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냐 치열이냐. 인간은 호르몬에 지배된다. 깨달음은 호르몬을 바꾸는 것이다. 호르몬은 너와 나의 경계를 정한다.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느냐 아니면 타자로 보고 적대하느냐다. 약자는 적대한다. 유기견은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 강자는 포용한다. 큰 개는 아기를 물지 않는다. 호르몬이 정한다. 도구를 가진 자는 상대를 포용한다. 도구를 써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는 자는 일단 공격한다.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야 자신의 전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를 만들려는 행동이다. 상대의 마음속에 지렛대를 꽂아 넣으려는 기동이다. 그 지렛대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도구다. 엘리트는 세상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고 대상을 통제하는 도구를 가진 자다. 엘리트는 호르몬이 다르다. 호르몬이 바뀌지 않았다면 가짜 엘리트다. 지도자의 호르몬이 나와야 엘리트다. 도구는 원리로부터 발전된다. 원리는 연기다. 연기는 연결이다. 연결해야 도구다. 석가는 연기를 깨달았다. 연결을 깨달은 것이다. 연결하는 도구의 획득이다.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 결정할 문제다. 소승불교는 부파불교라고 하는데 부部에 집착한다. 부는 사제관계로 연결된 패거리다. 부족주의 행동이다. 석가의 도구를 들고 자기 부족으로 돌아갔다. 지식이 계급을 넘고 성별을 넘고 국경을 넘으면 부部가 사라진다.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자가 절대권력을 가지므로 부가 해체된다. 대승의 보편주의로 발달하게 된다. 도구를 장악한 자는 일을 크게 만든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나 제국주의나 도구를 쥐고 흥분해서 일을 벌인 거다. 사회주의도 도구다. 혁명도 도구다. 기관총도 도구다. 제국주의도 도구다. 일이 커지면 곧 한계를 만나게 된다. 더 이상 선교할 수 없고 더 이상 정복할 수 없고 더 이상 침략할 수도 없는 장벽을 만난다. 지구의 크기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다시 분열된다. 퇴행이 시작된다. 종교도 도구다. 깨달음도 도구다. 커지려는 방향과 작아지려는 방향이 동시에 존재한다. 처음에는 작고 나중에는 커지며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작아진다. 에너지 한계 때문이다. 깨달음은 원리고 원리는 일원이다. 도구는 연결하고 연결은 원래 하나다. 그러므로 모든 원리는 일원이다. 이원론이니 다원론이니 하는 것은 도구를 갖지 못한 자들의 적응기술이다. 모든 이론은 일원이며 모든 도구는 일원이고 모든 연결은 일원이다. 처음에는 단절되어 있고 도구를 획득하면 널리 연결하며 그러다 에너지의 한계를 만나면 다시 분열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거다. 에너지의 한계다. 사회주의든 제국주의든 20세기에는 열렬했다. 사회주의는 세계를 혁명하려 했고, 제국주의는 세계를 침략하려 했다. 도구를 가지면 그렇게 된다. 칼을 쥐면 휘두른다. 한계를 만나 주저앉게 된다. 탈근대 나와주신다. 새로운 도구가 떴다. 인터넷이다. 다시 연결한다. 근대주의가 옳으냐 탈근대가 옳으냐 하는 물음은 바보짓이다. 에너지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인터넷이 세계를 통합하니 세계화가 좋지 않다. 인터넷을 끊자. 이런 소리를 하면 탈근대 또라이다. 도구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길이 있으면 가는 것이고 길이 막히면 더 이상 못 가는 것이다. 가느냐 못 가느냐는 길이 정하지 내가 정하지 않는다. 석가의 연기는 원리다. 그것은 도구다. 도구를 해석하고 사용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칼을 쥐면 휘두른다. 대승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칼을 휘둘러버렸다. 소승불교는 따진다. 석가는 휘두르지 않았는데 너는 왜 칼을 휘두르느냐? 그거야 내 맘이지. 칼자루 쥔 자의 마음이다. 기독교도 같다. 아케나톤이 원리를 만들었고 유대인은 그 원리를 부족의 결속을 다지는 데 쓰고 있었다. 바울이 봤다. 이 좋은 도구를 왜 작은 일에 쓰냐? 천하의 일에 크게 쓰자. 로마 카톨릭의 보편주의 등장이다. 루터와 칼뱅이 살펴봤다. 로마 카톨릭이 그걸로 뭐하지? 보아하니 정치를 하고 있었다. 왜 정치를 하냐? 산업에도 쓰고 생활에도 쓰자. 개신교 등장이다. 카톨릭이 후퇴하자 유럽은 천하대란이 일어나 이후 500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는 카톨릭을 떠나 왕의 몫으로 되었고 왕은 전쟁을 좋아했다. 우주의 근본은 연결이다. 인간이 그것을 복제하면 도구다. 본질은 도구다. 인간을 움직이는 도구는 호르몬이다. 종교는 호르몬을 바꾼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호르몬이다.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호르몬이 바뀐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깨달음은 호르몬을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수행은 필요 없다. 광장에 나오면 호르몬이 바뀐다. 지도자를 만나면 호르몬이 바뀐다. 파트너를 만나면 호르몬이 바뀐다. 더 큰 세계를 만나면 호르몬이 바뀐다. 호르몬은 3초 만에 바뀔 수 있다. 육조 혜능의 등장이다. 그냥 바꾸면 된다. 너와 나의 경계에서 호르몬이 나온다. 경계를 지우면 호르몬이 바뀐다. 동물원에서 쓰는 방법은 오줌을 묻혀주는 것이다. 왕따 된 아싸 알락꼬리여우원숭이에게 대장 원숭이의 오줌을 뿌려주면 바로 인싸 등극이다. 1초 만에 되잖아. 오줌 한 방으로 1초 만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인간은 만남에 의해 호르몬이 바뀐다. 사람을 만나도 바뀌고 자녀를 만나도 바뀐다. 도구를 만나도 바뀌고 천하를 만나도 바뀐다. 지리산 정상에서 덕유산 정상을 보면 호르몬이 바뀐다. 집단에 소속되면 호르몬이 바뀐다. 큰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큰 절을 지어 큰 법회를 열어보자. 촛불집회 뺨치는 대규모 법회 열어버려. 화엄사상이다. 화엄은 크고 웅대하고 장관이다. 3시간짜리 스펙타클 찍어버려. 100층짜리 빌딩 올려버려. 10만 명 입장하는 경기장 건설해버려. 우주는 크고 갠지스강 모래알은 많으니 스케일을 키워. 호르몬을 바꿔버려. 좋잖아. 못할 게 뭐야? 이런 시기 역사에 항상 있다. 히틀러의 게르마니아다. 그런데 군중이 많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일원은 도구인데 그 도구를 내 손에 쥐어야 맛이지. 100만 명이 모이는 집회에 참여하면 뭣하나. 10명이 사랑방에 모여서 노는 게 낫지. 다시 쪼개지게 된다. 큰 모임은 큰 분열을 일으킨다. 진리는 하나인데 하나 안에 다 집어넣으니 잡탕이 되어버렸다. 법화경은 철저한 하나를 주장한다. 잡탕밥은 곤란해. 짬뽕은 안 돼. 비빔밥 싫어. 각자 따로 살림을 나서 별도로 하나를 추구한다. 탈근대 사상과 통한다. 역사에는 패턴이 있다. 인간이 도구를 장악하면 일단 일을 키운다. 다음 주도권을 다툰다. 그러면서 작아진다. 18로 제후가 한자리에 모였다가 각자 근거지로 돌아가서 자기 세력을 만든다. 근본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호르몬을 바꾼다. 양자역학은 몰라도 된다. 상황에 맞게 호르몬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다. 무의식을 의식하기다. 본능에 조종되지 말아야 한다, 환경에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 능동적으로 환경을 장악하고 대상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려면 연결되어야 하고 연결하는 게 도구다. 석가가 깨달았다는 게 별것 아니다. 도구를 쥐었다는 말이다. 고집멸도 필요 없고 팔정도에 12연기에 108번뇌 필요 없다. 그것은 도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비명소리다. 명상도 필요 없고 수행도 필요 없다. 21세기에 2천 년이나 묵은 경전 읽어봤자 시간낭비다. 금강경에 딱 한 글자뿐이다. 닥쳐!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리면 가만있어도 호르몬이 바뀐다. 자식은 타인이다. 그런데 자신의 일부로 여겨진다. 70억 인류가 나의 다른 버전임을 안다면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해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된다. 지구에 내가 70억이나 있는데도 삶과 죽음에 신경이 쓰이겠는가? 70억을 연주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도구를 갖지 못한 약자들이 유기견처럼 타인을 경계하는 것이다. 강자의 그룹에 들고 강자의 마음을 가지고 강자와 손발을 맞추면 된다. 도구를 가진 자가 강자다. 지식을 가진 자가 강자다. 세력에 가담한 자가 강자다. 진보의 편에 선 사람이 강자다. 교회와 절에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룹에 들려는 것이다. 그룹이 도구다. 도구를 쥐려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편안해진다. 마음 안에 다 있다. 호르몬은 마음이 결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마음을 다루지 못한다. 원인이 아닌 결과에 서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잘하면 칭찬 듣고 잘못하면 징벌 된다. 이는 어린이에 해당된다. 부하나 노예들에게 해당된다. 제왕은 잘해도 칭찬을 듣지 않고 잘못해도 징벌을 받지 않는다. 왕은 잘하든 잘못하든 보상도 없고 징벌도 없다. 그렇다면 왕은 무엇을 얻는가? 왕은 왕을 얻는다. 잘못하면 왕이 아니게 된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왕이 아닌 것이며 그것이 징벌이다. 사람이 선하면 선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보상이다. 인간이 도구를 장악하면 그 자체로 보상이다. 이기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그게 보상이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다. 보상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행하다. 치열함을 찾아야 한다. 만나고 다투면 치열해진다. 게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만나고 속하고 함께 가는 것이 보상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으려는 약자의 마음, 도구를 갖지 못한 자의 대상과 차단하거나 연결하려는 마음을 버리면 호르몬이 바뀐다. 명상도 불필요, 수행도 불필요, 도구를 얻느니만 못하다. 도구를 쥐면 호르몬의 변화를 느낀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 가족을 얻으면, 총을 손에 쥐면, 수단을 얻으면, 자격증을 따면, 높은 레벨로 올라서면, 더 넓은 세계로 여행하면, 다음 게임에 참여하면, 문득 전율하며 호르몬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럴 때 한숨 돌리고 여유를 가지고 판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