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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양을 쫓는 모험
read 15247 vote 1 2010.06.15 (08:00:46)


1. 나 스노우보드 탈 줄 안다



혹시 스노우보드 탈 줄 아시는가? 자랑같지만 나 스노우보드 탈 줄 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뜬금없이 말을 하겠냐마는 때때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게 자부심을 갖게하기도 한다. 물론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겨울마다 스노우보드를 즐기겠지만 말이다. 꼭 스노우보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스키여도 되고, 스케이트면 또 어떠랴?


하여간 2004년 이던가? 2005년 이던가? 겨울에 회사다닐적에 회사 사람들이 스키장 가는데 얼결에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든 타보려고 해도 계속 넘어져서 엉덩이는 새까맣게 멍이 들었고, 추운데 체력은 금방 바닥났고, 처음에만 쬐금 가르쳐주더니 그 후로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사라져버렸다. 


못해도 족히 100번은 넘어진 것 같은데, 오기가 나서 계속 일어나서 타보니까 결국은 타게 되더라.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나 뿐 아니리라. 스노우보드는 처음 배울 때 무쟈게 넘어져서 익히기가 쉽지가 않는데, 일단 탈 수 있게 되면 또 속도감을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2008년이던가? 회사 워크샾을 스키장으로 가서 오전부터 저녁까지 워크샾하고, 다들 숙소에서 협력업체 관계자와 음주가무에 포커판이 벌어졌을 때에, 나홀로 백곰 모자쓰고 밤을 새워 설원을 달렸던 기억도 있다.)




2. 스노우보드 타는 요령



처음에 그렇게 넘어지면서 겨우 스노우보드를 타게 되니까 애초에 보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잘 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발로 평지를 걷는데 익숙한 나머지, 경사면에서는 경사면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스노우보드는 평평한 보드의 면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보드의 양쪽 날로 타는 것이다. 


평지라면 보드의 한쪽 날로 서 있으면 금방 넘어지지만, 경사면이라면 보드의 한쪽 날에 몸무게를 지탱해도 밸런스가 맞는다. 경사면과 각을 세우는 것이 경사면의 언어인 것이다.



스노우보드-02.jpg



경사면은 그 자체가 에너지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간다. 스노우보드를 탄다는 것은 그런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에 답을 하는 과정이다. 눈 밭에서 두 발이 경사면에 닿았을 때의 절대값을 찾는 것이 보딩이고, 물 속에서 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을 때의 절대값을 찾는 것이 수영이다.


눈의 경사면과 각을 세워야 함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경사면과 내 몸무게의 밸런스를 유지하려면 각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경사면의 언어. 눈의 경사면에서 앞-뒤로 각을 세우는 것이 스노우보드고, 좌-우로 각을 세우는 것이 스키다. 스노우보딩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몸의 발목과 무릎의 구조가 위-아래로 굽혀지고 펴지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몸의 무게중심을 발가락 끝에 집중하는 것을 토-엣지(Toe-Edge), 무게중심을 발 뒤꿈치에 집중하는 것을 힐-엣지(Hill-Edge)라고 한다.


이것은 보드의 양 날을 제어하는 것이 우리 몸의 발목이라는 의미다. 발목이 축이고, 엄지발가락과 발 뒤꿈치가 양 날이다. 발목(1심)이 양 날(2날)을 제어한다. (심과 날)


평지를 걸을때에도 한쪽 발로만 깽깽이로 뛰어서 걸으면 힘들어서 얼마 가지 못하듯이, 보드의 한쪽 날만 사용하면 한쪽 방향으로만 가게 된다. 걸을 때 왼발과 오른발은 교차하며 걷는 것처럼, 양 날을 전환하며 방향을 바꿔야지 운동할 수 있는데, 초보들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방향을 전환하려면, 앞쪽 발에 무게중심을 두어 축으로 삼고, 뒷발을 방향타로 삼아서 앞쪽으로 밀거나, 뒷쪽으로 끌어야 하는데, 문제는 방향을 바꾸려고하는 순간 보드의 방향과 경사면이 방향을 같이하여(활강하듯) 갑자기 속도가 붙어버려서, 겁이나서 무게중심을 뒤로 빼게되고, 몸이 뒤로 빠지면 다시 속도를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넘어지고 만다. 그러니 결국엔 용기가 필요하다.


제대로 보드를 타면, 엄지발가락과 발 뒤꿈치의 무게중심(앞- 뒤 밸런스)을 전환하는 동시에, 앞 발(축)과 뒷 발(방향타, 날)의 무게중심(좌 - 우 밸런스)가 동시에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운동한다.


운동의 결과 눈으로 덮힌 경사각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걷는 것 보다 훨씬 빨리 평지에 도달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밀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3. 축과 밸런스의 원리



- 경사면에 있다. 경사면 자체가 에너지이다.


- 경사면에서 아랫쪽을 향해 일자로 몸을 기울이면 활강한다. 하지만 속도를 제어할 수 없으므로 금방 넘어진다.


- 경사면에 보드의 날을 각을 세우면, 경사면에 닿는 면적이 작아져서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한쪽 날만 사용하면 한쪽 방향으로만 간다.


입체 - 앞쪽 발에 무게중심을 잡아 축을 삼고, 뒷쪽 발을 방향타 삼아서 좌우로 놓으면, 경사면과의 각이 반대쪽 날로 전환되면서 방향이 바뀐다. 이렇게 양쪽 날을 번갈아, 방향을 바꿔 운동한다.


밀도 - 내려가 평지에 닿으면, 시간과 공간의 밀도가 생겨난다. 걷는 것보다 몇배나 빨리 평지에 도달한다.




양팔저울의 양쪽 접시가 날이고, 두 개의 접점에 심(축)이 있다. 세상에 선과 악은 없다. 하지만 꼭 선과 악으로 나눠야 한다면, 양쪽의 밸런스가 유지되어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선이고, 밸런스가 무너뜨려서 진행을 방해하는 것이 악이다. 강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악인 것이다. 양 발을 교차하면서 밸런스를 맞추면 우리는 걷거나 뛸 수 있다.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시계추운동.jpg



그런데 말이다. 축은 하나인데, 날도 하나라면? 앞서 보딩에서 방향을 전환할 때에 한쪽 발을 축으로 삼고, 다른 발을 방향타로 삼는다면, 축은 하나고(앞 발) 날도 하나다(뒷 발). 이것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시계추운동) 날 하나가 날 두 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는 걸을 때마다 머리를 묶은 축을 중심으로 머릿결이 좌우로 흔들린다. 심은 하나고 날도 하나지만, 좌-우로 흔들릴 때의 힘을 똑같다. 회전할 때의 좌-우의 힘이 같으면 밸런스가 맞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사냥도구로 썼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장난감으로 더 익히 알려진 '요요'도 손가락에서 요요를 뻗을 때의 힘과 나간 요요가 되돌아 올때의 힘이 밸런스가 맞아야지, 그게 안되면 요요는 손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4. 투수는 타자다



이러한 회전 밸런스의 원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야구는 투수가 던진 볼을 타자가 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투수가 공을 던지는 과정도, 타자가 공을 치는 과정도 같은 원리다.



박찬호 투구폼.jpg



KBS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한 삼성의 선동렬 감독은 투수가 와인드업을 할 때 다리를 들면서 최대한 몸의 중심을 뒤로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땅의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것. 그 다음 축이 되는 발을 내딛는데, 위의 사진처럼 오른손투수의 경우 힘을 모은 오른 발과 내딛는 축이 되는 왼 발 사이의 거리(스트라이드)의 폭이 넓을 수록 구속은 올라간다. 축을 내딛고 뒷발은 몸 전체를 밀어줘서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나가게 한다.


수 십 개의 공을 던지면서 스트라이드 폭을 유지하려면 하체근육이 받쳐줘야 하고, 그렇게 내딛은 축의 발로 허리와 팔을 회전시켜 손끝에서 공의 실밥을 채는 것이 투구동작이다. 박찬호가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이유는 구속이 줄었기 때문이고, 구속이 줄은 이유는 스트라이드 폭이 줄었기 때문이고, 스트라이드 폭을 줄인 이유는 부상으로 하체밸런스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상에서 회복한 박찬호는 지난 2009 포스트시즌에서 97마일(155Km)의 공을 던졌다.)


땅으로부터의 에너지를 받아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여 그 힘이 손끝까지 이어지게 하는데, 처음 시작한 에너지와 공을 뿌릴 때의 에너지가 같아야 밸런스가 맞는 것이다. 시계추 운동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힘이 같은 것 처럼 말이다.



김태균 타격폼.jpg



타자도 마찬가지. 타격 준비자세에서 몸의 무게중심을 최대한 뒤쪽에 두어서 땅의 에너지를 받아서 축이 되는 발을 내딛고, 축을 중심으로 허리를 회전시켜서 공을 타격한다. 타자 역시 스트라이드 폭이 스윙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타격하기 전에 무게중심을 뒤에두고, 팔을 뒤로 빼는동작(테이크 백)이 크면 공을 끝까지 볼 수가 없어서 변화구에 대응하기가 어렵다. 


파워와 정확도의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공을 끝까지 볼 수 있으면서도 하체의 힘을 회전으로 전환하는 스윙.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김태균이 요즘 잘 나가는 이유 중에 하나다. (전 세계에 이런 타격폼은 김태균 밖에 없다고 한다.)


고수는 밸런스를 본다. 코치나 감독의 역할은 선수의 투구나 타격 스타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밸런스를 보는 것이다. 지면의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밸런스 말이다. 괜스레 선수의 스타일까지 고치려들어서 선수생명 말아먹은 케이스도 많다. 감독이나 코치가 팔꿈치가 낮아졌다거나 손목을 꺽어야 한다거나 하는 지적은 전체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중요한 한 가지만 알면, 누굴 대하든, 어떤 상황에 있던, 해법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5. 모든 에너지는 자연에서 온다



스노우보드부터 시작해서 야구 얘기까지 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밸런스의 원리는 스포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생장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자연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그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를 고민해왔다.


1만년 전에도 물은 흐르고, 태양을 빛났다. 지금 인류는 흐르는 물과 빛나는 태양에서 에너지를 얻어 전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에너지는 전부터 그대로 있었는데, 과학이 발전할 수록 자연의 효율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다. 스노우보드가 경사면의 낙하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처럼, 야구에서 땅을 박차는 힘을 스윙으로 전환하는 것 처럼...


에너지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고, 에너지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또 문제가 생긴다.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를 밸런스를 유지해서 가치를 창조는 학문, 제도, 기술의 진보로 이어져 문제를 해결하고, 외부의 문제해결 아이디어(에너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 또한 문제해결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6.15 (10:39:41)


좋소.

'점, 선, 각, 입체, 밀도'는
작용측과 반작용측이 있으므로

작용측을 보느냐 반작용층을 보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질 수 있소.
운동으로 보면 최초 정지해 있던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밀도로 가지만

에너지로 보면 밀도에서 입체로 각으로 선으로 점으로 가는 것이오.
에너지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하오.

운동은 사람 눈에 쉽게 보이지만 에너지는 잘 보이지 않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게 진짜.

결국 지구중력(체중)과 근육의 운동에너지 사이의 밸런스이오.
에너지로 보면 하나의 선이 보이게 되오.

그 어떤 스포츠 종목이든
투구든 타격이든 입력에서 출력까지 한 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선을 볼 수 있다면 성공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6.15 (10:52:05)


근데 일본 선수는
왜 키가 다 똑같은 것이오?

그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경우이오.
큰 선수와 작은 선수가 고루 있어야 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10.06.15 (11:27:04)

지성세력의 세가지 일.

지성과 공동사유
만유와 공동작업
생명과 공동번영

사유는 아니하고 훈장질로 뇌 버리는 것들은 경사면 타고 내달려 멀어져야 하오.
작업은 아니하고 완장질로 몸 버리는 것들은 방망이로 후려 가둬 버려야 하오.

삿된 것들은 멀리두고, 가둬두고.
생명과 공동번영 하오.

새 지성기 나왔으니,
새 지성이 분발하오.

지구 중심으로 달리다.
지구 중심으로 치다.

시원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0.06.15 (15:12:10)

참으로 멋지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6.15 (15:29:02)

뒷머리 협조해주셔서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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