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의 맷집과 이재용의 애절함 조중동이 추미애 죽이기를 하는 이유는 먹힌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다. 옳다, 그르다는 판단하지 않는다. 먹히느냐, 먹히지 않느냐를 판단한다. 데스크에서 구수회의를 하며 이거 가느냐 마느냐를 판단한다. 먹힌다 싶으면 일단 가는 거다. 뒷일은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된다. 자기네가 틀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어도 확전만 되면 공범을 끌어들여 물타기 할 기회가 있다. 확전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이재용 구하기의 일환으로 돌려까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삼성 장학생이라도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 재용이 살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추미애를 매우 때리면 지들도 망부석이 아닌 이상 눈치를 채겠지. 이런 그림. 보수는 무능프레임으로 까야 한다. 왜? 유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진보무능 보수유능. 오래된 프레임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명박 무능해. 박근혜 더 무능. 보수가 무능을 들키면 한 방에 간다. 마찬가지로 진보는 도덕성으로 떴기 때문에 부도덕을 들키면 한 방에 간다. 그래서 저러는 거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미국이라면 당선시점부터 재선을 준비한다. 3년 동안 기획안을 다듬어 일제히 쏟아낸다. 한국은 불가능하다. 2년 후면 임기 끝인데 미래 청사진을 낼 수 없다. 청사진은 차기 주자가 낸다. 그런데 이르다.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이 조중동이 발포하기에는 맞는 타이밍이다. 우리는 양다리를 걸쳐야 한다. 진보 하나만 외치면 조중동에 씹힌다. 핸들을 잡기 전에는 진보만 외치는 게 맞다. 그래야 일관된 메시지로 신뢰를 얻는다. 우리가 핸들을 잡았다. 운전사는 버스 전체를 통제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슨 말인가? 누가 진보냐다. 추미애? 아니다. 진보는 젊은 유권자다. 진보의 도덕성은 추미애의 과거 행적이 아니라 추미애를 밀어준 젊은 유권자들의 도덕성인 것이다. 추미애는 젊은이들에 고용된 일꾼이다. 맷집을 보여야 한다. 과거를 보상받는 것이 아니다. 조중동은 추미애가 도덕군자임을 증명하여 보상으로 장관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도덕군자가 아니므로 상을 잘못 줬다는 논설이다. 그런데 진보는 과거보상이 아니라 미래의 대책이다. 젊은 진보가 추미애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일을 시키는 것이다. 추미애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 된다. 맷집을 보여줘야 한다. 그럴 때 유권자는 다른 게임으로 진출한다. 계획을 가진 사람이 맷집을 보여준다. ‘추미애는 다 계획이 있구나.’ 이런 말이 나와줘야 한다. 진보는 미래고 보수는 과거다. 선거를 하다 보면 반대로 된다. 진보는 과거의 광주항쟁, 과거의 친일을 들추고 보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세계화를 주장한다. 뭔가 꼬인 것이다. 진보가 과거심판에 매몰되고 보수가 미래개척이라면 잘못되었다. 잘못된 프레임에서 탈출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자. 진보는 미래의 젊은이를 위해 공정한 룰로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보수는 과거의 경험치를 내세우며 한 번 더 사골을 우려먹자는 거다. 과거에 쌓은 경력을 사장시키기 아까우니 한 번 더 부려 먹자. 경험 많은 베테랑의 축적된 기술을 그냥 버리기가 아깝잖아. 이런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선거에 이기려고 용을 쓰다 보니 스탠스가 꼬였다. 진보는 과거의 도덕적 행적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미래의 개척을 위한 룰의 제정이다. 지나온 과거를 보상받는다면 박원순처럼 도덕적 결벽증을 증명하는게 맞지만 미래를 개척한다면 맷집이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진보가 과거집착이고 보수가 미래개척이면 선거전에 상대방 약점 찾다가 꼬인 거다. 진보가 미래의 개척이다. 과단성을 보이고 결기를 보여야 한다. 맷집이 필요하다. 계획을 가진 자는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다. 계획이 없는 자는 죽고 있는 자는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