공유한다. 겹치는 부분이다. 선도 악도 혼자서는 못한다. 사회와 멀고 가까운 거리가 사회성이다. 멀어지고 다가서며 조절된다. 그럴 때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새로운 지평이다.
새로운 무대가 뜨면 핸들링에 성공한다. 액션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화만 내지 말고, 변죽만 올리지 말고, 다가가서 내부에 깊숙이 지렛대를 꽂고 적극적으로 핸들링을 해야 한다. 조절해야 한다.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서로 공유하고 겹치는 부분을 통제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일정한 비율의 공유지가 있어야 한다. 공원이 있어야 한다. 사유지만 있으면 인간은 고립된다. 자연인처럼 틀어박혀 있으면 통제되지 않는다. 내부에서 돌아가는 자체 질서를 찾아야 한다. 견주가 개를 길들이지 못하는 것은 개의 논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좋다 싫다의 논리로 상대하지만 개는 흥분과 이완으로 행동한다. 개를 말린다면서 자극하여 흥분시킨다. 개는 흥분상태의 전율을 기억하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흥분한다. 아주 발광을 하는 것이다. 견주는 딴전을 피우고 하품을 하며 가만있어야 한다. 견주가 5분만 가만있으면 개도 심드렁해져서 침착해진다. 개의 논리와 사람의 논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개는 개 자체의 돌아가는 질서가 있다. 사람은 개를 말린다지만 개 입장에서는 주인이 요란하게 수선을 떨며 흥분하게 만든다. 항상 그런 자체질서가 있다. 세상은 대칭이고 대칭은 안에도 밖에도 있고 서열이 있고 축이 있다. 가장 큰 게임에서 시작하여 범위를 좁혀가며 한 방향으로 계속 가면 에너지 조달은 순조롭다.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다. 부족민을 통제하려면 족장을 먼저 찾아가야 한다. 그런 자체 규칙이 반드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